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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한국소비자원에서 진행중인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촬영 현장. 영화 취지에 공감해 자원봉사로 촬영에 참여하는 보조출연자들이 주인공 역을 맡은 박철민씨, 김규리씨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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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르포]②<또 하나의 가족>, 또 하나의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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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는 1997년부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주제의 광고 캠페인을 이어오고 있다. 삼성이 말하는 ‘또 하나의 가족’은 고객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노동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신들을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지칭하는 삼성 반도체 백혈병 집단발병자들의 호소가 대답 없는 메아리로 끝난다면 ‘희망’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지워야 할지도 모른다.”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삶이 보이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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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얻어 숨진 황유미씨
딸의 산재 인정받으려는
황상기씨 고된 투쟁 담은 영화
투자자 못 구해 제작 막막할 때
시민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 공감돼서”
“산재 고통 나도 알기에”
“영화 주변에 알리고 싶어”
보조출연 자청한 사람들
대사 없는 기자·공무원 역 맡아
혼신의 몸 연기 펼쳤다
“기자 연기는 자신있는데, 보조출연 가능할까요?”
“그럼요. 14일에 한국소비자원으로 오세요.”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문제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가족> 보조출연자 모집 소식이 페이스북에 떴다. 인터넷으로 신청을 했지만 경쟁률이 높을까 싶어 제작위원회에 ‘민원 전화’를 넣었다. 영화 <26년>처럼 사람들의 십시일반 기부로 만들어지는 영화 촬영에 어떤 사람들이 올까? 취재 욕심이 났다. 영화 제작비를 보태지 못한 부채감도 갚을 기회다 싶었다.
14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양재대로 한국소비자원 앞 식당에 3등으로 도착했다. 무급으로 출연하는 보조출연자들에게 제작위원회는 점심 식사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밥도 줘요?” 앞에 앉은 박영숙(가명·46)씨는 소고기국밥 한 그릇이 반가웠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박씨는 이미 10만원이 넘는 돈을 제작비로 기부했는데, 이번엔 몸까지 기부하러 나섰다.
“이 사연을 듣고 눈물이 났어요.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던 일이었는데, 멀쩡하던 자식이 갑자기 아파서 죽었다면….” 엄마의 이름으로 영숙씨는 촬영에 나섰다.
공단 직원 역 맡으면 김규리를 볼 수 있다?
영화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황유미(사망 당시 23살)씨와 딸의 산재를 인정받으려 싸운 아버지 황상기(58)씨의 이야기다.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으면 한번 이겨보세요”라는 회사 직원의 말에 “이 큰 회사를 어떻게 이기느냐, 못 이긴다”고 답했던 황씨.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6년 동안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싸웠다. ‘산업재해로 인정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기업 삼성과 관계된 주제인 탓에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는 투자를 유치하기 어려웠다. 위원회가 기댄 곳은 보통 사람들. 지난해 11월 ‘굿펀딩’으로 2071명에게서 1억2000여만원을 기부받았고, 지금도 ‘제작두레’를 통해 기부를 받고 있다.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보조출연자를 모집한 것도 열악한 제작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작비가 부족했기도 했지만,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싶어 도움을 청한 거예요. 힘들 때마다 도와주시는 이분들을 우리는 ‘또 하나의 스태프’라고 부릅니다.” 제작을 총괄하는 윤기호 피디가 말했다.
낮 12시쯤 촬영 장소인 한국소비자원 13층에 도착했다. 30여명의 특별한 손님들이 필요한 장면은 두 개였다. 하나는 ‘삼성’을 빗댄 ‘진성’ 반도체 부사장이 백혈병과 회사가 아무 관계가 없음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이다. 또 하나는 노무사 역을 맡은 김규리씨의 주도로 주인공 박철민씨 등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하러 가는 장면이다. 김규리씨의 실제 모델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이고, 박철민씨는 황상기씨를 연기한다. 반올림은 유미씨같이 백혈병으로 숨진 반도체 노동자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07년 유가족, 노무사, 산업의학 전문의 등이 모여 만든 단체다.
“기자 역과 근로복지공단 직원 역 하실 분 찾아요. 기자나 기자 지망생 있으세요?” 이은정 조감독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인기있던 기자 역과 달리 공단 직원 역은 지원자가 적었다. 산재 신청에 난색을 표하는 ‘악역’을 맡았기에 부담이 됐던 걸까. 이수영(가명·31)씨는 기자 역을 위해 노트북까지 가져왔지만 옷을 잘 입고 왔다는 이유로 공단 직원 역으로 낙점됐다.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보조출연자 모집을 알게 됐어요. 이 정도면 나도 도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건축설계사 수영씨의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가족을 잃었다는 공감에서 나왔다. 이씨의 어머니는 췌장암 투병을 1년 하다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딸을 택시 뒷좌석에 태워 가는 중에 잃었다는 말에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황유미씨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2003년 10월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엄마는 대학 가라며 만류했지만, 3남매 중 둘째였던 유미씨는 가족을 위해 취업을 선택했다. 유미씨는 입사한 지 1년8개월 만인 200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2007년 3월6일 경기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와 강원도 속초 집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택시 안에서 숨졌다.
산재도 이씨와 영화를 이어주는 끈이 됐다. 2010년 잦은 야근에 이씨는 사무실에서 기절했다. 코에 금이 가고 이도 다쳤다. 산재 인정은 받았지만, 치과 치료는 비급여라 자비로 부담하면서 마음고생을 겪었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고, 일한 만큼 대우해줘야 해요. 그러지 못했을 때는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야 하고요. 그게 기본적인 우리 사회의 규칙일 텐데, 삼성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규칙을 어겼을 때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고요.”
공단 직원 역 지원자가 여전히 부족하자, 연출부 인물담당 이규섭씨가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공단 직원 역 맡으면 박철민씨, 김규리씨를 직접 볼 수 있어요.” 역시나 지원자가 급증했다. 이 조감독은 “너무 젊어 보이는 분도 안 되고, 옷도 공무원스럽게 입은 분들 위주로…”라며 몇 사람에겐 ‘퇴짜’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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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오른쪽 둘째)가 영화 제작을 총괄하는 윤기호 피디(오른쪽 첫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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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에 코 박다 가끔 앞 보는 기자 역
“가족과 같은 직원이었던 고 백주연씨의 죽음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세계 최고의 안정 사업장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기업입니다.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과 달리 백혈병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진성’ 부사장 역을 맡은 임종윤씨가 안타까운 표정과 자신감 있는 미소로 회사 입장을 잘 대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컷. 다시 한번요” 소리가 들린다. 1분밖에 안 되는 장면인데 벌써 4번째다.
“기자 연기는 어떻게 해요?” 기자와 공단 직원으로 1인2역을 맡은 유재명(가명·32)씨가 내게 물었다. “실제 기자회견에 가면 말 받아 치느라 바빠서 노트북에 거의 코 박고 있어요. 근데 이건 영화니까 중간중간에 한번씩 앞을 바라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슬쩍 연기 조언을 건넸다. 역시 기자 역을 맡은 백승주(33)씨도 그 틈에 궁금한 걸 묻는다. “영화 촬영 때문에 일부러 머리 풀고 온 거예요? 제가 생각하던 여기자는 머리 질끈 묶고 야상 입고 운동화 신고 다닐 줄 알았거든요.” 촬영 대기 중이던 주변 사람들도 나를 힐끔 쳐다봤다. 어쩌다 여기자 대표가 돼버린 나는 “예쁘고 정장 입고 다니는 기자도 많다”고 강조했지만, 반응들이 시큰둥했다.
승주씨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덕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봉주 전 국회의원이 비비케이(BBK) 사건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는 걸 보고는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에도 가입했다. “봉도사가 감옥 간 건 제 상식에는 반하는 일이었어요. 화가 났죠. 그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미권스 회원을 늘려주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가입했죠. 이번 일도 그래요. 삼성 반도체 노동자 문제에 관심은 있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잖아요. 그러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참여한 거죠.”
그는 황유미씨가 겨우 23년을 살다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꽃다운 나이에, 열심히 살았단 이유로 죽을병에 걸린 게 속상했다고 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삼성과 싸우는 게 쉽나요? 힘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일을 세상에 많이 알리는 거죠. 그래서 저도 많이 알리려고요. 친구들에게 ‘나 영화 출연했다’고 말하면 ‘무슨 영화?’ 하면서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그럼 자연스럽게 영화 홍보도 할 수 있고요.” 비록 뒷모습만 나오는 ‘뒤통수 출연’이지만, 승주씨는 노트북 키보드를 치는 혼신의 몸 연기를 펼쳤다.
“슛, 레디, 액션”이 9번 반복되고, 오후 1시45분 드디어 첫 장면 촬영이 끝났다. 두번째 촬영은 한국소비자원 1층에서 오후 2시20분부터 시작됐다. 근로복지공단으로 변신한 1층에서, 박철민씨와 김규리씨가 출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는 황상기씨의 투쟁이 담긴 신문기사를 본 김태윤 감독의 눈물에서 시작됐다. <잔혹한 출근>을 연출하고 <인사동 스캔들>의 원작을 썼던 김 감독은 황씨를 설득해 영화화를 허락받았지만, 투자 유치도 캐스팅도 난관에 부딪쳤다. 그 와중에 실제 사연에 공감한 박철민, 김규리, 윤유선씨 등 알려진 배우들이 영화 출연에 응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지금 좀 힘들어요. 선정적이게 좀 써주세요. 규리도 좀 많이 노출시키고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박철민씨가 말했다. 너스레를 떨던 박철민씨도 촬영 시작과 함께 표정이 굳어졌다. “산재 신청하러 왔습니다.” 김규리씨의 말에 공단 부장 역을 맡은 배우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서도 노무사 역할이 중요했잖아요. 같은 노무사로서 눈길이 안 갈 수 없죠.” 노무사인 유재명씨는 회원으로 참여하는 ‘노동자의 벗’에서 촬영 소식을 듣고 출연했다. ‘노동자의 벗’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함께 노동법 교육을 하는 노무사들의 모임이다. 유씨는 주로 기업에 자문을 제공하는 노무법인에 있지만, 사용자만이 아니라 노동자 입장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우린 산재 사망률이 높은데, 그쪽은 어떠냐’고 아는 분이 스웨덴 사람에게 물었대요. 근데 상대방이 이 질문을 이해를 못 했다고 하더군요. 일하다 왜 죽느냐고. 그 대답에 더 충격을 받았어요.”
1분도 안 되는 한 장면 위해 4시간 대기
근로복지공단은 황유미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상 질병 산재 승인율은 36.1%(2011년 9월 현재)에 그친다. 황상기씨는 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냈다. 2011년 6월23일, 서울행정법원은 유미씨의 산재를 인정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공단의 항소로 재판이 진행중이다. 유미씨처럼 병든 반도체 노동자들도 여전히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올림은 숨진 반도체 노동자가 60여명에 이르고, 백혈병, 뇌종양 등을 호소하며 신고한 사람도 160명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산재 발생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그런데 기업과 정부 역할이 부족하죠. 회사는 벌금 좀 내면 되고, 법은 그런 회사를 위해 있어요. 산재 입증도 노동자 몫인데 사업주 도움 없이 입증이 가능할까요. 공단 판단이 법원 가서 바뀐 적도 많지만, 계속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어요. 보통 사람들이 먹고살기도 힘든데 소송까지 할 수 있겠어요?”
두번째 촬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촬영장을 지켰다. 이들도 영화 촬영장이 궁금하고, 실제로 보는 연예인들이 신기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틈이 보이면 배우들에게 사인도 적극적으로 부탁했다.
김선기(34)씨도 스태프들 틈에서 촬영을 구경하고 있었다. 김씨는 민주노총 서울 일반노동조합 대외협력국장이다.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과 ‘일반노조 협의체’에서 만난 인연으로,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소식도 꾸준히 듣고 있었다. ‘운동판’에 있었기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놓지 않은 그였지만, 노조활동가의 입장에서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는 특별하다. “노조가 없어서 반복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삼성은 노조를 불온시하잖아요. 노조가 있었다면 더 강하게 문제제기 할 수 있었을 텐데….”
다음 장면 촬영을 기다리는 김규리씨에게 소감을 물었다. “오늘 와주신 분들이 정말 고마워요. 좋은 이야기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 저도 함께했지만, 이 영화는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야 완성될 수 있거든요. 상업 영화니까 관객 수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이 문제를 우리 시대에 영화로, 기록으로 남기는 것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4시가 넘어서 공단 장면 촬영이 끝났다. 1분도 안 나오는 한 장면을 위해 사람들은 4시간을 기다렸다. 보조출연자들은 “연기는 자신있는데 조금밖에 안 나왔다”며 아쉬워했지만, “내가 나왔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해야겠다”며 홍보까지 자처했다. 영화는 5월까지 촬영을 마치고 9월 개봉할 예정이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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