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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01 19:21 수정 : 2013.03.01 20:31

지난 27일 서울 서초동 에이치아르디(HRD) 아카데미에서 열린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남편들이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과 함께 ‘좋은 남편 십계명’을 만들며 실천을 약속하고 있다.

[토요판] 르포/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가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배들의 조언을 구하려고”
“아내가 신청하는 바람에” 모인
기혼남 19명과 미혼남 1명

좋은 남편이란 대체 뭐기에…
정의 내리고 행동강령도 써 본다
돈과 능력, 사랑도 되는 남자?
정답은 내 아내만 알고 있다?
첫 모임 2시간이 훌쩍 지나고
저마다 앞치마 하나씩을 받았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셔서
이 앞치마를 잘 활용해 보세요”

▶ 40대 중반의 한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가족 문제를 다룬 책들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행복을 가족 안에서 찾고 싶어서”라는군요. 정작 아내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지 오래.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까요. 그는 지난 27일 아내 몰래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았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서서히 행동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군요. 행복으로 가는 첫발을 내디딘 그를 응원합니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만 그득한 강의실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난 27일 저녁, 서울 서초동의 한 강의실. 6개 테이블에 거리를 두고 앉은 남자들이 샌드위치를 묵묵히 씹어 넘기고 있었다. 대부분 초면인 듯, 데면데면한 남자들의 두 눈은 강의실 정면에 걸어둔 대형 스크린에 붙박인 듯했다. 스크린 안에선 한 방송사의 아침 강연 프로가 한창 재방영되고 있었다. 강연을 보며 간단한 요기를 하는 새, 또다른 남자들이 뒤늦게 강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퇴근길을 서두른 듯,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가쁜 숨을 고르며 의자에 앉았다.

아들 따라 왔더니 이런 자리였어?
“잠시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마흔개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이 자리를 마련한 강학중 소장(가정경영연구소)이었다. “회사 일 때문에, 재미있는 다른 일 때문에 바쁠 텐데도 시간을 쪼개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은 이미 좋은 남편이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결혼 32년차, 두 자녀의 아버지기도 한 강 소장이 반갑게 환영 인사를 했다. 스무명의 낯선 남자들은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자”며 강 소장이 띄운 방을 보고 모인 이들이었다. 그제야 스무명의 남자들은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멋쩍은 첫인사를 나눴다.

2011년, 마흔넷 나이로 ‘늦깎이 남편’ 대열에 합류했던 코미디언 최형만씨가 본격적인 모임에 앞서 ‘분위기 풀기’에 나섰다. “일본에 유명한 자살 바위가 있답니다. 자살하는 남자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이런 문구를 찾아서 써 붙였답니다. 그 문구 내용이 뭐냐, 바로 ‘아내를 생각하라’는 것이었답니다. (잠시 침묵)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자살 인구가 2배로 늘어났답니다.” 큭큭, 간헐적으로 작은 웃음이 터져나오긴 했지만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웃겨보려고 했는데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네요.” 최씨가 멋쩍게 물러나 표현도, 웃음도 서툰 남편들 사이에 섞여 앉았다.

자, 이제 본격적인 모임의 시작.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됐는지 얘기를 좀 나눠볼까요?” 강 소장의 진행에 따라, 3~5명씩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얘기가 시작됐다. ‘남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나이나 직업처럼 제각각이었다.

결혼 18년차,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는 50대 남편은 “주위에서 부부의 이혼으로 집안이 콩가루가 되는 걸 보고 위기의식을 느낀 게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7년을 사귀고 21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아내를 잘 모르겠다” “아내와 사이가 나빠 각방을 쓰고 있다”는 고민을 하고 있는 또다른 50대 두 남편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가족을 지킬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육아휴직 중이라고 밝혀 이목을 집중시킨 30대 남편도 있었다. “육아휴직 이후 처음으로 남편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이 어떤 것이구나 이해하게 됐어요. 두 달 뒤 회사업무에 복귀하고도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왔어요.”

참석자 전원이 ‘기혼자’였던 건 아니다. “부부간의 갈등 문제, 황혼이혼까지 늘어나는 세태를 보면서 결혼이 망설여졌다”는 한 30대 미혼남은 “결혼한 선배님들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며 모임 참석 이유를 밝혔다. “결혼도 안 했는데도 어떻게 하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니, 결혼하면 얼마나 잘 살지 부럽습니다.” 강 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혼자 오기가 쑥스러워” 직장 후배까지 끌고 왔다는 40대 중반의 남편도 있었고, 결혼 10년차라는 또다른 40대 남성은 “아내가 신청을 하는 바람에” 등떠밀려 온 경우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도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어제까지도 여기에 올 생각은 없었는데… (이왕 온 것) 내가 과연 좋은 남편이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결혼 38년차의 60대 남편은 “이런 자리인 줄 모르고” 아들 손에 이끌려 와 “당황스럽다”고 쑥스러워했다. “어머니께서 저한테도, 아버지께도 도움이 될 거라며 신청하셨어요. 여기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께는 어디 간다는 얘길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고요.” 결혼 1년차로 곧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그의 아들 얘기에 아버지는 물론 참석자들까지 함께 웃었다.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자 강의실의 어색했던 공기도 한층 가벼워진 듯했다.

남편 10계명의 개정판을 만들어라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아내와 남편은 어떤 역할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며, 갈등하는가.’ 자기소개가 끝난 뒤 강 소장의 ‘짧은’ 강연이 진행됐다. 강연이 짧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론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없고 스스로 답을 찾는 게 중요하니까요.” 강 소장은 다시 참석자들에게 공을 넘겼다. “그렇다면 좋은 남편이란 어떤 남편일까요. 우선 각자 써본 뒤 조별로 의견을 취합해 발표해주세요.”

강 소장의 말이 떨어지자 맨 앞줄 왼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남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직장 선배의 손에 이끌려 왔다던 남편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육아휴직남’이 번호까지 매겨가며 쓱쓱 내려가는 것과는 달리 그는 영 진도를 빼지 못했다. ‘좋은 남편이란 무엇인가?’ 질문만 적어놓고 밑줄만 쳐댔다. 고민이 된다는 듯, 머리 위에 얹어진 그의 왼손에는 이제는 반짝임이 덜해진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뭔가를 써내려간다. 그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어지는 조별 발표 시간. “발표실력이 없어 떨린다”며 첫번째 조 대표가 취합된 내용을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남편은 돈도 있고, 능력도 되고, 사랑도 주는 남자겠죠.” 그런 조건을 다 채우려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강의실에서는 쓴웃음들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역으로 어떤 남편이 나쁜 남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1조의 남편들은 “거짓말을 반복하는 남자, 도박이나 음주 등 실수를 반복하는 남자, 개인 생활에 치우쳐 가족에겐 무관심한 남편”을 나쁜 남편으로 꼽았다.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가정을 부양하는 능력을 가져야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라는 의견이 고루 나왔다. “자녀양육에 관심을 많이 갖는 남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남편” “감정의 소통을 잘하는 남편” “경청해주는 남편” “가사 분담을 잘하는 남편” “처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편” “강압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남편” 등 참석자 수만큼 많은 정의들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아내가 생각하는 좋은 남편이 어떤 남편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좋은 남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심판관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들의 아내니까요.” 발표가 끝난 뒤 강 소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아내가 원하는 걸 잘하는 ‘플러스(+) 전략’도 중요하지만, 때론 아내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마이너스(-) 전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내에 따라서, 꽃 선물을 해주는 것보다 술 마시지 않고 일찍 들어오는 게 더 좋은 점수를 얻는 방법일 수도 있어요.”

뒤이어 강 소장이 정면 스크린에 ‘남편 10계명’을 띄웠다. 아버지를 모시고 온 새신랑을 비롯해 그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던 남편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남편 10계명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았다.

남편 10계명의 내용은 이랬다. ‘1. 아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자. 2. 집안 문제를 아내와 공유하고 상의하자. 3. 사랑과 감사를 말과 행동으로 자주 표현하자. 4. 아내의 얘기를 경청하고, 공감해주자. 5.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자. 6. 가사를 분담하자. 7. 자녀의 양육에 한 팀이 돼 동참하자. 8. 처가 식구를 챙기고 배려하자. 9. 아내의 욕구를 읽고 배려하자. 10. 부부공동의 꿈과 미래를 공유하자.’ “이게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제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새로운 개정판을 하나 만들어주세요.”

30대에서 60대까지. 지난 27일 서울 서초동 에이치아르디(HRD) 아카데미에서 열린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한 스무명의 남편들은 3~5명씩 모여 앉아 과연 ‘좋은 남편’은 어떤 남편일지 의견을 나누고 있다.

다음 주제는 가사분담, 다시 만납시다
강 소장의 말에 남편들이 손을 들고 이런저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그냥 10계명이 아니라 좋은 남편 10계명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가사를 분담하자는 내용을 ‘남편 스스로 집안일을 하자’로 바꾸죠?”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자는 말을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자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내를 험담하지 말자는 내용을 추가합시다!”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주자는 내용도 포함하죠.” “그러다 안 돌아올 수도 있어요. ‘적당히’ 주자로 해야 해요.” 익살맞은 보충 의견에 강의실에선 큰 웃음이 터졌다. 강 소장이 말했다. “꼭 10계명일 필요는 없어요. 13계명일 수도 있고, 더 줄여도 좋습니다. 우리 아내가 나에게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생각해보고 그중 2~3가지라도 제대로 지키자고 다짐하자는 것이니까요.”

첫모임 2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덧 시계는 밤 9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 소장은 스무명의 남편들에게 ‘좋은 남편’이라고 적힌 주홍색 앞치마를 선물했다. “이 모임의 목표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오늘 각자 집으로 돌아가시면 이 앞치마를 좋은 용도로 활용해주세요.”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스무명 남편의 마음속엔 ‘행동’의 씨앗이 싹을 틔웠을까? 직장 후배를 끌고 왔던 40대 남편의 얘기를 들어봤다.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하는 아내가 불만이었어요. 그렇지만 아내의 그런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마음속으로 새겼어요. 그렇지만 모임 한번 참석했다고 단번에 달라지기야 하겠어요? 서서히 달라지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참석할 생각이에요.”

이날 첫발을 뗀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3월29일(금) ‘가사분담’을 주제로 2차 모임을 여는 등, 매달 한차례씩 모임을 이어갈 예정이다. 문의 전화 (02)733-3747.

글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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