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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주씨의 가방에서 발견된 유인물들. 1984년 1월16일 교회야학교사일동 이름으로 쓴 교회야학양심선언(양면), 1984년 4월6일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에서 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야학탄압대책위원회’에서 낸 성명서, 팸플릿 ‘아방타방’(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유시주씨 제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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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르포]28년 만에 돌아온 가방
▶ 28년 만에 돌아온 가방이 기쁜 것은 주인만이 아닙니다.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 기자는 덕분에 재밌게 현대사 공부를 했습니다. 군부독재를 온몸으로 관통해야 했던 당시 학생들의 고민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민주화’라는 용어를 막 쓰고 있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도 6월에는 현대사를 공부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사료들은 웹상으로도 볼 수 있어요.
1984년 노동운동 시절
“피신하라” 지시가 떨어졌다
운동의 흔적을 가방에 담아
친한 친구의 친구의 친구에게…
그 가방이 타임캡슐처럼
28년 만에 주인을 찾아왔다
성명서, 선언문 등 유인물은
때론 비장미가 넘쳐흘렀고
때론 관념적이기도 했다
생산자 손을 떠난 유인물은
그걸 받아든 사람들 품에서
80년대를 뚫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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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만에 돌아온 유시주씨의 가방.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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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유시주(52·희망제작소 이사)씨에게 택배로 가방 하나가 배달됐다. 30년 전 유씨가 쓰던 노란색 합성피혁 가방이었다. 세파를 혼자 겪은 듯 낡고 허름한 가방은 과거에서 온 타임머신 같았다. 타임캡슐 같은 가방 안에는 1980년대의 역사를 담은 사료들로 가득했다.
서울대여학생운동사나 전위정당론 등 세미나에서 발표할 발제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창립선언문, 당시 운동권이라면 꼭 읽곤 했다는 팸플릿 ‘아방타방’(정세 분석과 투쟁역량 평가를 통해 앞으로 운동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서) 필사본, 마오쩌둥의 모순론, 김지하의 시집 ‘황톳길’ 복사본 등 당시 유씨가 읽었던 자료들이 빽빽했다. 1983년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성명서나 1984년 서울대학교 학원자율화 관련 활동보고서 등도 그대로였다. 몇몇 문서는 얼룩이 묻거나 종이 끝이 찢어질 만큼 헐었다. 누런 갱지에 타이프로 친 옛날 활자가 정답고 생경했다.
철필로 쓰고 롤러로 밀던 가리방 등사기
1980년대는 사회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었다. 유신독재가 끝난 직후 찾아온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독재의 겨울로 회귀했다. 80년 5월 광주 이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대학사회를 무겁게 짓눌렀다. 1983년 말 전두환 정권의 유화 조치가 취해지기 이전까지 학생운동은 억압으로 침체됐다. 사복경찰이 캠퍼스에 상주하고 집회가 열리면 현장에서 검거되고 강제징집당해 녹화사업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학원자율화 조치로 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학내 분위기가 좋아지며 1985년까지 민주화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문제, 박종철군 고문·사망 사건 등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93년 2월 문민정부 수립까지 민주화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노동자, 민주청년, 민주학우 여러분! (중략) 저들은 민주청년학생의 민중참여 정신을 ‘현 정부를 타도하고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를 의식화·조직화하여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봉기하려 했다’고 더럽히고자, 야학 강학(교사)의 양심과 인격과 인권을 무참히 유린하고 야학 폐쇄를 종용하여 노동자의 알 권리마저 빼앗고자 합니다….”
3일 오후 경기도 고양에서 만난 유씨에게 건네받은 성명서 끝에는 ‘야학탄압대책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1983년 8월27일께 야학 교사들이 불법 강제연행된 ‘야학연합회 사건’에 대한 규탄성명서였다. 1984년 1월16일치의 제목이 ‘교회야학양심선언’인 또다른 유인물은 투쟁 의지를 드높이며 끝맺었다.
교회나 성당에서 하던 19개 야학 교사 일동 기명 선언문도 살벌한 시절을 기록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1월7일자에 ‘산업체 침투 좌경조직’ 운운의 왜곡보도가 나왔습니다. (중략) 우리 야학 교사들은 노동자 인권 수호를 위한 민중선교와 야학활동을 어떠한 억압 아래서도 확대 지속할 것을 선언합니다. 또 이번 같은 야학탄압은 단지 ‘야학연합회 사건’이란 조작된 사건을 규탄하는 데 그쳐서는 해결되지 않으므로 야학을 수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는 야학들이 단결하여 제도적이고 지속적으로 야학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노력이 기울어져야 합니다.”
보도지침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통제하던 시절, 학교나 거리에 뿌려지는 유인물은 ‘유일한’ 언로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 정보를 아는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작업’이 필요했다. 철필로 쓴 등사원지를 깔고 그 위를 롤러로 밀어서 한 장씩 찍어내는 ‘가리방 등사기’에서부터 돌려서 찍어내는 ‘고속 등사기’, ‘타이프’를 치다가 인쇄소를 이용하기까지 학생운동은 인쇄기계와 함께 발전했다.
문건마다 ‘비장미’가 흘렀다. ‘보고서 발간에 부쳐-우리는 지금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라는 큰 제목으로 시작하는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의 내부 문서인 ‘활동보고서’(1984년 4월27일)를 보면, 운동권 학생들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그간의 학원민주화에 대한 논의와 실천을 정리, 반성, 평가하고 이 땅의 총체적 민주화와 이를 통한 분단의 극복과 인간해방이라는 대명제하에 5월과 앞으로의 우리들의 실천적, 구체적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시험이라는 학사 일정 속에서 학원민주화, 사회민주화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해결의 노력이 없다면 이 또한 언어도단인 것이다.”
“학우여! 들리는가. 이 시대의 고난에 찬 신음소리가. 학우여! 이제 저 진리의 전진하는 스크럼 속에서 이 어둠을 헤치고…. 가자! 싸우자! 학원에 자유의 종이 울릴 때까지….”
맥락을 알지 못해도, 눈으로 읽기만 해도, 동시대의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질 영탄조의 문장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문건은 학원자율화 조치의 실제적 배경과 자율화 조치의 한계, 학원자율화 추진(학자추)의 경과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사회민주화 없는 학원자율화 조치는 기만적 행위인 만큼 학내 홍보, 집회, 가두홍보 등에서의 남은 과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학생회 부활 추진 좌담회에 참석한 백태웅·은수미
“과·반 총회의 가장 큰 문제가 토의 진행 방식과 참여도의 문제이다. 토의 진행을 너무 일방적으로 하면서 주최 측의 의도대로 의견을 짜맞추려는 일을 낳았고 이러한 실정에서 많은 학생대중이 총회를 회피하거나 거부하게 된 것 같다. (중략) 가두홍보는 현재와 같이 언론의 왜곡과 날조가 만연하는 시기에 있어서 폐쇄되고 통제된 언로를 뚫고 나아가 우리의 진실된 이야기를 일반 국민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중략) 방법에 있어서도 배포하는 즉시 경찰의 탄압을 받아야 하는 현금의 상황을 고려하여 다양한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서울대학교 언론협의체에서 신문 한면(394×545㎜)에 찍어 낸 ‘자유언론’(제6호·발행일 1984년 9월13일)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대학의 들뜬, 그러나 여전한 시대의 모순에 분노하는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학내 언론에서 펴냈던 ‘민주전선’ 3800부를 관악경찰서 형사들이 강탈당했다는 소식과 서울제일교회에 보안사 요원과 폭력배들이 난입한 사건,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 연사였던 백기완 선생 강연에 10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학내 복학생협의회 발족 소식과 단대 학생회장과 여학생회장 입후보자 소개도 했다.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는 좌담회에 참석한 학생 중에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현재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백태웅(학도호국단 총학생장)과 같은 사건에 연루됐던 민주당 국회의원 은수미(여학생부장)의 이름도 보였다.
5일 서울 중구 서소문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으로 가방 안의 사료들을 들고 갔다. 권형택(57·사료관 연구위원)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해석’을 해줬다.
“70년대 긴급조치로 제적당한 1000여명이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을 할 수 있었어요. 다시 80년 5월17일 전국에 계엄령을 확대한 직후 또 한번 운동하는 학생들이 제적돼요. 83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다시 복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그런 유화조치가 결국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꼼수였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죠.”
부드러워진 학내 분위기는 학생운동이 다시 활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학림사건(1981년 전민노련·전민학련 결성 이유로 20여명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고 가 구속·기소한 사건)으로 구속된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석방하라는 1984년 7월26일 성명서는 그의 모교인 국민대 동문회에서 나왔다. 옛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젊은 기자에게 권씨는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사를 설명했다.
“학생회가 생겨나자 학생운동이 활발해졌어요. 위기감을 느낀 군부가 다시 사건을 조작해서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영화 <남영동 1985>에 나왔듯이 김근태와 민청련 간부를 잡아서 고문해 학생과 청년, 나아가서 재야인사까지 간첩으로 조작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대표적이죠. 86년에는 1285명이 구속된 건대 사건(반외세자주화, 반독재민주화, 조국통일 3대 구호를 걸고 10월28~31일 건대에서 있었던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를 경찰이 진압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계속 수배자를 잡아들이죠. 87년에 선배의 소재를 캐물으며 고문하던 박종철이 숨지자 6월항쟁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보관된 85만건의 사료
지금 막 20대를 빠져나오는 중인 2000년대 초반 학번에게 80년대 이야기는 가까운 ‘현대사’라기보다는 오래된 ‘역사’에 가까웠다. 물론 ‘역사’에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하지만 동시대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닿을 수 없는 ‘정서’도 있다. 유인물을 쓰고 읽은 사람들에게 80년대는 청춘과 동일하게 인식된다. 선명한 것을 좋아하는 20대의 감수성과 시대의 울분이 없었다면 학생운동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관념적이었고 때론 변화를 인정하지 못했다. 청춘의 특권이었을까. 1989년 임수경씨 방북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유럽에서 살다가 최근 산문집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낸 어수갑(59·사료관 연구위원)씨가 말했다. “젊었으니까 문제를 관념적으로 봤겠죠. 이론의 틀에서 현실을 보다 보니 추상적이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일정하게 반성했어요. 그렇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그땐 실재하는 적과 싸워야 했어요.”
권형택씨는 미래를 위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1980년대는 세계적으로 격변의 시대였어요. 당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적 투쟁을 했지만 동시에 세계적 시야를 읽는 깊은 연구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점이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사회는 진전한 듯 보였지만 더 튼튼한 민주주의와 민생 기반을 만드는 데 오래 걸리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 (국정원 선거개입, 5·18 민주화운동 역사성 훼손 등) 최근 많은 희생을 치르고 이뤄낸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현실을 보기가 괴로워요. 젊은 사람들도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해주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사료관에는 전체 85만건의 사료가 보관돼 있다. 사료 보존을 위해 습도 50%, 온도 22~24도가 유지된다. 양경희(53·사료관 과장)씨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사료관에 기증한 사료들을 보여주었다. 시위의 동을 뜰 때(시작할 때) 주동자들이 허공에 뿌린 유인물, 혹은 강의실 바닥이나 화장실, 도서관 한쪽에 놓인 유인물을 이제껏 간직해온 사람들은 대개 직접 그것들을 생산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소극적 지지자였다. 양 과장은 유인물의 상당수를 당시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관처였던 종교기관에서 수집했다고 말했다.
“생산자들은 만들고 남은 유인물은 꼬투리 잡힐까봐 없애기 급급했어요. 갖고 있기만 해도 걸리면 무조건 잡혀가서 맞으니까요. 정보기관에 포섭된 청소아줌마가 학생들을 감시하던 시절이었지요. 후배가 화장실에서 몰래 유인물을 들고 가 읽는데 아줌마가 따라 들어와서 뭐하냐고, 놀란 후배가 씹어서 흔적 없애고 찢어서 물 내려보내고…. 생각해보니 그때는 시시티브이(CCTV)가 없어서 유인물 돌리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상상이 돼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만들어진 유인물은 어떤 사람들에게 읽혀서는 안 됐다. 29년 전인 1984년, 스물네살의 유시주씨는 서울 구로공단 주변의 반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그해 2월 졸업한 뒤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돌릴 유인물을 찍기 위해 밤이면 몰래 등사기를 돌리는데, 집주인이 기계소리를 들을까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어느 날 유씨에게 ‘피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위장취업해 공장에서 몰래 일하던 그는 밤늦게야 작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요를 깔고 자면 아침에 요가 축축해질 정도로 습기가 많은 방이었다. 그는 방 안에 스미고 흩어진 ‘학생 출신’의 흔적을 치웠다. 운동의 흔적은 보안사가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먼 사이인 ‘친한 친구의 친구의 친구’에게 건네졌다. 그리고 지난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방 하나를 받았어.”
30년 전의 가방을 보며 유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알았어요. ‘노란색 줄무늬 가방?’이라고 물어봤지요. 내가 직접 썼던 유인물은 아니에요. 엄선돼 잘 보관된 유인물도 아니고, 그냥 그때 내 손에 있어서 보관된 거라지만… 타임캡슐 같은 거잖아요. (가방을 받고) 정말 순수하게 기뻤어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살아온 80년대를 정리하고 재해석해 역사에 남겨야 하지 않을까 어떤 질문을 요구받은 느낌이었어요.”
가방은 들키지 않고 살아남았다. 유시주도 그의 친구도 80년대를 뚫고 살아남았다. 가방이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의 안전을 염려한 속 깊은 우정이었을까,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책임감이었을까. 또 한번 6월을 지나는 중이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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