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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3 19:57 수정 : 2014.01.05 16:26

권영국 변호사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을 한 뒤 김명환 철도노조 위원장(오른쪽)과 악수를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르포 / 인권변호사 권영국

▶ 영화 <변호인>의 흥행으로 ‘인권 변호사’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속 시원하게 외치던 송우석 변호사 같은 사람은 80년대의 이야기일 뿐일까요.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뛰는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권영국 변호사를 만나 우리 시대 인권변호사들의 일상을 살펴보았습니다.

12월31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건물 13층 대회의장이 기자들로 붐볐다. ‘케이티엑스(KTX) 민영화 저지와 철도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각계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곳은 아흐레 전 경찰이 난입해 철도노조 지도부를 수색하며 아수라장이 되었던 장소다. 철도노조는 30일 아침 파업 중단을 결정하고 업무에 복귀했지만 정부는 ‘파업참여자 징계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범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권영국(51·사법연수원 31기) 변호사가 단상 앞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마이크를 잡았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명분이 있는 파업이었는데도 철도노조는 국회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 구성에 합의하고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합의 정신을 무시하고 강공 일변도의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범대위가 정부에 경고합니다. 철도노조와 대화하지 않으면 더 큰 국민적 저항에 부닥칠 겁니다.”

권 변호사는 법률가이기 이전에 우리 사회의 상식을 지키는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케이티엑스 수서발 자회사 설립을 강하게 반대한다.

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노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이라면 늘 발 벗고 나선다. 용산참사 철거민, 기무사 민간인 사찰 피해자,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이마트 파견 노동자 등이 최근 법정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다.

공부 싫은 사람이나 데모한다고 생각했다

돈 없는 이들이 법적 도움을 호소하면 무료 변론을 마다하지 않는다. 가끔 서울 서초동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운영 비용마저 모자라는 사태가 벌어지지만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헌법 12조에는 국민 누구나 평등하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그 억울함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돈은 있는 사람에게 벌면 됩니다.”

2일 오전 서초동 사무실에서 다시 만난 권 변호사는 새해 벽두부터 분주했다. 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2009년 쌍용자동차 회계 장부’ 내용에 대한 심리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 확인 소송을 항소심부터 맡고 있다. 2009년 8월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 150여명이 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날 오후 권 변호사는 민변 사무실을 찾았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그를 민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일 법정 심리를 위한 전략 회의를 위해서였다. 권 변호사가 두꺼운 서류봉투를 품에서 ‘턱’ 내려놓자 곧 회의가 시작됐다.

“내일 우리가 펴야 할 논리를 만들어 볼까요. 이 자료를 꼼꼼하게 봐주세요.” 노동자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잠시 권 변호사가 문서를 복사하러 사무실을 비우자, 한상균(53)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노조원들 가운데는 투쟁을 열심히 이끄는 선봉대가 있어요. 권 변호사는 선봉대보다도 더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요. 어떤 때 보면 밤을 새워서 일하기도 하시고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시답니다.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분입니다. 존경스럽지요.”

이날 회의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됐다. 권 변호사는 ‘내일’의 심리를 위해 퇴근을 포기했다. 이날은 밤늦게 사무실 소파에서 눈을 붙였다. 머리가 희끗한 오십줄의 권 변호사에게는 아직도 이런 일이 잦다.

권영국 변호사는 원래 체제 순응적인 사람이었다. 강원도의 가난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살아온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늘 배고픔이 앞선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곤 했다. 그에게 공부는 가난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고등학교(포철공고) 2학년 때 선배들이 교복자율화 투쟁을 벌였어요. 저는 공부하기 싫은 선배들이 자기 과시 하고 싶어서 하는 시위로 보고 동참하지 않았어요.”

81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알던 세계와 현실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해 4월로 기억해요.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빠바방’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최루탄이 터진 거죠. 그때 어떤 선배가 청재킷을 입은 경찰에게 뒷덜미를 들려 끌려가는 것을 보았어요.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선배는 끌려가면서도 ‘살인마 전두환 물러나라’ 하고 외쳤어요. 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몇십분을 얼어붙어 서 있었어요. ‘데모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는데, 경찰에 맞아가면서도 ‘전두환 물러나라’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렇게 볼 수 없었어요.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열심히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불의에 저항할 줄 모르던 소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6개월 뒤 가톨릭청년회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경찰에 맞는 게 두려워, 주도적이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시위에도 참여했다.

‘변호인’ 송우석 변호사처럼
약자 위해 법정에서 싸우는 권변
철도·이마트·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곁에는 그가 있었다

“풍산에서 노동조합 만들 때
함께 일한 동료들과 약속했죠
당신들이 밀어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용산참사 재판부에 항의하며 사퇴

서울대를 졸업한 뒤인 1985년 그는 방위산업체인 ‘풍산’에 연구직으로 입사했다. 동생 두명의 학비를 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노조 설립운동을 벌이다 몇년 안 돼 해고되고 말았다.

“1988년 7월 풍산 안강공장(경주시 인근)에서 폭약이 터지는 사고가 나 노동자 한명이 죽었어요. 회사가 유가족에게 제대로 보상을 하려 하지 않았어요. 안강읍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유인물을 몰래 붙이고 다녔어요. 그러다 발각되는 바람에 ‘회사 명예훼손, 군사 기밀 누설’ 등의 이유로 해고됐어요.”

오랜 기간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96년 한 선배의 권유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권 변호사의 아내는 ‘내가 직장을 다닐 테니 딱 3년만 준비해보라’고 격려해주었다. 3년 뒤인 1999년 사법시험에 기적처럼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자마자 권영국 변호사는 노동·인권 전문 변호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002년 한 법률사무소에 면접을 보러 가던 길에 고향 후배인 권두섭 변호사가 권 변호사에게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을 제안했다. 권 변호사는 초대 민주노총 법률원장이 되었다.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송우석 변호사는 정의롭지 않은 재판부와 큰소리를 내며 싸운다. 1980년대의 노동·인권 변호사 송우석은 2000년대의 권영국 변호사와 많이 닮았다. 권 변호사는 2009년 9월 ‘용산참사 재판부’에 맞서 싸웠다.

“검찰이 재판부가 공개하라고 명령한 수사기록 3000쪽을 변호인단한테 공개하지 않았어요. 용산 남일당 건물에 투입됐던 경찰 특공대의 진술 내용이 대부분이었어요. 진압 과정에서의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는 내용일 가능성이 컸어요. 그런데 재판부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지 않는 검찰에 아무런 조처를 안 하는 겁니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공개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하는 요청도 재판부가 거절하고, 피고인들의 불구속 재판 요청도 거절했어요. 판사(한양석 재판장)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변호인단이 총사퇴했습니다.”

송우석 변호사는 차동영 경감(영화 속 고문 경찰)을 증인으로 내세우려 하지만 검사의 제지를 받는다. 송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소리 지르며 검사와 싸운다. 권영국 변호사도 그렇게 검사와 싸운 기억이 있다.

“2009년 평택역에서 국군 기무사령부 신아무개 대위가 민간인을 사찰하다가 걸렸어요. 시민들이 달려들어 신 대위의 캠코더 메모리칩과 레코드 테이프, 수첩, 신분증을 압수했어요.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니 신 대위가 민간인을 사찰한 것이 명백해졌어요. 그런데 기무사는 오히려 신 대위의 물품을 빼앗은 시민을 상대로 강도 상해와 특수공무방해치상 죄로 고소를 했습니다. 검찰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이 고소를 그대로 받아들여 시민(안아무개씨)을 기소했어요. 원래 변호인은 차분하게 다퉈야 하는데 검사(손진욱)에게 흥분해서 항의했어요. 검사가 고소인의 고소 내용을 조금만 수사했어도 이런 황당한 기소는 없었을 텐데 검사가 직무유기를 하고 기무사의 대변인 노릇만 한 것입니다. 너무나 분개해서 판사가 제지할 때까지 항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2010년 11월18일 서울고등법원은 안씨의 강도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

권 변호사가 변호인으로서의 차분함을 잃을 때는 ‘절차적 정의’가 무너졌다고 느낄 때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법을 준수하지 않거나, 재판부가 양쪽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을 때 그는 화가 난다. 헌법 제1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적용되지 않던 사회에서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외치던 송우석 변호사의 심정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경찰은 2009년 5월1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던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관련자 7명을 연행했다. 그중에는 권영국 변호사도 있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인권변호사’란 ‘역전 앞’같은 동어반복

권 변호사가 법원만 왔다갔다하지 않고 분쟁의 현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25년 전 풍산의 동료들과 했던 약속과 맞닿아 있다. “풍산에서 노동조합 설립운동을 할 때 동료들이 회의할 때 저를 어떻게 믿느냐고 물었어요. ‘당신은 학출(대학 출신)이니까 어디든 좋은 데 찾아갈 수 있지 않냐. 고졸인 우리가 당신만 믿고 노조 설립운동 하다 잘리면 어떡하냐.’ 저는 ‘당신들이 나를 밀어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가끔 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에 도로교통법 위반 등으로 연행되는 수모도 겪지만 그는 굴하지 않는다. 가끔 무리한 연행을 한 경찰이 직권 남용으로 기소를 당하곤 한다.

권 변호사에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있다. 87년 7월말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울산을 방문했다.

“한 성당에서 노 변호사가 강연을 했는데 ‘노동자들이 악법을 어겨서 깨야 한다’고 말했어요. 법을 다루는 변호사로서 저런 얘기를 하다니 참 진취적인 분이라고 느꼈어요. 저 역시 악법은 고쳐져야 할 것이지 그것에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제대로 된 법치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이 강연은 권 변호사에게 지금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권 변호사는 ‘기존 판례에 매몰되지 말자’는 신념을 갖고 있다.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 ‘무엇이 정의에 부합하는지’가 판단의 우선 기준이지 ‘판례가 절대적 진리는 아니다’는 신념이다.

권 변호사의 서초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의 책상에 놓여 있던 강의록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권 변호사는 새내기 법조인들을 위한 특강에 초청받곤 한다. 강의록에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법은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시민 투쟁을 통해 얻어낸 역사적 산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온 질서.’

권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법을 남용해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를 늘 경계한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대표적인 악법이라고 권 변호사는 설명했다.

3일 오후 2시 권 변호사는 서울고등법원 서관 305호에 출석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위한 변론을 시작했다. 2009년 쌍용차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설명하며 회사의 열악한 재정상태를 담은 회계보고서를 공개했다. 권 변호사는 그 보고서가 회사의 부채 비율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일반인에게 회사의 부채 비율이 나쁘게 보일 수밖에 없도록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 안 하십니까?”

“여기를 보십시오. 원심에서 쌍용차가 제출한 손상차손조서와 항소심에서 제출한 손상차손조서의 숫자에 차이가 있어요. 감정 의뢰를 받은 증인(최종학 서울대 회계학 교수)은 이 부분을 확인하셨나요? 전문가로서 당연히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권 변호사의 문제제기가 재판 내내 끊이지 않았다. 변론을 마치고 오후 늦게 법정 밖으로 걸어나오는 권 변호사에게 왜 인권 변호사로서의 삶을 자청하는지 물었다. 그는 변호사법 1조를 거론했다.

“인권 변호사라는 말은 ‘역전 앞’이라는 단어처럼 동어반복되는 이상한 단어예요. 변호사법 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돼 있어요. 법적으로 변호사는 인권 옹호가 제일의 가치인데, 인권이란 말을 앞에 한번 더 붙일 이유가 없지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변론하기 위해 권영국 변호사는 내일도 다시 잰걸음을 걸을 것이다. 그의 발길 옆으로 하루를 다 보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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