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의 실제 인물 신원숙(79)씨가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회관으로부터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넓궤’ 안에서 65년 전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신씨는 제주 4·3 사건 당시 이 굴에서 40여일간을 생활했다.
[토요판/르포]4·3 영화 ‘지슬’ 큰넓궤 현장
▶ 한국 영화 최초로 세계 최대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영화 <지슬>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3만명 가까이 학살된 제주 4·3사건 와중에 동광리 마을주민 120여명이 40여일간 동굴로 피신한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엔 1948년 동굴에 숨었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가족들의 무고한 죽음도 세상에 알리지 못한 채 모진 세월을 산 생존자들이 65년 만에 처음으로 동굴을 찾았습니다.
“이쪽은 바라보기도 싫었어. 나도 여기 65년 만에 오는 거야.”
홍춘호(75·여)씨는 ‘큰넓궤’의 좁은 입구로 발을 내디뎠다. 큰넓궤는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주민 120여명이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 40여일간 생활했던 동굴이다. 최근 화제를 모으는 영화 <지슬>의 배경이기도 한 큰넓궤는 1948년 12월 마을과 산간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던 군인들에게 발각됐다. 군인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민들은 이불과 먹을거리 등 살림살이를 태워 연기를 입구 쪽으로 보냈다. 영화 지슬에서는 주민들이 먹는 고추를 태워 매운 연기로 군인들의 진입을 막는 장면을 보여줬다.
“그때 진짜 고추를 태웠어. 그렇게 쓰려고 준비한 건 아닌데 급한 와중에 누가 아이디어를 낸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다 죽었어.”
칠흑 어둠 뚫고 기어서 박쥐를 스치며…
당시 직접 고추와 이불 등을 태워 군인들의 진입을 막았던 신원숙(79·남)씨는 4·3사건 당시 겨우 14살이었다. 큰넓궤 생존자 중에서 이 마을에 남은 사람은 신씨와 홍씨뿐이다. 큰넓궤에서 40여일간 생활한 마을주민 120여명은 상당수 동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죽었고, 살아남아 모진 세월을 산 사람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주 4·3사건이 잊혀진 상태로 반세기가 지나 어느덧 65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신씨와 홍씨와 함께 지난 27일 오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에서 3㎞쯤 떨어진 큰넓궤를 찾았다.
“이렇게 좁은 줄 몰랐어. 그땐 11살이었으니까 몸도 작았지.” 홍씨는 큰넓궤의 입구를 기어가며 말했다. 큰넓궤는 겉으로 보기엔 산속에 있는 작은 구멍처럼 보였다. 어른 한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입구에서 오리걸음으로 다섯 발자국 걸어가면 동굴은 더 좁아졌다. 더이상 걸음을 뗄 수 없어 기어가는 자세로 바꿨다. 제주도 특유의 거친 현무암이 무릎 관절을 할퀴었다. 이렇게 5~7m를 지나자 2m 정도 높이의 절벽이 나왔다.
신씨는 “이 절벽을 내려가면 안쪽에 동굴이 쭉 뻗어 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입구 쪽에 살았고, 나중에 온 주민들은 동굴 안쪽에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절벽 밑으로 조심스레 내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불빛으로 비추자 자욱한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동굴 벽에는 거꾸로 매달린 박쥐들이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조심스레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머리카락에 박쥐가 스치는 것 같은 스산한 느낌이었다. 불빛을 가까이 비춰도 박쥐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 한쪽에는 깨진 항아리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홍씨는 당시의 기억을 꺼냈다.
“항아리에 살림살이를 담았지만 먹을 건 별로 없었어. 지슬(감자)이나 고구마, 팥, 조 등으로 하루에 한 끼나 먹었을까.” 홍씨의 동생들은 동굴에서 내내 아팠다. “먹는 게 변변치 않은데다 공기도 안 좋으니까 남동생 셋 중에 둘이 너무 아팠어. 계속 기침을 하는데 사람들이 구박해서 제대로 티도 못 냈어. 동굴에서 나와 산속으로 도망친 지 얼마 안 돼 동생 둘이 죽었어. 너무 끔찍해서 그 이후로 이쪽은 쳐다보기도 싫어.”
제주도 서남부 한라산 중산간지역에 자리잡은 동광리 마을은 1948년 가을까지도 제주 4·3사건에서 한발 비켜서 있었다. 이 마을에 학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기는 그해 10월이었고, 결정적인 계기는 무장대를 토벌하러 온 9연대의 송요찬 연대장이 내린 포고령이었다. 송요찬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내각수반(국무총리)을 역임했고, 1970년 인천제철 사장, 1980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맡았던 대표적인 3공, 5공 인물이다. 송요찬은 1948년 10월17일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곳을 통행금지 지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을 드나들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후 국군 토벌대는 중산간지역의 마을을 불태우고 무차별 학살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다. 이를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 서종철 당시 부연대장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서종철 당시 부연대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토해양부 장관을 맡고 있는 서승환 연세대 교수의 부친이기도 하다.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동광리 마을의 사람들은 당시 포고령 내용을 알지 못했다. 신씨는 “그때야 통신도 없고, 그런 포고령이 내려진 줄도 몰랐다. 갑자기 군인들이 올라와서 사람들 죽이니까 도망치기 바빴다”고 털어놨다.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군을 피해 도망가게 된 계기는 1948년 11월14일에 발생한 ‘무등이왓 학살사건’이다. 신씨는 당시 학살사건을 설명했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마을 3㎞ 걸어가 만난 동굴 ‘큰넓궤’ 학살 피해 도망온 주민 120명 40일간이나 숨죽여 지낸 곳 두 생존자 홍춘호·신원숙씨가 65년만에 그 현장을 찾았다토벌군 내쫓은 그날 밤 살기 위해 동굴을 떠났다 볼레오름으로 갔던 이들은 발자국이 남아 모두 죽었고 미오름으로 갔던 이들은 눈에 발자국이 덮여 살았다정방폭포에서 파도 너머 떠밀려간 시신들
“군인들이 높은 사람 연설하니까 마을 중심의 밭으로 나오라고 했어. 그때 노인들이 주로 나갔고, 경찰을 아들로 둔 이장의 친척도 갔는데 모두 무자비하게 얻어맞고서 총살을 당한 거야.”
제주 지역신문인 <제민일보>는 무등이왓 학살사건에서 총 9명이 죽었다고 1989년 4월3일에 보도했다. 학살사건이 발생하고서 마을사람들은 낮에 산속으로 몸을 피했고, 밤에 마을로 내려와 먹을거리를 챙겼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밤에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군인들에게 잡혀 수십명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가 다 불탔어. 그땐 제주도 하늘이 벌겠어. 여기저기 산간부락이 다 불타서.”
홍씨는 학살사건이 있고서 20일쯤 뒤에 마을이 불탔다고 전했다. 불타기 전에 동광리에는 ‘무등이왓’, ‘삼밧구석’, ‘조수궤’, ‘간장’ 등 4개의 마을이 있었다. 무등이왓에는 가장 많은 100여가구가 살았고, 삼밧구석 40여가구, 조수궤 10~15가구, 간장마을에 5가구 정도가 거주했다. 신씨와 홍씨는 불타기 전에 무등이왓 마을에 살았지만, 지금 동광리에 남은 마을은 ‘간장’ 마을뿐이다.
마을이 불타자 주민들은 처음엔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라산은 겨울을 맞고 있었고, 토벌군의 초토화작전도 더 심해졌다. 주민들에겐 안전하고 따뜻한 대피처가 절실했다.
“몇몇 마을 어르신들이 큰넓궤라는 큰 동굴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어. 거긴 일제 때 미군 폭격기들이 상공에 돌아다닐 때도 안전한 곳이란 소문이 돌았지. 마을 사람들 하나둘씩 큰넓궤로 모였어.”
동광리 마을에 살면서도 큰넓궤를 쳐다보기 싫어 65년간 단 한번도 찾지 않았던 홍씨는 오히려 굴속에서 말이 많았다.
“40일 동안 한번도 밖에 못 나갔어. 어른들은 망을 보거나 밥을 지으러 나갔다 오곤 했는데 어린애들은 밖에 못 나갔지. 동굴 안에 있으면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도 몰라. 얼마나 하늘이 보고 싶고 바람이 쐬고 싶던지.”
동굴 안에서는 먹을거리도 변변치 않았다. 홍씨는 “지슬(감자)도 먹긴 했는데 그보단 팥이랑 조로 밥을 쪄서 먹었다. 토벌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밤에 바깥의 작은 굴에서 밥을 쪘다. 물도 거의 구하기가 어려워 동굴 벽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셨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큰넓궤에 들이닥친 것은 영화 <지슬>에선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주민들에겐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굴 밖에서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젊은 사람 한명이 토벌군에게 붙잡혔는데 군인들이 마을사람들 위치를 알려주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어. 결국 군인들이 그 사람을 앞세워 큰넓궤에 들이닥쳤지. 하지만 그 사람이 어두운 내부 지리를 잘 아니까 굴 안으로 재빨리 도망쳐서 우리에게 토벌군이 왔다고 알려줬어. 그리고 동굴 안 사람들이 재빨리 불을 피워서 입구로 연기를 흘려보냈고, 해 질 때쯤 군인들이 입구를 돌무더기로 막아버리고 산을 내려갔지.”
신씨는 토벌군이 하산하자 굴 밖에 있던 주민들이 동굴 입구를 다시 열어줬다고 전했다.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밤사이 좁은 입구를 기어서 한명씩 모두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시 한라산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가 12월이라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어. 굴 밖에 나오니까 사람들 모두 덜덜 떨고 동상 걸릴 판이야. 그해 겨울 한라산에 유난히 눈이 많이 왔지. 울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다고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울고불고하며 도망가자고 사정했어.”
큰넓궤를 빠져나온 동광리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간 곳은 큰넓궤에서 10㎞ 정도 떨어진 볼레오름이었다.
“볼레오름이 굴이 많고 오름이 커서 거기 가면 살 수 있다고 많이들 갔어. 그런데 오히려 발자국이 많이 남아서 토벌군이 뒤쫓아갔지. 거기서 수십명 죽었어. 우린 미오름으로 갔는데 거긴 발자국이 금방 눈으로 덮어져서 발각되지 않았고, 한 20일 정도 더 산속에 숨어 있다가 계엄령 해제되고서 산에서 내려왔어.”
볼레오름에서 붙잡힌 동광리 주민들은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1월22일 서귀포시 정방폭포 부근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86명 가운데 동광리 주민은 40여명으로 알려졌다. 바다와 이어진 정방폭포에서 사람들의 시체가 파도 너머로 떠밀려갔다. 유족들은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고, ‘헛묘’를 동광리 마을 곳곳에 만들었다. 헛묘는 시체를 묻지 않은 묘라는 의미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는 거야?
제주 4·3사건은 살아남은 자에게도 한을 남겼다. 신씨와 홍씨는 1948년 12월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서 산에서 내려왔지만, 그들을 기다린 곳은 수용소였다. 홍씨는 “수용소에서 여름까지 살다가 석방이 됐다. 그리고 갈 곳이 없으니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벌어먹고 살았다”고 전했다. 신씨는 “수용소에서 몇달 생활하고 전분공장으로 보내졌다. 거기에서 몇달 일하다가 소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다. 학교 가서도 교우들이 ‘산(山) 폭도새끼’라고 왕따를 시키는데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14살에 4·3사건을 겪은 신씨는 23살이 되어서야 고향 동광리로 돌아왔다. 홍씨도 21살 시집가면서 동광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자리잡은 곳은 기존에 살던 ‘무등이왓’ 마을이 아닌 ‘간장’ 마을이었다. 신씨는 “무등이왓이 산과 가까워 다시 군인들이 와서 죽일까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지금도 무등이왓 마을 어귀엔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연좌제의 피해도 컸다. 신씨는 “자녀들이 6명 있는데 공무원 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시험도 못 보니까. 연좌제 때문에 출세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홍씨는 “우린 무장대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 가족인데 연좌제로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 4·3 진상보고서’에는 “제주도 경찰, 행정당국이 5만여명의 4·3사건 관련자 가족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며 각종 신원조회의 근거자료로 활용했다”고 적혀 있다.
고향에 돌아와 농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신씨가 ‘제주 4·3사건’을 말할 수 있게 된 시기는 2000년 1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이후다. 신씨는 “특별법이 만들어졌을 때 정말 기뻤다.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하게 4·3 위령제에 찾아오셨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오는 거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당시 제주 4·3 문제 해결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공약집에 관련 내용은 단 다섯 줄이다. 공약집을 보면 “제주도민의 아픔이 모두 해소될 때까지 계속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4·3사건 추모기념일 지정’과 ‘제주4·3평화재단 국고지원 확대’를 약속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올해 4월3일이 다가오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공약과 관련된 어떤 발언이나 실행도 한 적이 없다. 이런 와중에 영화 <지슬>이 3월21일 개봉해 1주일 만에 관객수 4만명을 돌파했다. 독립영화로선 이례적인 기록이다.
큰넓궤의 생존자인 홍씨는 영화가 현실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고 표현했다.
“영화 나오고 사람들이 관심 갖는 것은 고맙지만, 영화는 우리 얘기를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어. 우리가 겪은 것들은 더 참혹하지.”
홍씨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런 영화가 나오고 세월 많이 흘렀네요.”
홍씨가 답했다. “에이그, 사는 게 사는 거라? 살암시난 살았주(살다 보니까 살았지).”
제주/글·사진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관련영상] 지슬의 주민배우들 (엔딩크레디트 세줄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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