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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3 19:05 수정 : 2014.05.24 10:36

무한도전의 새로운 리더를 뽑는 투표가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살림터 1층 시민쉼터와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에서 진행됐다. 이날 후보로 나선 노홍철씨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찾아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무한도전 투표 현장

▶ 최근 이상한 선거가 있었습니다. 토론회에선 사회자가 “그런 이유로 선거까지 해야 합니까”라며 웃음을 터뜨렸고, 한 후보자는 “유재석, 박명수씨의 사생활을 가감없이 공개하겠다”는 희한한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지방에서 굳이 올라와 투표하고, 직장인과 학생들도 새벽에 투표장을 찾습니다. 땡볕 아래서도 아랑곳 않고 길게 줄서서 투표합니다. 무수한 화제를 낳았던 무한도전 투표 현장을 찾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생인 박한솔, 이처럼(14)양은 22일 오전 5시 지하철 분당선 죽전역에서 첫차를 탔다. 이들이 1시간여 지하철을 타고서 도착한 곳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있는 무한도전 투표소였다. 불과 5분여 만에 투표를 마친 이들은 다시 서둘러 용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 끝나면 학원에 가야 해서 새벽에 투표하러 왔어요. ‘무한도전’ 원래 팬이기도 하고, 직접 투표를 하는 게 신선하고 재밌을 것 같아서요.”

이날 오전 6시10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광장에서 만난 처럼이는 “이 새벽에 투표하러 용인에서 왔냐”며 놀라는 기자에게 웃으며 답했다. “온라인으로 투표해도 되지만, 직접 하는 맛이 있잖아요.”

한솔이는 투표를 마친 뒤에도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투표하기 직전까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막판에 누구를 찍겠다고 결정했는데요. 막상 투표하고 나니까 내 결정이 맞았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가 않아요.”

한솔이에게 물었다. “누구를 뽑았는데요?”. “말할 수 없어요. 비밀투표잖아요”.

이날 6시30분께 투표장을 찾은 유재일(31)씨는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모두 서울시 강동구다. 투표를 하러 이른 아침에 일부러 동대문 쪽으로 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아내와 태어난 지 6개월 된 자녀와 함께다.

“새벽에 자는 애 깨워서 데리고 나왔어요. 덕분에 이 아이도 투표했죠. 이번 투표가 재밌기도 한데, 참 뜻깊어요. 선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고, 무엇보다 선거에 이렇게 즐겁게 참여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처음 느꼈어요.”

오전 7시께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온 이은재(23), 소현지(21)씨는 타이에서 한국으로 입국하자마자 투표장을 찾았다. 이씨는 “여행 가기 전에 ‘무한도전’을 봤고, 어젯밤에 비행기를 타서 새벽에 한국 도착했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온 추아칭만(18)씨는 친구 3명과 한국 여행을 온 김에 투표했다. 추아씨는 “한국 예능프로인 ‘무한도전’과 ‘러닝맨’을 재밌게 보고 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 들러서 투표했다”고 말했다.

무한도전 차세대 리더 뽑는 선거
당선돼도 권한 보잘것없지만
각 후보들 공약 내세워 경쟁 치열
새 선거제도 알리고 투표 독려
밀실협상·여론조작 등 풍자도 화제

등교 전에 기차 타고 온 여중생
조퇴하고 투표하러 온 중년 여성
한살 아기와 첫 외출 나온 엄마
“어느새 선거는 축제가 됐다”

“취재하러 나왔다”는 말에도 폭소

투표장의 모습은 실제 선거를 방불케 했다. 일단 투표장 밖에는 ‘후보자 사퇴 안내’를 알리는 공고문이 붙어 있다. ‘무한도전 선거관리위원회’의 직인이 찍힌 이 공고문엔 ‘정준하, 하하, 박명수 후보가 사퇴했고, 이 후보자들에게 투표하면 무효가 되오니 유의하기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실제 선거와 마찬가지로 ‘투표소 안에서는 선거법에 의거 사진 및 동영상 촬영이 금지됩니다’는 벽보가 붙어 있다. 투표하러 온 사람들은 “진짜 투표랑 똑같다”며 수군거리며 즐거워했다. 투표장 앞의 후보자 공고문을 보고서 마지막까지 공약들을 비교하며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투표 과정도 실제와 비슷하다. 투표소에 입장하면 선거인명부에 등록하고 중복 투표를 방지하기 위해 지문을 인증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직접 파견나와 지문 인증을 진행했다. 이들은 “오늘 투표는 신분증이 필요없지만, 실제 투표에선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고 알렸다. 투표권은 연령, 국적에 관계없이 1인 1표다. 온라인 투표도 가능하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중복 투표를 할 수 있지만, 제작진은 이를 유권자의 양심에 맡기기로 했다.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칸막이 투표소에 들어가 기표를 한 뒤에 투표함에 넣는 과정도 실제와 똑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투표장을 나서면 한 스태프가 다가와 묻는다. “출구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웃자고 만든 선거가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에 즐거워한다. 심지어 기자가 “신문사에서 취재 나왔습니다. 투표한 소감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도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이날 무한도전의 선거 ‘선택 2014’는 여러 화제를 낳았다.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MBC) 본사에 만들어진 투표소에서 처음 투표한 임재범(33)씨는 전날부터 투표소 앞에서 밤을 꼴딱 새웠다. 임씨는 투표를 하고 응한 인터뷰에서 “유재석씨의 팬이지만, 노홍철씨를 지지한다. 독재를 막고 싶어서다”며 뼈(?)있는 소감을 밝혔다. 투표 마감 시간인 오후 6시를 앞둔 두시간 전부터 문화방송 사옥 앞엔 줄이 100m 넘게 이어졌다. 제일 뒤에 줄을 선 사람이 15~20분 만에 투표를 하는데도, 100여m에 이르는 줄의 길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 뜨거운 투표 열기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한도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월호 참사 이후 예능 프로그램들의 결방이 이어졌다. 각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짧게는 2주, 길게는 5주간 결방했다. 한국방송(KBS)의 대표 오락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는 아직도 결방 중이다. 문화방송의 ‘무한도전’은 세월호 사고 17일째인 5월3일 방송을 재개했다. 다른 프로그램들에 비해 상당히 빠른 방송 재개였다. 처음 분위기는 안 좋았다. 4월20일 무한도전의 멤버인 가수 길이 음주운전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세월호 참사로 전사회적으로 비통한 분위기인데다 무한도전에서 사고 직전에 한 방송이 안전운전을 강조한 ‘레이싱 특집’이었던 터라 길의 음주운전이 준 충격은 더 컸다. 무한도전은 방송을 재개하면서 구성원 전원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고, 길이 방송에서 하차했고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게 재개한 방송에서 무한도전이 선택한 카드는 ‘선거’였다. 10년차를 맞은 무한도전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고정된 채로 지속되고, 동시간대 시청률 순위에서도 밀리는 등 점점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단 진단이 잇따르자 구성원 각자가 위기를 타개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거를 택했다.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향후 10년간 무한도전의 분위기를 주도할 리더’가 되기로 했지만, 실제 당선된 후보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이템 선정과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뿐이다. 후보자 토론회를 진행한 시사평론가 정관용씨도 “굳이 그런 권한을 위해 선거까지 해야 하느냐”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6월4일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도 주효했다. 사실 이 아이템 선정에는 지방선거 투표를 독려하려는 제작진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고 문화방송 관계자는 귀띔했다.

무한도전 선거는 간단치 않은 현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투표를 위해 반차를 내는 직장인도 있고, 갓난아기를 안고 첫 외출한 엄마도 있다. 많은 이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기꺼이 긴 줄을 서가며 투표하는 걸 즐거워하는 것도 기현상이다.

현실 정치보다 더 진짜 같은 패러디

무한도전의 향후 10년을 이끌 리더를 뽑는 선거인 ‘선택 2014’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 ‘재미’다. 하지만 그냥 재미가 아니다.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미에 결합된 여러 요소들에 열광한다. 이날 오전 7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건우(29)씨가 투표하러 온 이유를 설명했다.

“일단 재밌잖아요. 시청률 하락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방식도 참신하고요. 지방선거를 앞두고 투표권 행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이기도 했어요.”

이성호씨는 세월호 참사를 낳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속시원하게 말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 이권과 잇속을 챙기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제대로 풍자했다고 생각해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어린이보호구역을 통해 원칙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도 좋았고요. 단일화 협상을 앞두고 후보들이 합종연횡하는 모습은 현실보다 더 실감났어요.”

무한도전은 지난 5월10일 방영분을 통해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제한속도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상기시켰다. 선거 후보로 등록한 후보자들이 운전하며 어린이보호구역을 지날 때, 제한속도를 지키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대다수의 후보들은 어린이보호구역을 지나쳤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고, 제한속도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모습은 평소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일상화·관행화된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후보들은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끼고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선거철이 되면 친서민적인 복장을 한다든지, 이면거래를 제안하며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는 등의 모습은 현 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박명수씨가 유재석씨를 가리키며 “나는 당신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는 발언은 지난 대선을 연상케 했고, 자존심이 상했다며 지지를 철회하는 모습은 2002년 대선을 떠올리게 했다. 그럴듯한 겉포장과 달리 잇속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가는 철새 정치인이나 도청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행태, 여론 조성을 위해 동원되는 트위터 알바단은 현실 정치 어디선가 본 모습들이다. 최근 화제가 되는 정치 풍자도 자막으로 등장했다. 자신의 모습을 마치 남의 얘기처럼 하는 ‘유체이탈 화법’이나 ‘포지티브하게 눈물즙 배출’ 등이다.

MBC무한도전 새MC선발 투표 장소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투표장 풍경.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날 오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는 노홍철, 유재석, 정형돈 후보가 1시간을 간격으로 투표장을 찾았다. 투표장에 나타난 이들은 팬들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이 아니라, 유권자에게 다가가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였다. 노홍철 후보는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투표날 선거 운동은 선거법에 저촉된다”며 능수능란하게 답변을 피했고, 자신의 인사를 피해 지나가는 시민을 보면서 “누구를 찍었는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하며 허리를 숙였다. 유재석 후보는 “선정적인 공약보단 기본에 충실하겠다”고 강조했고,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꼭 투표하겠다. 여러분도 꼭 투표하시라”며 투표를 독려했다. 정형돈 후보는 “평범한 사람이 변화의 주역이 되겠다”며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박원순 시장도 사전투표 참여

무한도전은 새로 도입한 선거제도를 알리는 구실도 톡톡히 했다. 중앙선관위는 이번 6·4 지방선거에서부터 선거일 4, 5일 전에 투표할 수 있는 ‘사전투표제’를 도입했다. 선거 당일에 사정이 있어 투표를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다. 과거엔 미리 ‘부재자 신고’를 해야만 사전에 투표할 수 있었지만, 이번부터 별도 신고 없이 가능하다. 투표시간은 본투표와 마찬가지로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무한도전 역시 본투표일인 22일에 앞서 17일, 18일 양일간 전국 10개 도시에서 사전투표를 실시했다. 이 사전투표에 참여한 사람만 8만3000명이 넘는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 사전투표에 참가했다. 본투표날엔 온라인 투표만 30만명이 넘었고, 오프라인 투표 인원은 본방송에서 밝혀질 예정이다. 전체 투표 인원이 50만명은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일 오후 5시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딸 임민경(20)씨의 손을 잡고 줄을 선 김춘희(48)씨는 “이번에 처음 도입한 사전투표가 어떤 방식인지 궁금했는데, 업무시간과 겹쳐서 못 갔다. 대신 딸이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오늘 투표를 위해서도 일부러 회사에서 조퇴하고 왔다”고 말했다.

무한도전 선거는 내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여의도에 있는 직장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차아무개(31)씨는 “일하는 도중에 잠시 나와서 투표했다. 일상의 소소하지만 재밌는 이벤트였다”고 말했고, 방과 후에 교복을 입고 온 왕중현(19), 노정수(18)씨는 “추억 삼아 왔다”고 전했다. 생후 5개월 된 아기를 안고 온 김미정(30)씨는 “출산하고서 아기와 함께한 첫 외출이다. 투표를 하니까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진다. 10년 뒤에도 무한도전이 유지되면 그때 아이에게 네가 투표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해줄 거다”라고 전했다. 전라도 광주에서 투표하러 올라온 김병수(51)씨는 “무한도전은 평소 매주 챙겨보는 프로다. 우리의 선택이 앞으로의 10년을 결정한다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소감을 밝혔고, 대학생 함원식(23)씨를 따라온 여자친구는 “남자친구가 무한도전을 너무 좋아해 따라왔다. 너무 진지하게 투표해 저에게도 누구 찍었는지 얘길 안 한다”고 귀여운 불만을 토로했다. 오후 6시가 되자 무한도전 선거관리위원회는 길게 늘어선 줄의 끝으로 걸어가 “선거 시간이 종료됐습니다”라고 알렸다. 이미 줄 선 사람은 투표할 수 있지만, 새로 줄을 설 수 없다는 세부 규정도 실제 선거와 똑같았다. 2분여 뒤 한 중년 남성이 길게 늘어선 줄로 다가와 물었다.

“이제 줄 못 서요?” 직원이 답했다. “예. 좀 전에 끝났어요.”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 선거가 앞으로의 무한도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또 이번 지방선거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까. 언제나 그렇듯 무한도전의 행보는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남겼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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