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은 인수위 대변인 시절부터 ‘용퇴론’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을 웃음으로 넘기며 대답을 회피했고, 인수위 활동이 종료될 즈음엔 “사심 없이 왔다. 귀가해야지”라고 오보를 흘렸다. 사진은 윤 대변인이 2월18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정부 주요 인선안을 발표하는 장면이다. 인수위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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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르포]기자가 만난 윤창중
▶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인수위 대변인 임명 때부터 여기저기서 ‘부적절한 인사’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며 그가 그럴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족했습니다. 인수위 담당했던 기자들이 더 열심히 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통령이 알 수 있도록 했어야 했습니다. 박 대통령과 국민께 ‘사과’드립니다.
인수위 시절 입에 달고 다닌“제가 26살부터 기자생활을…
같은 언론계 사람으로서…
아이고… 하하하… 여하튼
그것은 말씀드리지 않겠다” 인수위 다음 행보 묻는 질문에
“귀가해야지, 사심 없이 왔으니…”
나중에 다른 기자들과 만나
“기자들 오보 다 막아줬는데
오직 그거 하나는 그냥 뒀다
남자는 복수를 해줘야 한다” 내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그’라고 하자)과 딱히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대선 뒤 ‘박근혜 인수위’(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두달 동안 그는 국내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대변인이었고, 나는 1000명에 육박했던 인수위 등록기자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기자회견장과 회견장 앞 복도에서 그를 만났고 공식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직접 만난 인연은 그게 전부다. 나도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힘있는 취재원’인 그를 따로 만나 특종거리를 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어떤 사적 자리에서도 그와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뒤 그는 청와대 대변인으로 옮겨갔고, 나는 여당 담당 정치부 기자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주간지로 부서를 옮겼다. 요즘 분위기로는 앞으로도 그를 ‘힘있는 취재원’으로 다시 만날 일이 또 올지 회의적이다. 다음은 나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다. 당선인이 준비한 최악의 크리스마스 선물 2012년 12월24일 오후 6시.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현 정무수석)이 당사 기자실에서 갑작스런 인선 발표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께서는 당선인 수석 대변인에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 남녀 대변인에 조윤선 당 대변인 그리고 박선규 선대위 대변인, 당선인 비서실장에 유일호 의원을 임명했습니다.” 그가 직접 오진 않았다. 기자들은 그가 예전에 썼던 각종 글을 뒤지고, 당 안팎의 반응을 살폈다. 좋지 않았다. 기자들 사이에서 그의 별명은 ‘당선인이 준비한 최악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12월25일 오후 3시36분. 박근혜 당선인 대변인단 첫 브리핑이 있었다. 그의 첫 등장이었다. 그는 “저 개인적으로 지독한 고뇌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돕기로 했습니다”라며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그에게 기자들은 너나없이 ‘까칠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임명이 ‘국민대통합’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 그가 쓴 각종 칼럼이 언론인으로서 공정하지 못했다는 지적 등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른바 ‘폴리널리스트’ 이력(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실 근무,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특보)에 대해 그는, “자발적으로 정치권에 들어간 건 아니고, 여러분처럼 정치부 기자를 하다 보니, 역시 생활인이기 때문에 곤궁해서 들어간 건 사실”이라는 알쏭달쏭한 답을 내놨다. 그는 말끝마다 기자들을 ‘언론계 동지’라고 불렀다. 12월26일 오전 9시께. 처음으로 전화통화가 됐다. 몇가지 현안 관련 질문을 하다, 그가 마지막 직장이었던 <문화일보> 퇴사 뒤 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를 맡은 이력에 대해 물었다. “신문사를 나왔으니 생활도 해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차원에서 한 것이다.” -누군가 추천을 한 건가? “아니다.” -그럼 대우조선해양 쪽에서 연락이 온 건가? “그렇죠. 뭐 그런 것까지.” -전문성이나 해당 분야 지식이 필요한 일 아닌가? “그런 것은 없어요. 여러 가지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무슨 역할을 했나? “말할 수 없다. 김형, 김형도 언론사 출신이고…, 언론사에서도 사외이사 하는 사람 많잖아. 회사에 한번 알아봐. 하는 사람 많을 거야. 그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김형도 사외이사 할 수 있어요.” 나를 ‘김형’이라고 부른 건 의외였다. 다른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같은 언론계 사람으로서 부탁하고 싶은 게, 족적을 남기고 사는 건데, 사시를 갖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다 언론인인데.” 나는 “대변인은 이젠 정치인이시지요”라고 답했다. 2013년 1월2일 그는 과거 방송에서의 부적절한 언행 및 막말 수준의 칼럼으로 자질 논란이 일어 입지가 날로 좁아지던 중이었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특히 친박 진영에서도 ‘본인이 용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오후 3시46분, “인수위원 임명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는, 왜 굳이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발표를 하러 당사 기자회견장에 온 그에게 질문했다. “우리 좀 존중하자, 인신공격하듯 그러면…” -용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하하…, 오늘은 이 내용만 발표하겠다.” -계속해서 이런 지적이 나오는데, 어떤 반응도 안 보이셨다. “오늘은 이 발표로, 이 발표만 말씀드리겠다.” -사퇴할 생각이 없다는 걸로 보면 되는 건가? “….” -용퇴론에 대한 입장을 밝히긴 할 건지? 아니면 계속 답변 안 할 건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하.” -밝혀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오늘 이 얘기만 하려고 왔다. 하하.” 1월6일 10시45분. 공식적으로 현판을 달고 업무를 시작한 삼청동 인수위에서 그가 첫 브리핑을 했다.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브리핑에서 그는 각종 일정을 발표한 뒤 시간 및 장소 등에 관한 4개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이 잠잠해지자 돌연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저는 언론계를 떠났지만, 제가 인수위 출입도 여러 차례 했다. 여러분들의 취재 애로사항도 어떤 게 있는지, 제가 몸으로 알고 있다. 사실 제가 발표한 내용은 지금 기자 입장에서 취재를 해서 여러분에게 전해드린다는 것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무런 제지가 없자 그는 자신의 언론관에 대한 연설을 이어갔다. ‘낙종도 특종도 없다’는 방침, ‘특종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보로 끝난다’는 경고, ‘정부 요직 인선 때마다 오보 탓에 언론의 신뢰가 상실되는 걸 통감했다’는 경험, 그리고 “제가 햇병아리 시절 때 했던 것보다는 오히려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시키고자 한다. 제가 26살 반…”까지 얘기했을 때였다. 타이핑을 하면서도 더는 의미가 없겠다 싶어 손을 들고 “대변인!”을 외쳐 그의 발언을 잘랐다. -언론 신뢰를 떨어뜨리는 게 오보도 있겠지만, 정치권을 오가는 폴리널리스트 때문이란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말씀드리지 않겠다.” -여당에서도 제기되는 ‘대변인 용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제 충분히 말씀드렸다.” -다시 한번 말해달라. “허허허…, 여하튼…, 그래서 여러 기자들 고생하는데, 기사 문제 때문에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다. 오늘 말씀드릴 것은 이상이다.” 하루 전인 5일 브리핑에서 한 기자는 ‘대변인 임명이 국민대통합에 맞느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고 질문했고, 그는 “그것은 제가 임명되고서 그 다음날 말씀드린 걸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제대로 답변한 적이 없는 셈이다. 1월9일 공동기자회견장 옆의 미디어지원실 안에서 그와 단둘이 마주쳤다. 평소에 그 사무실에서 일하던 새누리당 당직자들도 자리를 비운 때였다. 둘이서만 만난 상황은 처음이라 어색해하며 속으로 ‘무슨 말을 하나’ 하는 찰나, 그가 먼저 “아이고…, 하하하” 하며 다가와 아는 척을 하더니 팔을 뻗어 내 한쪽 팔을 쓰다듬었다. 악수를 나누고 몇마디 인사말을 나눈 뒤 난 그날 인수위에 온 한 지방자치단체장의 방문 목적을 물었다. 그는 “알아보고 답해주겠다”고 답했다. 저녁까지 확인이 안 됐는지 연락이 없기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그는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네, 김 기자님”이라고 말했다. 처음이었다. 이날 이후로는 그와 연락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다만, 그렇다고 특별한 소득이 있는 건 아니었다. 1월14일 그는 오전 브리핑 뒤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하다가, 뜬금없이 “제가 26살 반에 기자가 됐어요”라는 말을 또 꺼내 갈등을 빚었다. 나는 “질문에 답변부터 해주세요”라고 했고, 다른 기자는 “우리도 바쁘다. 대변인 개인사를 들으려는 게 아니다”라고 답변을 재촉했다. 나중에 우연히 마주친 그는 내게 “우리 좀 존중은 하자. 인신공격하듯이 하고 그러면…”이라며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그와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는 언론계 출신 한 인사와 점심식사를 했다. “윤창중은 잡초 인생이다. 영자신문사와 방송국을 거쳐 신문사에 들어가면서 기사 스타일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 대학노트 한권에 기사에 자주 쓰이는 표현을 가득 적어서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다. 엄청나게 노력했다. 인생이 계속해서 ‘서바이벌’이었다. 비주류로 잡초처럼 살다보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길을 추구한다. 언론과 정치권을 오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선택한 길로 봐야 한다.” 나는 이때의 ‘서바이벌’이란 표현을 ‘생계를 위한 수단’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넥타이와 김치·술까지 보내준다는 팬 자랑 1월 중순 사적인 접촉을 꺼리던 그가 이즈음부터 기자들에게 식사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냉정해서, 한두 번 밥자리를 지켜보고 ‘식사하는 관계’를 유지할지를 판단한다. 그와 기자들의 밥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영양가가 없었다”는 얘기다. 나도 참석한 적이 없다. 들려오기로는, “팬들이 넥타이도 보내주고 김치, 술도 보내준다”거나 “(부정적인 기사 쓰는) 기자들은 내 팬들한테 걸리면 큰일 난다”는 식의 자랑, “기자들은 나를 매일 조져도 국민들은 나를 100% 신뢰한다”는 자신감 등이 주된 내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과거 소속했던 언론사의 기자들로부터 ‘윤창중은 술을 마시면 사고를 쳤다더라’는 나름 신빙성 있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래서 짓궂은 기자들은 밥자리에 가서 그에게 술을 권하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수위 기간 동안 바깥에선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그는 한창 비판 기사가 쏟아지던 시절 너무 힘들어서 퇴근 뒤 귀갓길에 막걸리 한병을 사서 들어간다고 털어놓았다. “큰 와인잔에 따르면 한병이 다 들어가. 그걸 원샷하고 샤워하고 나오면 알딸딸해지거든. 그러곤 바로 잠들지.” 2월19일 2월 초부터 각종 인선이 발표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멀어져갔다. 남은 관심이 있다면 그는 과연 어디로 갈지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날 발표한 청와대 수석비서관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명단 발표 뒤 그는 질문도 받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기자들은 그가 ‘물먹고’ 낙심한 거라고들 했다. 나는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라나가며 물었다. -기왕 투신했는데, 자리를 맡는 게 낫지 않은가? “나는 귀가해야지. 사심 없이 왔으니까.” -기대하는 게 있나? “전혀 없다.” 그의 이 두 마디를 당시 기사에 반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24일 청와대 대변인에 내정됐다. 한달여 지나 3월 중순 그는 청와대 담당 기자들을 만나 나와 이 기사에 대한 소회를 털어놨다고 한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게 김외현 기자 사건이었다. 그날 나를 따라 나오더니 어쩔 거냐고 물어서 ‘귀가한다’고 했는데, 그걸 그대로 썼더라. 내가 인수위에서 기자들의 오보를 다 막아줬는데, 오직 이거 하나는 그냥 둬서 오보가 됐다. 남자는 복수를 해줘야 한다.” 무엇에 대한 복수였을까 생각하며 씁쓸했다. 3월 말 그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한달여 활동한 시점이었다. 청와대 담당이 아니라 그와 더는 접촉할 일은 없었지만, 어느 날 기자들과의 식사자리에 나를 간접적으로 불렀다. 그러나 인사발령 탓에 참석을 못하게 됐고, 같이 가기로 돼 있던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약속시간이 약간 지나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요?” -누구시죠? “아, 어디냐고. 왜 안 와!” 애처럼 조르는 것 같은 모습에 웃으면서 “주간지 마감 일정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오늘은 참석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에 뵐 기회 있겠죠”라고 했다. “빨리 끝내고 오쇼”라고 하는 그에게 “예, 예” 하고 답하긴 했지만, 그날 결국 나는 가지 못했다. 그는 인수위 시절에도 몇 차례나 나에게 “술 한잔하자”는 얘기를 했다. 나도 그때마다 “좋지요. 언제가 좋을까요”라고 했다. 답은? 내가 참석하기 힘들었던 그날 자리를 뺀다면, 답은 오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아직까지는. 김외현 <한겨레21>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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