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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26 20:37 수정 : 2013.04.26 23:00

지난 25일 저녁 7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추모기도회에서 예수회 최영민 신부가 강론하고 있다. “아픈 사람과 함께하는 게 예수님의 마음”이라던 최 신부는 “죽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날 100여명의 사람들이 육우당을 위해 기도하고 찬송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제공

[토요판/르포]동성애자 육우당 10주기

▶ “죽고 싶어요.” 한국청소년개발원이 2006년 135명의 청소년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77.4%가 자살을 생각해봤다고 답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혼란과 낙인 속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우당도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요. 그와 함께했던 네 사람의 기억과 일기장에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육우당 사진을 처음으로 문서에 담았어요. 외부에는 공개 안 되도록 주의해 주시고….”

25일 저녁 7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003년 4월2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성애자 고 ‘육우당’(당시 19살) 10주기 추모기도회가 시작됐다. 사회를 맡은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활동가 정욜(35)씨는 이 자리에 모인 100여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면서도 ‘보안’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동인련 사무실에서 숨진 육우당을 처음 발견하고, 정신없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언론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그다. 추모기도회가 열린 장소 곳곳에도 ‘사진 촬영 금지’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애도해주길 바라며 보도자료까지 보낸 기도회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이 부담스러웠다.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주님, 육우당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예수회 최영민 신부의 말에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답한다.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천주교식 위령 기도가 끝난 뒤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도 축도에 나섰다.

“하나님이 지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죄입니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이성애자인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멘.”

신부도 목사도,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육우당을 위한 기도회 형식의 추모제가 열리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자신의 호를 육우당이라고 지은 이유는 바로 이 여섯 친구 때문이었다. 그는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술을 찾았다. 소주 한 병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수면제도 그의 고통을 덜어줬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꼭 빌려서라도 피웠던 담배다.

그리고 육우당은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그는 ‘멋쟁이’였다. 1년에 한 번 세상에 나오는 영정사진 속 얼굴은 10년 전이지만 촌스럽지 않았다. 얼굴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 살짝 내리깐 눈. 동인련 사람들이 받은 첫인상도 내가 느낀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2년 동인련 송년회에 그가 처음 왔다. 당시 전체 회원이 20~30명 남짓이었기에, 동인련도 처음 여는 송년회였다. 얼굴은 몰랐지만 그는 이미 화제의 인사였다. 그해 가을 언젠가, 그는 만들어진 지 5년 된 동인련에 편지를 보냈다. 힘내라는 말과 함께 자신도 활동이 가능하냐는 내용이었다. 편지 속엔 후원금 2만원이 들어 있었다. 돈은 푸른색이 보일까봐 종이로 감싸져 있었다. “어린 친구가 그러는 게 너무 기특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어요.” 정욜씨는 그런 편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고 했다. 같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한참 뒤인 2003년 3월26일 육우당은 일기장에 동인련에서 허락을 받아 ‘다행이다’라고 표현했다. 동인련 누리집에 동인련에서 일할 수 있는지 글을 올렸더니, ‘물론이지. 언제라도 환영이야’라는 답을 들은 날이었다.

그날 송년회에 육우당은 비단조끼 옷을 입고 화려하고 고전적인 귀걸이를 걸고 나타났다. 귀걸이는 한동안 그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저도 그날이 동인련 처음 간 날이었어요. 신입회원들끼리 한쪽에 모여 있었는데, 제 옆에 육우당이 앉았었죠.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었지요.” 동인련 활동가 곽이경(34)씨가 말했다. 육우당은 체구가 작았지만 다부졌다고 한다. 스키니진에 딱 붙는 재킷을 즐겨 입었다. 한번은 곽이경씨가 하고 온 귀걸이를 탐내며 “나한테 줘”라고 떼쓰기도 했다고 한다. 성격도 밝고 쾌활했다. 송년회에서 먹을 걸 권하는 사람들의 말에 “제 깜찍한 위장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는데요”라고 받아쳤다. “인천에서 왔어요. 졸업 앞두고 있어요.”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따돌림받다 자퇴한 사연은 육우당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진 아무도 몰랐다. 같은 동성애자들 사이에서조차 사생활은 물어선 안 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2002년 겨울 동인련을 찾았다
비단 조끼, 커다란 귀걸이
멋내길 좋아하는 10대였다
동인련은 집이 되고 생활이 됐다
담뱃값을 아껴 회비도 댔다 

2002년 10월 아버지와 함께
신경외과를 간 건 절망이었다
2003년 4월 성 타락 운운한
한기총의 성명은 충격이었다
천주교 신자 육우당은
성모 마리아상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육우당이 동인련에 남긴 십자가상과 성모 마리아상. 유결(34)씨가 고인이 평소에 피우던 던힐 담배를 함께 올려두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제공
2003년 4월 병역거부를 결심하다

그 뒤로 육우당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달여를 제외하고 동인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도 활동은 못했지만 몸은 늘 동인련에 있었다. 일이 끝나면 기름난로 하나뿐이던 동인련 사무실에서 돗자리 하나 깔고 잠을 자곤 했다.

인천을 떠나 서울 회기동 생활을 시작한 건 가족과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교육자에 천주교 신자인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아버지가 알면 안 된다”며 힘들어했다. “누구나가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곳이 집인데 그러지 못했잖아요. 가족과 갈등이 크니까 집을 나왔고, 그 뒤에 동인련 사무실에서 지냈어요. 전화하면 늘 ‘어, 나 동인련이야’라고 말했거든요.” ‘절친’이었던 제시카(27)씨가 말했다.

동인련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사이 그는 자연스레 ‘준상근자’가 됐다. 저녁회의에도 집회에도 늘 그가 있었다. 재정난 탓에 상근자를 둘 수 없어 사무실에서 잡히는 사람이 늘 일하던 때였다. 곽이경씨와 함께 동대문시장을 찾아 무지개 깃발을 만들기 위해 색색의 천을 사기도 했고, 그 천을 들고 당시 최대 이슈였던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도 참가했다. 그 깃발을 들고 반전집회에 나가던 날, 육우당은 남은 빨간 천을 “예쁘다”며 몸에 둘렀다. 무지개 깃발 아래 모였는데, 하필 빨간색 천을 두르고 있으니 사람들이 “너무 튄다”며 만류했지만 그는 그대로 있었다. “형, 나 추운데 안아줘.” 동성애자인 걸 들킬까봐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반전집회 참가는 육우당에게 자부심을 안겨줬다. 2002년 4월3일 그는 병역 거부를 결심했다. ‘살인 무기’인 총을 잡지 않을 권리도, 전쟁을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종묘공원에서 파병 반대 시위를 벌일 예정이야. 난 요새 보람을 느껴. 동인련에서 일하면서 나도 이 사회를 위해 뭔가 일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 무지개 깃발을 세우고 동성애자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도 좋고.” 뿌듯한 마음은 일기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내적 고민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동성애자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한 거였죠. 가족과 멀어진 상황에서 기댈 곳이 동인련밖에 없었으니 더 애착을 가진 것 같아요.” 제시카씨가 말했다.

이 시기 육우당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돈’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동인련 재정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또 그만큼 자주 적은 돈이라도 회비를 냈다. 2003년 4월1일 일기에도 절절한 돈 고민이 적혀 있다. “한 달에 드는 돈이 40만원 정도인데 후원금이 겨우 20만원이라니.” 동인련 활동가 유결(34)씨가 말했다. “어느날 담배를 디스플러스로 바꾸더라고요. 그 차액을 모아서 회비를 낸다고. 자기가 아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그는 당시 2000원 하던 담배 대신 1500원짜리 담배를 피워 남은 돈 500원을 모아 동인련 후원금을 냈다. ‘월급도 안 주는 그런 곳에서 일하느냐’는 지인의 말에도 ‘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인련이 좋다’고 말했던 그였다.

명랑한 사람으로 기억됐지만, 그의 마음에는 절망이 자라고 있었다. 2002년 10월8일 그는 아버지와 한 신경외과를 찾았다. 이성애자 기피, 아버지에 대한 증오, 조울증, 단체생활 혐오 등 우울한 이유는 많았다. 의사가 말했다. “이곳에서 치료받는다고 이성애자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성애자로 사는 건 육우당이 아닌 부모님이 원한 삶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성애자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되고 싶지도 않다고.

고등학교 3학년 18살의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혼란스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외부와의 불화가 있었을 뿐이다. ‘이반 살이 개집 살이 살 떨린다. 온종일 살얼음 디디듯 불안해서 못살겠다. 부모님은 충격새요. 친구들은 놀림새요. 목사님은 설득새요. 나 혼자만 미운 오리 새끼. 힘겨운 하루하루가 아수라의 귀신 같구나.’(‘이반살이’) ‘세상은 우리들을 흉물인 양 혐오하죠.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저기 숨어살죠. 하지만 이런 우리들도 사람인 걸 아나요.’(‘하소연’) 그가 남긴 시 곳곳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편견으로 받은 상처가 묻어났다.

그의 실명은 여전히 금칙어

하느님을 믿는 그에게 2003년 4월7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성명 또한 충격이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 ‘유해매체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권고했다. 한기총은 성명서를 내는 등 크게 반발했다.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인권위는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육우당은 화를 냈다. “예수님은 분명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고귀한 인권을 유린하다니….” 그래서 그는 행동했다. 한기총 성명을 비판하며 그가 쓴 ‘동성애자도 인권 존중돼야’라는 글이 4월14일 <한겨레>에 실렸다. 그날 신문을 들고 동인련에 온 육우당은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글재주에 깜짝 놀랐다던 곽이경씨가 말했다. “글 쓴다고 말은 들었는데, 정말 신문에 실려서 다들 깜짝 놀랐어요. 아, 이렇게 우리 얘길 써서 알리면 되겠구나 싶어 신기했죠.”

한기총 성명 탓이었을까. 육우당은 그즈음 여섯 친구 중 ‘묵주’와 절교를 선언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틀 뒤 ‘난 가톨릭을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어’라는 고백과 함께 그 선언을 철회했다. 육우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밥을 먹을 때면 늘 성호를 그었다. 4월13일에는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사다 동인련 사무실에 두었다.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인 동인련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매일 묵주 기도를 했다. 동성애자들이 멸시받지 않는 세상이 오게 해달라고.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어.’ ‘죽음’이란 단어가 일기장에 처음 등장한 건 2003년 4월19일이다. 당시 그는 허무감에 빠졌다. 남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잘 사는데, 남들 대학 다닐 때 나는 동인련에 있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고 고백했다. 죽기 전까지 육우당의 곪은 마음을 주위에선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구보다 동인련 활동에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즐거운 약속이 있어 이른 시간 사무실을 떠났던 4월25일, 그는 동인련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달았다. 여섯 장의 유서, 동인련에 기부하겠다며 전 재산 34만원을 담은 봉투, 한복, 컵라면과 술, 생전에 글을 썼던 공책을 남기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고 허무함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가끔은 동성애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기도 했다.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 강자도 약자도 없는 그런 천국에서 살고 싶다.”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해달라, 천주교를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원한 대로 장례식장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드렸다.

그가 죽고 나서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한기연)가 찾아왔다. 육우당을 위로해줄 수 있었던 기독교인 친구들이었다. 한기연과 동인련은 같은 해 6월 한기총 앞에서 “사회적 타살에 대해 사과해달라”는 집회를 열었다. “한기총 앞에서 집회하면서 알았죠. 육우당을 죽인 건 한기총으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혐오였다는 걸.” 곽이경씨는 한기총에서 마주친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목사들의 시선을 본 뒤에야 육우당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했다고 말했다.

2004년 4월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 차별 조항이 삭제됐고, 2007년 10월 성적 지향, 학력 등의 이유로 비합리적인 불이익을 방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됐다. 2010년 10월 경기도에서는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다. 그러나 지난 19일 차별금지법 발의가 한기총 등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반발로 철회되면서, 2007년부터 이어져 온 세 차례의 법안 제정 시도는 아직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육우당, A씨, 한 동성애자, 윤군, ○○○…. 죽으면 거리낌없이 ‘○○○은 동성애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의 실명은 여전히 ‘금칙어’다. 여전히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삭제된 채 그를 기려야 하는 상황이다. 동성애자들의 언어로 그의 장례를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

추모기도회에서 기독교인인 곽이경씨가 말했다. “우리의 삶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당신의 죽음이 존중받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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