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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22 20:32 수정 : 2013.02.22 21:15

전남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묘량중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나와 환호하고 있다. 이 학교는 2009년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죽어가던 마을까지 살리고 있다.

[토요판] 르포 / 영광 묘량면의 두 학교 이야기

▶ 전남 영광군 묘량면은 두 개의 마을로 나뉜다. 학교를 지킨 마을과 학교를 포기한 마을이다. 9년 전 학교를 포기했던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후회한다. “학교가 문을 닫으니, 마을도 죽어가네요.” 하지만 때는 늦었다. 다시 학교를 살릴 길이 없다. 다행히 학교를 지켜낸 마을에서는 해마다 학교운동장에서 큰 잔치를 벌인다. 아이 울음소리도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렁! 낡은 승합차 시동 거는 소리가 요란하다. “스쿨버스도 없어요. 폐교 대상이라고…. 이 고물로, 제가 아이들을 매일 실어날라요. 그래도 보물단지죠. 우리 학교를 살렸잖아요.” 권혁범(40)씨는 하루 네차례 ‘비인가 스쿨버스’를 운행한다. 아침 등교 한차례, 오후 하교 때에 세차례 운전대를 잡는다. 2010년에 10년 된 고물 승합차를 680만원에 들여왔다.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아이들을 통학시킨 지 꼬박 3년, 10만㎞를 더 달렸다. 권씨는 2007년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으로 귀촌했다. 6학년 민하와 3학년 민혁, 두 아들의 학부모이고, 아이들이 다니는 묘량중앙초등학교의 학교운영위원장이다.

고물 봉고차, 기적을 싣고 달리다

4일 오후 4시30분. 방과후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15인승 고물 승합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을 빼곡히 태우고 묘량면과 영광읍내를 한바퀴 돌았다. 유난히 잦은 폭설에 도로 곳곳이 패어 있었다. 그때마다 고물 자동차가 요동을 친다. 도동리 주공아파트에 이르자, 1학년 동갑내기 대민이와 호령이가 내렸다. 권씨는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횡단보도 건너까지 바래다주었다. 단주리에 사는 2학년 수빈이와 유치원생인 수영이 자매가 마지막이다. 엄마의 우유대리점 가게 앞에 내려주고 돌아오니, 5시5분이었다. 권씨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여민동락공동체’의 일을 잠시 처리하다가, 6시에 맞춰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 8시, 그때까지 돌봄교실의 프로그램을 즐기던 아이들을 싣고 막차를 달린다.

“아침에는 봉고차 말고도 3대가 더 동원돼요. 아내가 카니발을 운전하고 모닝 경차 1대도 나서죠. 교감선생님은 매일 읍내 아이 4명을 태우고 등교하세요. 덜커덩거리는 고물 봉고차를 굴리자니, 마음이 늘 불안해요. 안전 문제가 신경쓰이죠. 차량 보조교사도 없고요. 교육청에서는 지금까지 나 몰라라 했어요. 우리 학교가 폐교 대상이라는 거죠. 통학버스 지원 근거와 전례가 없고 예산도 없다는 거예요. 늘 그래요. 이제 아이들이 늘어나고 안전 문제가 커지니까, 스쿨버스를 내준다고 하네요.”

묘량면 영양리의 정현용(70)씨가 큰 목소리로 거들었다. “이 사람들, 죽을 고생 했습니다.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지나요? 몽땅 뒤집어써야 하잖아요. 기름값도 자기가 다 부담해요. 그런데도 계속하더라고요. 정말로 큰일 했지요. 학교 살리고 마을을 살렸어요. 올봄에 스쿨버스 들어오면 마을잔치 벌일 겁니다.” 시골 학교에서 스쿨버스가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운전기사가 딸린 학교 전용차량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 태워서 맘껏 견학 보낼 수 있잖아요.”

전교생이 14명까지 줄어들어
2009년 폐교 위기였던 묘량중앙초
학부모와 주민들이 똘똘 뭉쳤다
여민동락공동체가 앞장을 서
아이들 나를 승합차부터 구했다

학생이 20명대로 줄어들자
2004년 폐교를 결정한 묘량초
읍내 큰 학교로 보내면 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결정했지만
막상 사라지자 “이건 아니구나”

2009년 8월이었다. 교육청의 통폐합 예정 공문이 날아왔다. 묘량중앙초는 초·중·고교를 통틀어 묘량면에 단 하나 남은 학교. 전교생은 이미 14명으로 줄어 있었다. 6학년이 졸업하는 이듬해면 12명으로 더 쪼그라들 최악 상황이었다. 우리나라 전국의 면은 모두 1205개. 교육당국의 ‘방조’ 속에, 분교 하나도 없는 면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14개에 이르렀다. 묘량면이 학교가 없는 15번째 면으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악순환은 더 큰 악순환을 불렀다. 교사들은 명예퇴직한 60대 전후 고령자들로 채워졌다. 교사의 열의가 없으니, 학부모들이 학교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마을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읍내 학교로 아이를 보내거나 아예 도시로 떠나는 이삿짐을 쌌다. 운동장의 놀이시설은 녹이 슨 채로 방치되고, 5년이 지나도 컴퓨터는 새것으로 교체되지 않았다. 아이들 식사가 좋을 리 없었다. 이웃 학교 것을 배달받으니, 국물이 식기 일쑤였다. 스쿨버스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묘량중앙초는 ‘안락사’의 꼭짓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학부모와 주민들이 통폐합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다행히 100% 반대 의견이 모아졌다. 두 아이가 있는 권씨는 “학교를 꼭 살려야 한다”고, 통폐합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 김강선(38)씨와 계약직 교사 생활을 접고 2007년부터 농촌에서의 이모작 인생을 막 시작한 터였다. 부부는 묘량면에 정착하기 위해, 임용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묘량면에 여민동락공동체라는 비영리 단체를 세워 어렵게 이모작 인생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학교를 없앤다니요? 기가 찼습니다. 학교가 없어지면, 다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잖아요. 아이들을 학교에 끌어들이자면, 통학차량 운행이 가장 시급하더군요. 우선 공동체 예산으로 고물 봉고차라도 구입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일을 저질렀지요.” 김강선씨는 “학교 없는 마을이었다면, 귀촌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똘똘 뭉친 학교운영위원회는 세차례나 꼼꼼하게 학부모의 욕구조사를 했다. 저녁 8시까지 완전 개방하는 돌봄교실을 운영하기로 마음을 모으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농촌의 엄마들은 논밭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무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학교 돌봄교실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최근 귀농한 이영윤(오른쪽)씨의 가족과 김병상(왼쪽)씨 가족이 묘량중앙초등학교 교감실에서 지역사회 학교 운영 방안에 대해 밝히고 있다. 김씨는 묘량초등학교가 문을 닫은 뒤 3명의 자녀를 영광읍에 있는 영광초등학교로 통학시키고 있다.

덩치 큰 학교가 부럽지 않은 돌봄교실

주민들의 뜻이 모아지자, 기적이 일어났다. 2010년의 학생 수가 1년 전보다 크게 늘어났다. 23명이나 됐다. 영광읍내 학교로 아이를 입학시키려던 마을 주민들을 설득했다. 3명이 읍내 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묘량중앙초로 돌아왔다. 읍내 학생 전학도 유치했다. 2011년에는 학생 수가 18명으로 잠시 줄어들었지만, 지난해에는 33명으로 두배 가까이 급증했다. 올 2월에는 3명이 졸업했지만, 3월 입학생이 11명이나 된다. 다음 학기 전교생이 41명으로 또 불어난다. 학생 수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교육의 질을 높이는 선순환의 시동이 걸렸다. 2009년 3개까지 줄었던 학급 수가 지난해 2학기부터 6개 학급으로 늘어났다. 학년별로 1개 학급씩, 정상적인 편성이 가능해졌다. 주민들의 열성은 의욕 넘치는 젊은 교사의 충원으로 이어졌다. 30~40대의 젊은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열정적인 성향숙(51) 교감의 합류도 큰 힘이 됐다. 성 교감은 전임지인 여수에서 작은 학교를 살려낸 경험이 있다.

“부모가 희망하면 아이들을 저녁 8시까지 모두 맡아줍니다. 전교생 1인 1악기는 기본이고요. 영어와 미술, 탁구, 마술, 한지공예 등 14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제과제빵 수업은 학부모의 재능기부를 받고 있습니다. 영광읍내 학교도 돌봄교실이 있지만, 우리 학교와 비교할 수 없어요. 그 학교는 전교생이 1천명이 넘잖아요. 우리처럼 일대일로 아이들을 보살필 수 없지요.” 성 교감의 자랑이다. 이영철(31) 교무부장은 아예 학교 관사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전교생의 절반은 영광읍에서 옵니다. 우리 묘량중앙초가 작지만 내실있는 학교라는 장점을 잘 살리고 있거든요. 이제는 따로 알리지 않아도 부모들이 우리 학교를 찾아옵니다. 밤늦게까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게 큰 즐거움이에요.”

묘량면은 가운데 동서로 뻗어 있는 장암산을 경계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묘량중앙초가 있는 북쪽 덕흥리, 삼효리, 운당리, 영양리의 옛 묘장면 지역과 삼학리, 월암리, 연암리, 신천리가 있는 남쪽의 옛 황량면 지역이다. 묘량면은 일제 때 묘장면과 황량면이 합쳐지면서 생겨났다.

묘량면의 귀농·귀촌 가구는 묘량중앙초가 있는 주변 지역(옛 묘장면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 2004년 이후 18가정이 근처 마을로 들어와 새로 정착을 했다. 최근 묘량중앙초의 평판이 좋아지면서, 입학 예정 학생 수도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다. 최근의 한해 3~4명에서 2017년에는 6명, 그 뒤로도 아이들 수의 증가가 예상되고 있다. 옛 묘장면 쪽의 공식 인구 또한 2009년 1185명에서 올 1월 말 1184명으로 줄지 않고 있다. 비공식 집계로는 이미 이 지역 인구가 1190명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묘량중앙초 근처 마을에서는 살 집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이영윤(43)씨는 아내 박정선(40)씨와 함께 2010년에 삼효리의 고향 마을로 귀농했다. 묘량중앙초에 바로 인접한 마을이다. “서울에서 20년 살다가 농사지으려고 고향에 내려왔어요. 아이들한테 시골이 좋다고 늘 생각했지요. 6살 유진이는 묘량중앙초의 병설유치원에 다니고, 4살 원희는 내년부터 유치원에 들어가요. 유치원에서 유진이를 4시까지 돌봐줘요. 집에 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동생과 바깥에서 뛰어놀다가 일찍 잠이 들어요. 초등학생이 되면 아이들이 집에서 걸어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대안학교가 별건가요. 우리 마을의 작은 학교가 바로 선망하던 대안학교더라고요. 우리 식구 모두 행복해요.” 아내 박씨는 유치원 대표로 학교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교사와 많이 접촉하고 매사 의논껏 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아이들도 학년 대표로 참석해, 방과후 프로그램 정할 때 자기 의견을 내놓아요. 학교가 없었다면 아무리 고향이라도 귀농은 꿈을 못 꿨겠죠.”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묘량초교는 학생 수가 감소해 2004년 문을 닫았다. 묘량초교 폐교 이후 같은 묘량면이지만 묘량중앙초교가 있는 장암산 반대쪽 마을에는 귀농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묘량초 학부모 “폐교만 생각하면 가슴 아파”

같은 묘량면이지만 장암산의 반대쪽(옛 황량면 지역)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아이 울음소리는커녕 10년 전부터 귀농·귀촌의 발길조차 끊어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 앞으로 더 적막해질 것이라고 한탄한다. 지역에 하나 남아 있던 묘량초등학교가 2004년에 폐교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때 이후 귀농·귀촌은 고작 3가구에 그쳤다. 초등학교 입학 예정자는 올해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단 2명(옛 묘장면 쪽은 21명)에 불과하다. 2014년과 2017년에 각 1명이고, 나머지 해에는 마을 전체를 통틀어 하나도 없다. 10명 남짓 아이들이 영광읍내 초등학교로 통학하고 있지만, 이마저 몇년 지나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갈 것 같다. 이 지역의 인구는 2009년 787명에서 지난해 말 759명으로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아이가 없고 도시 사람도 찾지 않는 죽은 마을이 돼가고 있다. 학교의 존폐가 마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묘량중앙초 4개리 주민은 1184명
귀농·귀촌 인구가 몰려들고
읍내서 전학오는 학교가 되면서
올해 전교생은 41명까지 늘었다
집 구하기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묘량초 4개리엔 759명이 산다
5년간 입학예정자 단 2명
“학교가 없어지니 다 없어져요
귀농·귀촌 발길 뚝 끊기고
죽은 마을이 되어가고 있어요”

폐교된 학교 근처에 사는 김병상(46)씨는, 2004년의 폐교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때 큰아이가 5살이었어요. 그 아래가 4살, 2살이었죠. 전교생 20명대로 줄어든 마을 학교를 폐교하자는 게 마을 사람들의 중론이었어요. 영광읍의 큰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죠. 그거는 아니다 싶었지만, 제가 후배다 보니까 목소리를 못 냈어요.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6학년, 5학년, 3학년인데, 영광읍내 학교를 다녀요. 많이 불편하지요. 학교에서 통학차량이 늦기라도 하면, 아이는 운동장에서 나뭇가지로 동그라미 그리면서 무작정 기다려야 해요. 궂은 날 운동장에서 비 맞으며 방치된 적도 있었어요. 방과후 프로그램이 자리잡히지 않은 학기 초에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요.” 김씨와 아내 김진숙(45)씨는 풍성하고 알찬 돌봄교실을 운영하는 묘량중앙초의 활기가 못내 부럽다. “2~3년 사이 묘량중앙초의 돌봄교실 프로그램이 참 좋아졌어요. 우리 아이도 묘량중앙초로 전학시키고 싶지만, 아이가 원치 않아서 억지로 못해요.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하잖아요. 2004년까지만 해도 월암리의 청년회원이 33명이었는데 지금은 6명으로 줄었어요. 그때만 해도 묘량면 청년회원의 다수가 우리 마을(옛 황량면) 쪽 사람들이었어요.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었지요. 우리 마을 쪽으로는 아이 데리고 귀농하는 사람도 없어요. 학교 없어지니까 모든 게 다 없어진 것 같아요.”

폐교된 묘량초의 동문인 강명원 묘량면장도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폐교된 묘량초 근처에는 앞으로 20년 뒤면 마을마다 한두 가정만 남을지 몰라요. 삼학리에는 가장 어린 아이가 고3이에요. 마을이 죽어가는 겁니다. 2004년 폐교 때는 다들 학교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생각 못했어요. 막상 없어지고 나니까, 이거는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거죠. 학교가 있어야, 귀농이든 귀촌이든, 사람 들어오게 할 것 아닌가요? 학교라는 게 한번 없어지고 나면 다시 살릴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들이 있어야 학교를 다시 세우자고 외치기라도 할 텐데…. 학교가 없으니 아이가 없고, 아이가 없으니 다들 학교 세우는 데에 관심조차 없어지는 거예요. 마을 전체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전남 곡성군의 인접한 두 고장, 목사동면과 죽곡면에서도 ‘묘량면의 두 마을’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주민들의 동의로 학교가 없어진 목사동면의 인구는 2005년 1850명에서 지난해 말 1535명으로 17%나 줄어들었다. 멀리 통학하는 초등학생 아이 때문에 목사동면으로 귀농해 놓고도 근처 면에 다시 방을 얻어 지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겨났다. 목사동면과 강을 사이에 둔 죽곡면은 인구 감소가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2005년 이후 마이너스 10% 정도로 선방했다. 2005년 주민들이 학교 통폐합을 막은 덕분이었다. 귀농·귀촌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 묘량로에 자리잡은 지역생활공동체 여민동락.(위) 묘량중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여민동락공동체의 통학차량을 이용해 귀가하고 있다.

작은 학교의 존재는 농어촌 마을의 실핏줄

주민들 스스로 폐교에 동의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는 일단 벗어났지만, 묘량중앙초가 갈 길은 아직 멀다. 교육당국에서는 전교생 60명 이하의 농어촌 학교를 폐교 대상으로 몰아가는 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교생 120명 이하의 학교를 폐교 대상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거센 반발이 일어나면서 한발 물러서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묘량중앙초와 주민들은 지속가능한 학교 운영을 위해, 올해 스쿨버스 운영과 함께 학교급식의 직영체제를 갖추는 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아이들과 마을의 공동체 공간인 체육관을 건립하겠다는 꿈도 꾸고 있다.

농어촌 작은 학교의 통폐합은 거의 예외 없이 마을의 분열을 낳는다. 교육당국이 거액의 지원을 미끼로 통폐합을 유도하면, 주민들끼리 찬반을 다투는 와중에 양쪽 모두 씻지 못할 상처를 입게 된다. 묘량면도 다를 바 없었다. 옛 묘장면 쪽은 학교가 살아남고 옛 황량면의 다른 한쪽은 학교가 없어졌지만, 그로 인해 허물어진 공동체의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고 있다. 권혁범씨는 “묘량중앙초가 묘량면의 절반(옛 묘장면 지역)을 살려냈는데, 이제 묘량면 전체의 화합을 이끌어가는 움직임으로 진화됐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옛 묘장면과 황량면 지역은 장암산으로 갈라져 있어, 원래 공동체성이 약했어요. 2004년에 양쪽 학교의 폐교를 놓고 찬반이 갈라지면서 두 지역 사람들의 사이가 더 서먹서먹해졌어요. 그때의 앙금 때문에 학구(교육행정상 나눈 구역)도 따로따로지요. 이제 옛 황량면 쪽 아이들도 묘량중앙초에 다닐 수 있도록 묘량면 전체의 학구를 통합했으면 합니다. 지금은 황량면 쪽 아이들이 먼 곳의 영광읍내 학교를 다녀야 해요. 가까운 이웃에 훨씬 더 좋은 묘량중앙초가 있는데도요. 묘량면의 학구가 하나로 통합되면, 옛 황량면 쪽으로도 젊은이들의 귀농·귀촌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겁니다. 묘량중앙초는 학생 수를 더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요. 묘량중앙초가 두 마을을 모두 살리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전북 완주군 고산면의 대표적인 작은 학교인 삼우초등학교의 나영성 교장은 “삼우초는 지역 주민들이 뜻을 잘 모아, 2개 학교를 좋은 학교 하나로 통합해낸 성공 사례”라고 말했다. “시골의 작은 학교는 농어촌 마을에 영양과 혈액을 공급하는 모세혈관이에요. 학교 살리는 데 주민들이 마음을 잘 모으면, 죽어가는 마을을 살릴 수 있어요. 한발 더 나아가 갈등하는 마을을 화합으로 이끌기도 하지요.”

묘량중앙초에서는 15일 민하, 주영, 시연 3명의 아이를 떠나보내는 졸업식을 했다. 소박하고 감동적이었다. 전교생 33명과 주민들은 전교생의 축하말을 담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담아 졸업생의 축하선물로 누리집(홈페이지)에 올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영광/글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곳엔 귀촌인 14명이 있었네

학교 살린 여민동락공동체

그곳에 여민동락공동체가 있었다.

묘량중앙초등학교가 살아나고 마을을 일으키는 데는, 여민동락이라는 귀촌인들의 공동체가 큰 몫을 했다. 2007년 이후 20~40대 젊은이들이 묘량면에 정착해 노인복지와 마을만들기 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사이 여민동락의 일꾼이 14명(어른)으로 불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권민하)부터 2살배기(강누리)까지 네 가정 7명의 아이들도 쑥쑥 자라나고 있다.

옛 묘장면 지역에 자리잡은 여민동락의 대표 사업은 2008년에 설립한 노인복지센터 운영이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권혁범씨와 목소리 크고 시원시원한 부인 김강선씨, 백선희(30) 사회복지사 등 8명이 중풍과 치매 노인 20명을 돌본다. 백씨는 2010년 사회복지 실습을 왔다가 아예 여민동락에 눌러앉았다. “1950명쯤 되는 묘량면 주민 중 730명이 65살 이상 노인이고, 그중 절반 이상이 독거노인이에요. 농촌 마을을 다녀보면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들이 참 많아요. 겨우 20명 할머니만 모시고 있어요.”

묘량중앙초의 아이들을 통학시키는 고물 봉고 승합차와 카니발도 바로 노인복지센터의 차량이다. 권씨 부부는 아이들 등교를 마치면 곧바로 노인들을 모시러 가가호호 방문에 나선다. 여민동락은 자립형 노인복지센터로 국가보조금을 받지 않고 있다. 처음 6개월은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일했고, 그 뒤 후원금이 모이면서 100만~120만원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국가보조가 중단되는 순간 복지사업이 끝나는 현실을 극복하자는 생각이었어요.”(권 센터장) 여민동락의 다음 목표는 묘량면의 각 마을에 산재한 24개 경로당을 공동체형 노인복지 공간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여민동락은 마을가게도 운영한다. 복지센터 공간 바로 옆에 자리잡은 ‘동락점빵’에는 ‘이문은 없어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을가게’라는 표어를 걸어놓았다. 1.5t 트럭을 멋지게 개조한 차량에 생필품을 가득 싣고, 토요일마다 42개 마을을 방문한다. 가게가 없는 시골의 홀몸노인들에게 소주와 콩나물을 안방까지 배달한다. 동락점빵의 지난해 매출은 1억원에 이르렀다. 묘량면의 농산물을 도농직거래로 인터넷 판매를 하는 사업도 벌인다. 동락점빵 담당인 이은경(43)씨의 아들 민수는 묘량중앙초 2학년에 다니고 있다.

모싯잎 송편을 생산하는 할매손 떡공장도 여민동락이 꾸리는 사업이다. 직접 재배한 우리 콩과 모싯잎을 원료로 쓰고, 마을 어른들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공동체의 상근자 4명이 일해 지난해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제 자력갱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떡공장 바로 옆에 집을 지어 정착한 이영훈(36)씨가 사업을 끌어가고 있다. 4살 태민이와 2살 태린이를 키우느라 육아휴직 중인 아내 이민희(39)씨는 아이들 교육 걱정을 하지 않는다. 묘량중앙초와 병설유치원이 있기 때문이다. 여민동락은 유휴농지 3만여㎡에서 4년째 농사도 짓고 있다. 45명의 노인이 짬짬이 일하는 작은 소득원이다.

고향 마을로 귀향해 여민동락을 세운 강위원(43) 대표는 2011년부터 광주 광산구의 노인복지관장을 맡느라 잠시 공동체를 떠나 있다. 여민동락 노인복지센터 직원인 부인 양효라(39)씨는 육아휴직을 내고 운파(4)와 누리(2)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묘량면 터줏대감인 정현용씨는 “여민동락 젊은이들이 묘량면의 보석”이라고 치켜세운다. “시골마을에 아이들 데리고 처음 내려왔을 때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러나 모두 의심했지요. 그런데 대단해요. 마을을 지탱하고 학교를 지켰어요. 지금은 학교 운동회 하면 마을 잔치가 됩니다. 학교 때문에 살아 있는 면이 됐지요.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니까 마을이 살아나더라고요. 젊은 선생님들도 학교로 돌아오게 만들었잖아요. 여민동락에서 마을행사를 연다 하면,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참석해요.”

영광/김현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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