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묘량중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학교 운동장에 나와 환호하고 있다. 이 학교는 2009년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죽어가던 마을까지 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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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 영광 묘량면의 두 학교 이야기
▶ 전남 영광군 묘량면은 두 개의 마을로 나뉜다. 학교를 지킨 마을과 학교를 포기한 마을이다. 9년 전 학교를 포기했던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후회한다. “학교가 문을 닫으니, 마을도 죽어가네요.” 하지만 때는 늦었다. 다시 학교를 살릴 길이 없다. 다행히 학교를 지켜낸 마을에서는 해마다 학교운동장에서 큰 잔치를 벌인다. 아이 울음소리도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렁! 낡은 승합차 시동 거는 소리가 요란하다. “스쿨버스도 없어요. 폐교 대상이라고…. 이 고물로, 제가 아이들을 매일 실어날라요. 그래도 보물단지죠. 우리 학교를 살렸잖아요.” 권혁범(40)씨는 하루 네차례 ‘비인가 스쿨버스’를 운행한다. 아침 등교 한차례, 오후 하교 때에 세차례 운전대를 잡는다. 2010년에 10년 된 고물 승합차를 680만원에 들여왔다.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아이들을 통학시킨 지 꼬박 3년, 10만㎞를 더 달렸다. 권씨는 2007년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으로 귀촌했다. 6학년 민하와 3학년 민혁, 두 아들의 학부모이고, 아이들이 다니는 묘량중앙초등학교의 학교운영위원장이다.2009년 폐교 위기였던 묘량중앙초
학부모와 주민들이 똘똘 뭉쳤다
여민동락공동체가 앞장을 서
아이들 나를 승합차부터 구했다 학생이 20명대로 줄어들자
2004년 폐교를 결정한 묘량초
읍내 큰 학교로 보내면 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결정했지만
막상 사라지자 “이건 아니구나” 2009년 8월이었다. 교육청의 통폐합 예정 공문이 날아왔다. 묘량중앙초는 초·중·고교를 통틀어 묘량면에 단 하나 남은 학교. 전교생은 이미 14명으로 줄어 있었다. 6학년이 졸업하는 이듬해면 12명으로 더 쪼그라들 최악 상황이었다. 우리나라 전국의 면은 모두 1205개. 교육당국의 ‘방조’ 속에, 분교 하나도 없는 면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14개에 이르렀다. 묘량면이 학교가 없는 15번째 면으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했다. 악순환은 더 큰 악순환을 불렀다. 교사들은 명예퇴직한 60대 전후 고령자들로 채워졌다. 교사의 열의가 없으니, 학부모들이 학교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마을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읍내 학교로 아이를 보내거나 아예 도시로 떠나는 이삿짐을 쌌다. 운동장의 놀이시설은 녹이 슨 채로 방치되고, 5년이 지나도 컴퓨터는 새것으로 교체되지 않았다. 아이들 식사가 좋을 리 없었다. 이웃 학교 것을 배달받으니, 국물이 식기 일쑤였다. 스쿨버스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묘량중앙초는 ‘안락사’의 꼭짓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학부모와 주민들이 통폐합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다행히 100% 반대 의견이 모아졌다. 두 아이가 있는 권씨는 “학교를 꼭 살려야 한다”고, 통폐합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 김강선(38)씨와 계약직 교사 생활을 접고 2007년부터 농촌에서의 이모작 인생을 막 시작한 터였다. 부부는 묘량면에 정착하기 위해, 임용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묘량면에 여민동락공동체라는 비영리 단체를 세워 어렵게 이모작 인생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학교를 없앤다니요? 기가 찼습니다. 학교가 없어지면, 다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을 키울 수가 없잖아요. 아이들을 학교에 끌어들이자면, 통학차량 운행이 가장 시급하더군요. 우선 공동체 예산으로 고물 봉고차라도 구입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일을 저질렀지요.” 김강선씨는 “학교 없는 마을이었다면, 귀촌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똘똘 뭉친 학교운영위원회는 세차례나 꼼꼼하게 학부모의 욕구조사를 했다. 저녁 8시까지 완전 개방하는 돌봄교실을 운영하기로 마음을 모으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농촌의 엄마들은 논밭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무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학교 돌봄교실에서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최근 귀농한 이영윤(오른쪽)씨의 가족과 김병상(왼쪽)씨 가족이 묘량중앙초등학교 교감실에서 지역사회 학교 운영 방안에 대해 밝히고 있다. 김씨는 묘량초등학교가 문을 닫은 뒤 3명의 자녀를 영광읍에 있는 영광초등학교로 통학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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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묘량초교는 학생 수가 감소해 2004년 문을 닫았다. 묘량초교 폐교 이후 같은 묘량면이지만 묘량중앙초교가 있는 장암산 반대쪽 마을에는 귀농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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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인구가 몰려들고
읍내서 전학오는 학교가 되면서
올해 전교생은 41명까지 늘었다
집 구하기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묘량초 4개리엔 759명이 산다
5년간 입학예정자 단 2명
“학교가 없어지니 다 없어져요
귀농·귀촌 발길 뚝 끊기고
죽은 마을이 되어가고 있어요” 폐교된 학교 근처에 사는 김병상(46)씨는, 2004년의 폐교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때 큰아이가 5살이었어요. 그 아래가 4살, 2살이었죠. 전교생 20명대로 줄어든 마을 학교를 폐교하자는 게 마을 사람들의 중론이었어요. 영광읍의 큰 학교로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죠. 그거는 아니다 싶었지만, 제가 후배다 보니까 목소리를 못 냈어요.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6학년, 5학년, 3학년인데, 영광읍내 학교를 다녀요. 많이 불편하지요. 학교에서 통학차량이 늦기라도 하면, 아이는 운동장에서 나뭇가지로 동그라미 그리면서 무작정 기다려야 해요. 궂은 날 운동장에서 비 맞으며 방치된 적도 있었어요. 방과후 프로그램이 자리잡히지 않은 학기 초에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요.” 김씨와 아내 김진숙(45)씨는 풍성하고 알찬 돌봄교실을 운영하는 묘량중앙초의 활기가 못내 부럽다. “2~3년 사이 묘량중앙초의 돌봄교실 프로그램이 참 좋아졌어요. 우리 아이도 묘량중앙초로 전학시키고 싶지만, 아이가 원치 않아서 억지로 못해요.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하잖아요. 2004년까지만 해도 월암리의 청년회원이 33명이었는데 지금은 6명으로 줄었어요. 그때만 해도 묘량면 청년회원의 다수가 우리 마을(옛 황량면) 쪽 사람들이었어요.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었지요. 우리 마을 쪽으로는 아이 데리고 귀농하는 사람도 없어요. 학교 없어지니까 모든 게 다 없어진 것 같아요.” 폐교된 묘량초의 동문인 강명원 묘량면장도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폐교된 묘량초 근처에는 앞으로 20년 뒤면 마을마다 한두 가정만 남을지 몰라요. 삼학리에는 가장 어린 아이가 고3이에요. 마을이 죽어가는 겁니다. 2004년 폐교 때는 다들 학교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생각 못했어요. 막상 없어지고 나니까, 이거는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거죠. 학교가 있어야, 귀농이든 귀촌이든, 사람 들어오게 할 것 아닌가요? 학교라는 게 한번 없어지고 나면 다시 살릴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들이 있어야 학교를 다시 세우자고 외치기라도 할 텐데…. 학교가 없으니 아이가 없고, 아이가 없으니 다들 학교 세우는 데에 관심조차 없어지는 거예요. 마을 전체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전남 곡성군의 인접한 두 고장, 목사동면과 죽곡면에서도 ‘묘량면의 두 마을’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주민들의 동의로 학교가 없어진 목사동면의 인구는 2005년 1850명에서 지난해 말 1535명으로 17%나 줄어들었다. 멀리 통학하는 초등학생 아이 때문에 목사동면으로 귀농해 놓고도 근처 면에 다시 방을 얻어 지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겨났다. 목사동면과 강을 사이에 둔 죽곡면은 인구 감소가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2005년 이후 마이너스 10% 정도로 선방했다. 2005년 주민들이 학교 통폐합을 막은 덕분이었다. 귀농·귀촌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 묘량로에 자리잡은 지역생활공동체 여민동락.(위) 묘량중앙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여민동락공동체의 통학차량을 이용해 귀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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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귀촌인 14명이 있었네 학교 살린 여민동락공동체 그곳에 여민동락공동체가 있었다. 묘량중앙초등학교가 살아나고 마을을 일으키는 데는, 여민동락이라는 귀촌인들의 공동체가 큰 몫을 했다. 2007년 이후 20~40대 젊은이들이 묘량면에 정착해 노인복지와 마을만들기 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사이 여민동락의 일꾼이 14명(어른)으로 불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권민하)부터 2살배기(강누리)까지 네 가정 7명의 아이들도 쑥쑥 자라나고 있다. 옛 묘장면 지역에 자리잡은 여민동락의 대표 사업은 2008년에 설립한 노인복지센터 운영이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권혁범씨와 목소리 크고 시원시원한 부인 김강선씨, 백선희(30) 사회복지사 등 8명이 중풍과 치매 노인 20명을 돌본다. 백씨는 2010년 사회복지 실습을 왔다가 아예 여민동락에 눌러앉았다. “1950명쯤 되는 묘량면 주민 중 730명이 65살 이상 노인이고, 그중 절반 이상이 독거노인이에요. 농촌 마을을 다녀보면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인들이 참 많아요. 겨우 20명 할머니만 모시고 있어요.” 묘량중앙초의 아이들을 통학시키는 고물 봉고 승합차와 카니발도 바로 노인복지센터의 차량이다. 권씨 부부는 아이들 등교를 마치면 곧바로 노인들을 모시러 가가호호 방문에 나선다. 여민동락은 자립형 노인복지센터로 국가보조금을 받지 않고 있다. 처음 6개월은 직원들이 자원봉사로 일했고, 그 뒤 후원금이 모이면서 100만~120만원의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국가보조가 중단되는 순간 복지사업이 끝나는 현실을 극복하자는 생각이었어요.”(권 센터장) 여민동락의 다음 목표는 묘량면의 각 마을에 산재한 24개 경로당을 공동체형 노인복지 공간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여민동락은 마을가게도 운영한다. 복지센터 공간 바로 옆에 자리잡은 ‘동락점빵’에는 ‘이문은 없어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을가게’라는 표어를 걸어놓았다. 1.5t 트럭을 멋지게 개조한 차량에 생필품을 가득 싣고, 토요일마다 42개 마을을 방문한다. 가게가 없는 시골의 홀몸노인들에게 소주와 콩나물을 안방까지 배달한다. 동락점빵의 지난해 매출은 1억원에 이르렀다. 묘량면의 농산물을 도농직거래로 인터넷 판매를 하는 사업도 벌인다. 동락점빵 담당인 이은경(43)씨의 아들 민수는 묘량중앙초 2학년에 다니고 있다. 모싯잎 송편을 생산하는 할매손 떡공장도 여민동락이 꾸리는 사업이다. 직접 재배한 우리 콩과 모싯잎을 원료로 쓰고, 마을 어른들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공동체의 상근자 4명이 일해 지난해 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제 자력갱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떡공장 바로 옆에 집을 지어 정착한 이영훈(36)씨가 사업을 끌어가고 있다. 4살 태민이와 2살 태린이를 키우느라 육아휴직 중인 아내 이민희(39)씨는 아이들 교육 걱정을 하지 않는다. 묘량중앙초와 병설유치원이 있기 때문이다. 여민동락은 유휴농지 3만여㎡에서 4년째 농사도 짓고 있다. 45명의 노인이 짬짬이 일하는 작은 소득원이다. 고향 마을로 귀향해 여민동락을 세운 강위원(43) 대표는 2011년부터 광주 광산구의 노인복지관장을 맡느라 잠시 공동체를 떠나 있다. 여민동락 노인복지센터 직원인 부인 양효라(39)씨는 육아휴직을 내고 운파(4)와 누리(2)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묘량면 터줏대감인 정현용씨는 “여민동락 젊은이들이 묘량면의 보석”이라고 치켜세운다. “시골마을에 아이들 데리고 처음 내려왔을 때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러나 모두 의심했지요. 그런데 대단해요. 마을을 지탱하고 학교를 지켰어요. 지금은 학교 운동회 하면 마을 잔치가 됩니다. 학교 때문에 살아 있는 면이 됐지요. 젊은이들이 뜻을 모으니까 마을이 살아나더라고요. 젊은 선생님들도 학교로 돌아오게 만들었잖아요. 여민동락에서 마을행사를 연다 하면,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참석해요.” 영광/김현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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