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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토포그라피’에 남아 있는 1933~1945년 사이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 나치 친위대 슈츠슈타펠(SS), 제국 중앙보안국 일부 건물에 대해 17일 안드레아스 잔더 연구원(오른쪽)이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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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르포]
▶ 히틀러, 나치, 2차 세계대전, 냉전, 분단, 통일…. 역사의 지층이 켜켜이 쌓인 독일 베를린에선 나치와 동독 독재 청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국가폭력 과거사 청산’이라는 주제로 독일 외무부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5·18 민중항쟁 피해자 트라우마를 밝혀낸 오수성 심리건강연구소 소장 등과 함께 16~21일 베를린에 다녀왔습니다.
나치 게슈타포 본부 터 보존한
테러의 토포그라피
강제노동자 보상 맡은
기억·미래·책임 재단 설립
동독 비밀경찰 문서의 공개
나치·동독 청산은 계속됐다
가해자 역사 반성한 모습에서
우리는 일본을 떠올리지만
전쟁 학살·군부 독재 등
한국 과거사 청산과도 비교돼
통일 뒤 올 ‘미래 과거사’도
독일 보며 고민을 시작해야
올해는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50주년이다. 1963년 그는 동·서독을 가르는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세계’의 최종 전선인 베를린을 지지하며 ‘나는 베를린인이다’라고 선언했다. 그 뒤로 50년이 지나는 동안 독일은 통일이 됐고, 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도 있다. 우리와 비교하면 독일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 듯하다.
독일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건 통일만이 아니다. “나치 범죄에 영원한 책임이 있다”는 지난 1월 메르켈 총리의 말처럼, 나치 과거사 청산도 현재 진행형이다.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흔히 일본과 비교되지만, 가해자·피해자로서의 과거사가 뒤섞여 있는 한국에 시사하는 점이 사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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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작성한 문서는 모두 ‘옛 동독 국가보안국 문서중앙관리청(BStU)’에 보관돼 있다. 문서중앙관리청은 당사자와 정부 요청이 있을 때 관련 자료를 공개한다. 문서중앙관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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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이후 아버지세대에 문제를 제기하다
“연간 90만명이 옵니다. 60%가 성인이고, 40%가 학생이죠.” 보통의 베를린 날씨와 달리 햇살이 쨍하게 비치던 17일 오전, 안드레아스 잔더 연구원의 말처럼 ‘테러의 토포그라피’ 안으로 학생들이 계속 들어왔다. ‘테러의 지형학’으로 번역되는 이곳은 1933~1945년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 나치 친위대 슈츠슈타펠(SS), 제국중앙보안국 본부 터다. 나치 테러의 사령부라 할 이들 조직은 유대인과 집시 학살, 정치범 탄압 등 나치 범죄를 기획하고 결정했다.
“1984년 이곳에 왔을 땐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었는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을 지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가 지하만 일부 남은 건물터를 둘러보며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한국전쟁 학살과 독재정권 인권침해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설립됐다. 2010년 12월 종료될 때까지 1만1174건의 사건을 접수해 8468건의 진실을 밝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뉴라이트 성향의 위원들이 임명됐고, 배상·보상 등 진실규명 후속조처 없이 조용히 끝났다. 아직도 “당시 신청을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피해자들의 전화를 받는다는 안 교수에게 지금도 계속되는 독일 과거사 청산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테러의 토포그라피의 역사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던 독일 과거사 청산과 궤를 같이한다. 이 건물들은 전후에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철거됐다. 땅속에 묻힌 이곳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베를린시 건립 750돌인 1987년에 ‘가해자로서의 역사’도 베를린 역사의 일부라며 이 공간에서 전시가 시작됐다. 지금과 같은 자료관 형태로 개관된 건 2010년 5월6일이었다. 과거 청산의 모범국에서도 반세기가 넘게 걸린 일이었다.
독일은 처음부터 과거사 청산의 모범생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은 미국 등 연합국의 주도로 과거사 청산이 시작됐다.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1945년 11월~1946년 10월)은 ‘주요 전범’으로 기소된 24명 중 1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46년에는 ‘나치청산법’이 공포돼 95만명이 신상 조사를 받았다. 사면과 복권이 남발되고 처벌을 피한 사람도 많았지만, 제도적·인적 청산은 ‘나치 재발은 안 된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다만 외부 압력에 의한 청산은 독일인의 불만을 낳았다. 사람들은 과거를 외면하거나 부정했다. 미 군정청 조사에서 탈나치화에 대한 찬성은 1946년 응답자의 57%에서 1949년 17%로 줄어들었다.
침묵은 1960년대 이후 전후세대가 성장하면서 깨졌다. “1968년 유럽을 휩쓴 학생운동 열풍 이후 우리는 부모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때 뭘 했느냐, 왜 나치에 반대하지 않았느냐’고요.” 잔더 연구원의 말처럼 민주주의 교육과 인권의식의 영향을 받은 아들세대는 아버지세대의 삶에 문제를 제기했다. 의식의 전환과 1961년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드러나는 유대인 대학살의 실태, 동방정책과 동독·소련 화해 분위기 등이 어우러져 진정한 반성이 시작됐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다.
물론 그 뒤로도 완벽하진 못했다. 나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1953년부터 2000년 사이 850억유로가 지급됐지만 80%가 미국·이스라엘 등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 서독은 800만명의 강제노동자 보상은 “전후 배상으로 일괄 타결됐다”며 외면했다. 2000년에야 독일 기업들이 기금을 마련해 만든 ‘기억·책임·미래 재단’이 설립돼 이들에 대한 보상을 시작했다. 재단은 2007년까지 166만명의 강제노동자에게 440억유로를 지급했다. 강제동원 피해보상을 지금도 거부하는 일본에 비하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가 서양을 이겼다’며 군국주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식민지배와 전쟁 비판을 영광스러운 과거의 훼손으로 여깁니다. 반면 독일은 나치뿐 아니라 방관하고 묵인했던 자신들의 책임도 비판하면서, 악몽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했죠. 게다가 일본과 달리 나치 문제에 책임을 지라는 국제사회의 압력도 받았고요.” 안병욱 교수가 말했다.
비밀경찰, 반대파 탄압, 정보국…. 테러의 토포그라피를 보고 있자니 남산이 생각났다. 1972년부터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본관, 중정부장 집무실, 지하 취조실이 있었던 남산.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씨 등 8명이 고문을 받고, 수많은 간첩사건이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 일본의 흔적도 있다. 1910년 이완용 내각총리대신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감이 한일합병조약을 맺었던 조선통감 관저도 남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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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2일 위르겐 푹스가 자신의 자료를 보고 있는 모습이다. 문서중앙관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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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지 자료 파기 막은 건 민주화운동가들
데자뷔(기시감)는 20일 찾은 ‘옛 동독 국가보안국 문서중앙관리청’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보관하고 있던 모든 문서는 1991년 ‘국가안전부 문서처리법’에 따라 모두 공개됐다. 9만5000명의 공식 요원과 18만명의 비공식 요원들로 구성된 슈타지는 40년간 이웃, 친구, 가족 등을 통해 동독 주민을 감시해왔다. 통일을 앞두고 동독 정부는 슈타지 문서를 파기하려 했다. 동독 민주화운동가들은 슈타지 건물을 점거했고,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구성된 1990년 동독 인민의회는 문서처리법안을 가결했다.
1992년 출범한 문서중앙관리청에는 111㎞에 이르는 문서가 보관돼 있고, 당사자 공개 원칙에 따라 2012년 중반까지 290만명의 신청이 접수됐다. 공개된 내용은 재심과 배상 및 보상, 공무원·국회의원·법관 등의 슈타지 관련성 확인 자료로 사용됐다. “과거를 묻어둘 수도 있고, 공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 없는 화해가 가능할까요?” 요아힘 푀르스터 문서사용부장은 물었다.
“국정원 과거사 조사 때 보니 중앙정보부부터 안전기획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공작 기획문서 어느 것도 보관돼 있지 않았어요. 뒷날 혹시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서 파기한 거죠. 자료가 없으니 진실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슈타지는 철저히 기록을 남겼고, 사회는 그 기록을 공개하자고 합의한 것이 대조적이네요.”
안 교수는 2004~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박정희 정권 안보를 위해 1961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는 부정선거, 반정부 인사 감시·납치·고문에 앞장섰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안기부로 개편된 뒤에도 ‘대통령 각하의 분신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위원회는 2004년부터 3년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동백림 간첩단 사건, 정수장학회 등의 과거사를 조사했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과거사 조사 과제가 발표된 2005년 2월 “이렇게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과거사가 될 것”이라며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독일에는 두 가지 독재가 있다. 나치 독재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두 독재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비판도 있지만, 독일은 두 가지 독재 청산의 과거사 과제를 안고 있었다. 동·서독에서의 나치 독재 청산 경험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 통일 뒤 ‘빠른’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 청산에 기여했다. 연방 차원에서 문서중앙관리청과 몰수한 사회주의통일당 재산으로 ‘구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을 만들었고, 고령으로 중단되긴 했으나 에리히 호네커 전 공산당 서기장도 재판에 회부됐다.
한국에는 세 가지 과거사 과제가 있다. 피해자로서 일본 식민지배 청산, 가해자로서 한국전쟁 학살과 인권침해 등 독재 청산,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통일 이후의 미래의 과거사 청산까지. 안병욱 교수는 세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말했다. “독일 과거사의 뿌리가 나치라면 한국은 일본 식민지배입니다. 식민지배는 2차 세계대전 뒤 분단의 한 원인이 됐고, 분단 과정에서 전쟁을 겪으며 또 과거사를 만든 거죠. 그리고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세력들이 권위주의 정부를 낳았고요. 각각의 과거사가 연속성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독일의 과거사 청산은 일본을 비판할 때만 유효하다. 독재 청산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은 외면된다. ‘독일은 반성하는데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독일 정부는 반성하는데 한국 정부는 왜 반성하지 않느냐’는 질문과 동전의 양면이다. 현실은 다르다. ‘위안부는 없다’는 일본 총리의 망언에는 한목소리로 분노하지만, 이미 재심에서 무죄로 선고된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가지 판결이 있다’,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는 절반이 침묵한다.
독일 안내인의 질문 “북한에서 왔어요?”
“독일에선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등 여론 주도층이 미래세대를 위해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자고 앞장섰죠. 우리는 반대로 일반 대중, 특히 힘없는 피해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여론 주도층이 왜곡하거나 호도해 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과거사 청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런 요구들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야 했죠. 문제제기 하는 쪽도 민주화운동의, 반정부활동의 일부로 과거사 문제를 바라봤고요. 식민지, 독재를 거치며 일방적인 억압을 오래 받았고,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생각의 자유도 제한됐습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고 자유롭게 이 문제가 논의될 수 있었을까요?” 안병욱 교수가 말했다. 그도 참여했던 과거사 위원회들은 국가의 배·보상이 예산 낭비라든가, 분열을 조장한다든가,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등의 비난에 항상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한국에선 1990년부터 한국전쟁 학살, 독재 정부의 인권침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다루는 14개의 과거사 위원회가 있었다. 여전히 가해자에 대한 문제제기는 손도 못 댔지만, 이들 위원회 활동 결과 피해자에 대한 일부 보상과 법원의 재심 무죄판결의 ‘작은 성과’는 있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과거사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동독 과거사 청산이 북한 과거사 해결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안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회주의라는 체제 문제만 빼면, 한국의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동독의 독재보다 앞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화해위의 대상이었던 인권침해 사건들과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이죠. 북한은 동독과 달리 전쟁 책임이 있고, 소련·중국 등 국제 공산주의 영향에서 배제됐으며,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세습정권입니다. 게다가 동·서독은 경제적 교류가 있었고 군사적 위협이 없었고요. 그에 비해 남북 긴장관계는 상대의 군사적·정치적 체제 전복 위협이 자기 체제 보존의 명분과 구실을 줬죠. 적대적인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면 통일 이전의 역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큰 혼란을 빚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어떻게 한다고 결정하기보다는 과거사 문제까지 포함해 통일 이후 문제를 계속 논의해야 합니다.”
동독의 과거사 청산은 ‘승자의 보복’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독 아닌 동독 내부의 요구에서 시작됐다. 베를린장벽 붕괴 뒤 동독 주민들의 요구와 그 요구를 받아든 의회에서 통일 뒤 독재 과거사 청산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청산 기준도 서독 법이 아니라 당시 동독 법체계를 기준으로 위반자를 가려냈고, 국제 인도주의법을 따랐다.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가 아닌, 정부가 국민을 민주적으로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동독의 정치범수용소였던 호엔쇤하우젠을 18일 찾았다. 창이 없는 1평 남짓한 감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남대문경찰서와 서대문구치소에 3개월간 수감됐던 안 교수가 “우리는 이만한 방에서 8명씩 잤다”고 말하자 안내해주던 라인하르트 푸어만이 말했다. “북한에서 왔어요?”
베를린/글·사진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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