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금속 상가가 모여 있는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의 전당포 영진사를 찾은 한 손님이 창구를 통해 금목걸이를 맡기고 대출을 받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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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 전당포를 찾아
▶ 가계대출액이 사상 초유인 1000조원을 넘어가고, 한 대출업자의 유에스비(휴대용 저장장치)엔 전국민의 개인정보가 다 들어 있는 ‘빚 권하는 시대’에 가장 오래된 고리대금업 중의 하나인 ‘전당포’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주요 상권에 있는 전당포들을 찾아 수십년간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전집과 족발집이 즐비한 서울시 마포구 공덕시장의 한 허름한 건물에는 ‘2층 전당포’란 낡은 간판이 걸려 있다. 지난 3일 오후 4시께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 나무로 된 전당포의 문을 열어젖혔다. 구치소의 면회실처럼 쇠창살이 달린 투명한 창을 사이에 두고 전당포의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았다. 돈을 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취재를 하러 왔다고 밝히자 주인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하도 장사가 안돼서 곧 그만둘 거야. 그만 가봐.”
이튿날 서울의 주요 상권인 중구의 명동을 찾았다. 추운 날씨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건물 3층의 좁은 전당포에는 쓸쓸한 한기만 가득 차 있었다. 나아무개(55) 로얄사 전당포 주인은 1984년부터 30년간 이 자리를 지켜왔다.
“20년 전만 해도 명동에 전당포가 10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단 두 곳만 남았습니다. 카드사나 대부금융업체 등에서 돈을 쉽게 빌릴 수 있어서 그런지, 장사가 잘 안돼요.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엔 전당포가 무얼 하는 곳인지 잘 모르기도 해요. 가게 임대료를 건지기도 힘들어 언제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죠.”
1365년 공민왕 때 설치한 전당포
서민들이 시계, 금붙이 등을 맡기고서 급하게 돈을 빌려 사용하던 전당포가 사라지고 있다. 사실 전당포가 줄어드는 추세는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금융감독원과 한국대부금융협회의 자료를 보면, 현재 전국에 영업중인 전당포는 1150여개다. 1987년 2312개를 육박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 이상 줄었다. 1990년 12월23일 <매일경제>는 ‘서민 젖줄 전당포가 사라진다’는 기사에서 “제2차 석유위기로 80년대 초 최대 호황을 기록한 전당포가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가계수표, 신용카드 등 신종 금융상품이 등장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나마 새로 생기는 전당포는 스마트폰이나 명품 등을 맡기고서 돈을 빌려주는 신종 점포인 ‘아이티전당포’와 ‘명품전당포’다. 한국대부금융협회 쪽은 “300여개는 새로 생긴 아이티전당포와 명품전당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전당포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유래를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는 1365년 고려 공민왕 때 왕실에서 직접 전당포를 설치한 기록이 있다. 공민왕은 왕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후의 명복을 비는 대규모 불사를 수시로 열었다. 이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보원고(寶源庫)를 설치했고, 전당업을 전문으로 하는 해전고(解典庫)를 부속기관으로 두었다. 근대적 전당업이 시작된 시기는 조선 후기다. 이 시기부터 토지 사유화가 시작되고, 금속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됐기 때문이다. 초기 전당포에선 토지문서, 집문서, 비녀와 가락지, 의복과 솥 등 사용가치가 있는 모든 물건이 담보물이 됐다. 전당포업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개항이 이뤄지자 급격히 발전했다. 일본 자본은 국내에 질옥(質屋)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질옥은 개항과 더불어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사용한 명칭으로 전당포와 같은 의미를 지녔다. 일본인들이 경영한 질옥에선 귀금속 등과 함께 토지문서를 주요한 품목으로 취급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상업자본이 조선의 토지를 쉽게 취득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전당포는 일제가 만든 법령인 ‘질옥취체에 관한 제령’의 적용을 받았고, 대한민국 국회가 만든 ‘전당포영업법’의 적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1961년이다. 이 법은 1999년에 폐지됐고, 현재 전당포는 대부업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2~3월엔 자식 등록금 대고
11~12월엔 김장 재료 사러
서민들이 급히 찾던 전당포
1987년 2312개 달했지만
현재는 1150여개로 반토막
텔레비전 흔해지자 전자제품이
금모으기 운동 뒤론 귀금속이
전당포를 더 이상 찾지 않지만
고가의 가방·스마트폰 다루는
명품·아이티 전당포는 인기
이자는 법 규제 따라 월 3~3.2% 1973년부터 명동에서 한양사를 운영해온 오성해씨는 전당포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세태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엔 술 마시려고 시계 풀어 가고서도 대부분 찾아갔는데, 요즘엔 잘 안 찾아가요. 왜 안 찾아가느냐고 연락을 해도 ‘아직도 안 팔았어요?’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아요. 참 허망하죠. 사연이 있는 패물인 줄 알고 어떻게든 찾아주려고 했더니.” 귀금속 상가가 몰려 있는 서울 종로3가에서 주공전당포를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손님의 결혼반지를 2년 넘게 보관한 적이 있다. “10여년 전에 한 30대 아저씨가 하도 간청해서 결혼반지를 2년 넘게 보관한 적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돈을 안 가져오고서 ‘귀한 물건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해 어쩔 수 없이 처분하지 않고 보관했고, 결국 2년이 지난 뒤 돈을 가져와서 반지를 찾아갔어요. 요즘엔 그렇게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경우가 드물어요. 맡기는 물건 중에 30% 정도는 찾아가지 않죠.” 지금과는 달리 전당포가 호황이던 시절도 있었다. 주로 서민들의 대출창구였던 전당포는 대학 등록 시기, 김장철, 명절 등에 붐볐다. 40년 넘게 전당포를 운영해온 한양사의 오씨가 말했다. “70~80년대엔 손님들이 많았고, 90년대까지만 해도 장사가 괜찮았어요. 그때 손님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예요. 주부들이 패물 등을 가져와 자녀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김장철에도 주부들이 많이 왔어요. 그땐 김장이 한 해 중에 중요한 행사였고, 그 시기에 맞춰 김장 재료를 마련해야 했으니까요.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돈 구하러 오는 분들도 꽤 있었죠.” 전당포에 맡기는 주된 품목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해방 이후엔 양복, 구두 등 입는 것부터 재봉틀, 라디오 등 살림살이 전품목을 망라했다면 70~80년대엔 전자제품이 인기 품목이었다. 종로3가에서 전당포 영진사를 15년째 운영해온 노영지(72)씨는 오래된 전당포를 인수한 탓에 수십년간 손님들한테서 받은 장부를 가지고 있었다. “한땐 대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전자계산기만 전당포에 100개가 넘게 있었습니다. 흑백티브이도 10대가 넘게 있었고요. 품목도 시대별로 변해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워크맨’(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이 100대 넘게 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전당포 영진사 안엔 오래된 전자제품들이 골동품처럼 전시돼 있다. 노씨는 소니의 한 비디오카메라를 가리키며 “이 물건이 국내에 최초로 들어온 비디오카메라”라고 소개했다. 요즘 전당포에서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귀금속이다. 노씨는 “전자제품이 흔해지고 가치가 쉽게 변해 담보물로 받지 않는다”고 전했다. 품목이 귀금속으로 제한되는 상황도 전당포가 줄어드는 한 원인이다. “90년대 후반 금융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이 있었잖아요. 그때 집집마다 장롱 안에 있던 금붙이들이 외화 마련을 위해 해외로 팔려나갔고, 사실 그때부터 전당포 영업도 급격히 기울었어요. 가정에선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릴 금붙이들을 미리 써버린 셈이죠. 예물로 순금을 사용하는 이유가,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요긴하게 사용하란 의미도 있었어요. 요즘엔 예물도 많이 간소화됐고, 금값이 올라 돌반지를 선물하는 문화도 많이 없어졌죠.”
전당포 ‘영진사’로 들어가는 입구. 돈 빌리는 사람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전당포는 대개 외지고 으슥한 골목에 자리잡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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