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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12 20:43 수정 : 2013.04.12 21:44

지난해 12월 말부터 지난달까지 대구구치소에 있는 최갑복씨에게서 온 편지들. 불교신자인 최씨는 편지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한자어를 자주 인용했다. 최씨는 수감돼 있을 때 한자를 배웠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르포] ‘배식구 탈출’ 최갑복의 편지

▷ 대구 유치장 탈주범 최갑복씨에게 편지 2통을 보내고 최씨한테서 6통을 받았습니다. 가난과 불우한 가정환경, 소년원에서부터 형성된 그들만의 세계까지, 최씨의 인생에서 세상에 흔하디흔한 ‘잡범’과 ‘소년범’, ‘재범’의 얼굴이 스칩니다. 익숙한 환경과 비뚤어진 마음이 잘못된 관용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겠지요. 최씨를 보면 사회가 범죄자를 격리하는 것만이 법의 역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최갑복은
A4용지 수십장에 인생을 적었다
반듯하면서도 절박한 글씨에서
마주한 것은 ‘불편함’이었다
그의 인생은 참 안타까웠고
이해 안됐으며, 때론 화가 났다

지난 10일, 썰렁한 1심 법정
수첩을 든 기자들 대여섯명과
여자친구만이 그를 보러 왔다
“피고인을 징역 7년에 처한다.”
5년을 바랐던 그는 괴로워 보였다
짧은 눈인사 후 입을 앙다물었다

그의 편지를 받았다. 기자는 10분의 면회시간 동안 나눈 대화, 그리고 수사기록을 바탕으로 그에 관한 기사(<한겨레> 2012년 12월29일치 11면)를 쓴 적이 있었다. 그 기사가 그에겐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보도가 이뤄진 다음날(12월30일) 쓴 편지였다. A4 종이 한 장에 서운함과 분노가 묻어났다. 편지의 주인공은 대구경찰서 유치장 탈주범으로 세상에 알려진 최갑복(51)씨. 대구구치소 독방에 수감된 채 1심 판결을 기다리던 그는 여전히 세상에 화가 나 있었다.(편지는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전과 기록 및 나의 성격, 인격에 대해서 기록과는 다를 수 있고 내가 정정당당하게 언론과 인터뷰한 시간마저 없이 한두번도 아니고 사람의 인격을 모욕하여서야 되겠습니까. 나를 아는 자, 나를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이기에 지 맘대로 행할 수 있고, 나는 증거와 객관적 주장들마져 할 기회도 변소마져 없이 계속 당하기만 해서는 불공정한 사회이지요.(중략) 자고로 귀사든 타 방송·신문에서 나를 이야기하는 게 조족지혈에 불과하오니 언제 한번 정식절차(교도소장 허가하)로 접견 한번 소청드립니다.” 화가 난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하고 싶은 말을 하라며 답장을 했다. 지난 1월28일이었다.

다섯살 무렵, 외할머니 위해 훔친 비눗갑

2월 중순 두툼한 편지 세 통을 받았다. 첫번째 편지와 분위기가 달랐다. 이유가 있었다. “1월30일 재판에서 최 기자께서 저를 많이 도와준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진실을 알리고자 애쓴 덕분에 저가 도움받게 된 것이겠지요. 여러므로 저때문에(진실때문) 수고, 고생하심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는 재판장에서 국선변호인이 기사(<한겨레> 2012년 9월29일치 10면)를 언급했다며 “진실은 규명될 것”이라고 했다.

2월5·7·13일에 작성한 세 통의 편지는 총 33장. 그는 ‘부모, 형제에 대하여’, ‘세상에 태어나 최초의 나쁜 짓이란’, ‘학업, 학창시절 등’, ‘신을 부정하지 않는 이유’, ‘새 삶 새 사람’ 등 소제목을 달아 자신의 인생을 촘촘히 적어 보냈다. 3월22일과 27일에도 2~3장의 짧은 편지가 더 도착했다.

반백의 나이에 약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의 삶을 돌아볼 가치가 있을까. 정성이 느껴지는 반듯하면서도 절박한 글씨를 따라 내려가면서 마주한 것은 일종의 ‘불편함’이었다. 태어나 한번도 가정과 사회의 관심과 보호를 받아본 적 없던 1962년생 한 사람의 인생은 안타까웠고, 이해가 안 됐으며, 때로는 화가 났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첫 범죄는 5살 무렵 방물장수가 팔던 플라스틱으로 된 비눗갑을 훔친 사건이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가 객사하고 3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 대신 최씨는 경상남도 고령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가 꼽은 첫 절도의 이유는 가난이었다. 그는 외할머니가 비눗갑을 몇번이나 살펴보다 돈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서자 밤에 방물장수 보따리에서 비눗갑을 훔쳐내 가슴에 품고 잤다고 했다. 어린 최씨에게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쳐줄 어른은 없었다.

“다음날에 외조모님께서는 ‘가난이 너를 도둑으로 만들겠구나!’ 하시면서 저를 안고서 서럽게 우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이것을 칭찬으로 알았습니다. 나의 조막손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떨렸고 심장 고둥소리가 콩닥콩닥 (중략) 두렵고 겁이 난 것이었습니다. 나의 외할머님은 저에게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을 위해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없었겠습니까. 나에게 무서운 매가 있었다면, 결코 오늘에 나는 없었을 일이지요.”(2월5일 편지 중)

친형 최아무개(54)씨 역시 동생의 죄를 ‘가난’과 ‘불우한 성장환경’이라고 생각했다. 행방불명으로 알려졌던 친형은 “사느라 바빠서” 지난 3월 중순께에야 대구구치소에 있는 동생 최씨를 찾아갔다. 1998~99년께 대구에서 형제가 함께 ‘최가네 손짜장’을 운영하다 장사가 안돼 가게문을 닫고 갈라선 지 14년 만이었다. 술을 먹고 면회 간 형은 유리벽 안에 있는 동생을 보고 울기만 했다. 동생 얼굴이 탈주범으로 방송뉴스에 연일 보도될 때는 “누가 알아볼까 집 밖으로도 안 나”올 만큼 형도 마음고생을 했다.

지난 9일 오후 충청남도의 한 도시 외곽에 위치한 중국집에서 만난 형은 여전히 마음고생 중이었다. 요리를 안 할 때는 건설일을 하거나 그마저 못 할 때는 노숙도 해봤다는 형도 삶이 녹록지는 않아 보였다. 주방에서 나온 형의 하얀 조리복에는 양념이 점점이 눈에 띄었고, 왼쪽 가슴에 난 주머니에는 몇 개비 남지 않아 텅 빈 담뱃갑이 들어 있었다. 가족은 없었고, 가게에서 일도 하고 잠도 잔다고 했다. 형은 동생이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다면, 동생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동생이 그렇게 살게 되지 않았을 거라며 눈물을 보이며 말을 꺼냈다.

“동생이 예전에 담배 몇 갑 훔쳐서 (소년원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30년 전에 (동생이) 마늘 두 접을 소쿠리에 가져왔다가 다시 주인에게 돌려줬는데 구속됐어요. 판사들 너무한 것 아닙니까. 자꾸 죄를 만드는 것 아닙니까. (중략) 동생이 뭐 가져오면 외할머니가 혼을 내야 하는데 용납했대요. ‘갖다주니 할머니가 좋아하던데?’라며, 내가 13~14살 땐데 동생이 가게에서 빵조각을 가져와서 내가 혼냈어요. 혼낸 기억은 나는데….” 1976년 17살이던 형마저 요리기술을 배우러 외갓집을 떠나자 최씨는 다시 혼자가 됐다.

이발소의 7천원, 그리고 소년원의 따뜻한 추억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최갑복씨가 성장한 곳은 소년원이었다. 14살 때 처음 접한 교도소 생활을 최씨는 자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했다. 1977년 설 무렵 이발소에서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을 하던 최씨는 주인의 돈 7천원을 훔쳐 도망쳤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자전거를 타고 쫓아오는 주인을 피해 얼어붙은 낙동강에 뛰어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일반적으로 끔찍할 법한 첫 수감생활이 가출 청소년이던 최씨에겐 청소년기의 치기 어린 낭만이 뒤엉킨 ‘따뜻함’으로 다가왔다.

“18~20명의 소년수와 함께 지냈고 한자공부도 시켰습니다. 이불 하나에 5명의 아이들이 덮고 자면서 중간에 잠자는 아이들은 따뜻한 밤을 보냈지요. 저는 그곳에서 만 20일 만에 나오면서 그곳 아이들과 정이 들어서 울면서 나왔습니다.”(2월5일 편지 중)

교화의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다시 사회에 나와버렸다. 1979년 추석 무렵 최씨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현상비용 3천원이 없다는 이유로 또 가출했다. 이후 들락날락한 소년원 교도소에서 싸움을 익혔고, 가진 힘을 자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몸이 자라듯 그의 범죄도 조금씩 자랐다. 큰 범죄는 아니었지만 20~40대 내내 절도와 폭력, 마약 등의 범죄와 관련한 전과가 쌓여갔다. 대구의 한 공원 내 포장마차 운영건으로 쇠파이프가 나뒹구는 싸움을 하고, 수배를 받자 소매치기 친구들에게서 신용카드를 받아 도피자금을 마련하고, 또 대구 내 폭력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약과 도박에 빠져 지냈다. 특히 그는 마약이 “나를 겁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포장마차, 중국집, 댄스학원, 멸치장사 등 최씨가 반성하고 새로 살아보려 시작한 모든 일은 쉽게 끝이 났고, 사귀거나 살림을 차린 여자도 많았다.

최씨는 종종 자신의 과거 범죄를 미화했다. 1990년 여름 대구의 한 금은방을 털어 붙잡혔다가 경찰 호송차에서 쇠창살을 뜯어내고 도주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살았던 사건이 그랬다. “수영선수가 다이빙해서 물길을 뛰어내리듯… 행인들이 박수쳐주어서 힘을 내서… 옥상으로 타잔처럼 뛰어다녔고… 마침 황야의 무법자가 목조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 말안장에 안착하듯이…”라며 자신의 사건을 무협지처럼 포장한 이면에서 경찰, 검찰, 사법부 등 법의 권력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최씨의 편지에 등장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건달, 폭력배, 조폭 주먹 선후배, 소년원 동기들이었고, 수감생활을 반복하면서 돈이 없던 최씨에게는 일자리와 잠자리, 음식을 마련해주는 그들이 “그들보다 이 최갑복을 위하고 챙겨주기는 어렵다”고 말할 만큼 고마운 존재였다.

지난 10일 최씨의 1심 선고 날이었다. 지난해 9월 도주한 최씨가 재검거된 이후 3차례의 공판준비, 국민참여재판 무산, 6회에 걸친 재판까지 오래 끌어온 재판이었다. 그날 최씨의 선고가 이뤄지는 오전 10시 대구지방법원 제11호 법정은 썰렁했다. 가족들의 눈을 피해 몰래 최씨를 면회 다닌 여자친구 이아무개(75)씨만이 법원을 일찍 찾았을 뿐 최씨 지인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수첩을 손에 든 대구주재기자 대여섯명만 법정을 채웠다. 앞서 피의자 4명의 선고가 끝나자 오전 10시14분께 최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옥색 수의에 수갑 찬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최씨가 방청석을 보지 않고 지나쳐 법대를 바라보고 섰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7년에 처한다.”

판결이 다 끝난 10시19분, 최씨는 고개를 떨궜다. 판사는 상습절도(오토바이 절도 등), 준특수강도미수죄,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보복죄, 공기호 위조 및 위조 공기호 행사, 무면허 운전,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훔친 신용카드 사용), 도주죄 등 7개 검찰의 공소사실에 전부 유죄를 선고했다. 자신은 강도가 아니라 야간주거침입죄라던 최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로 최씨가 여러 차례 범죄를 저지른 누범이라는 점, 새벽에 골프채를 들고 노부부의 집에 들어가 준특수강도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수사기관이 피고인을 쫓는 걸 알면서도 도주하면서 절도죄를 계속 저지른 점, 수사기관에 자신을 신고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협박하고 체포된 후에도 억울하다며 도주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등 죄질이 좋지 않은 점, 또 법정에서 변명을 일관하는 등 개전의 조짐이 없는 점, 피해자에 대한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점 등을 들었다.

“절반을 대신 살고 싶다”는 여자친구

법정에 여자친구 이름으로 쓴 탄원서까지 제출하며 5년형을 희망하던 최씨는 괴로워 보였다. 교도관한테 이끌려 법정을 빠져나가던 최씨가 기자와 짧은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떨려 못 보겠다며 문밖에서 기도하고 있던 여자친구 이씨는 결과를 듣고 “내가 절반을 대신 살아주면 안 되느냐.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라면서 눈물을 훔쳤다. 재판 결과에 관심 없다던 형에게서도 재판 결과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형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여러 차례 “죽고 싶다”며 한참을 울었다.

형과 여자친구 이씨가 공통으로 말하는 최씨는 “단순한 사람”, “억울함을 못 참는 사람”이었다. 형과 여자친구는 최씨가 또 혼자 감옥에 수감돼 있어야 할 시간을 염려했다. 형은 독방에서 지내는 동생이 혼자만의 생각에 갇힐까봐 차라리 최씨가 다른 수감자들과 같이 방을 쓰며 교화·사회화될 수 있도록 교도관에게 따로 부탁하기도 했다. 이씨는 최씨가 요즘 부쩍 자주 울고, 자신을 자주 찾는다며 최씨의 정신건강을 걱정했다. 최씨는 항소했다.

“재판 결과를 보고서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입니다. (중략) 교도소생활 중 10건, 20건 이상 고소·고발·진정·소송하였고 (이를 통해) 100명 이상 검찰, 법원에 세운 기록이 있습니다. 저가 무고 처벌이 없었던 것은 오직 진실·사실에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좀도둑질해서 가문과 조상께 부끄러운 자이나, 감옥 중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없이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중략) 어찌든 저는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라서 이렇게 하소연 하는 것입니다.”(3월27일 편지 중)

구치소 독방으로 돌아간 최씨를 면회하고 온 여자친구 이씨는 최씨가 계속 울기만 한다고 전했다. 출감한 이후 그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 ‘비강도’ 최갑복에게 선고된 7년형은 어떤 의미인가. “(유치장 탈주 후 도주 중에) 비바람에 천둥울림 속에서 낙동강 언덕배기 고목나무 위에서 천막 아래 빗방울 맞아가면 가슴조였던 밤. 천둥과 강물보다 그 무엇이 이토록 두려워하였을까. 비자유입니다. 하루 한끼만 먹고 산다해도 자연속에 자유가 좋았습니다. (여자친구를 가리키며) 나에게 부모님이든 형제든 일찍이 만났던 사람들이 이토록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들이었다면 저는 시골에 들어가 땅을 일구며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갔을 겁니다.”(2월13일 편지 중)

대구/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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