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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철도회관에서 열린 ‘녹색당 풀뿌리정치 워크숍’에 참석한 녹색당 당원들이 “녹색당에 투표하겠다”는 의미로 초록색 유인물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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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녹색당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들
▶ 1980년 출범한 독일 녹색당은 ‘환경정당’ 이상입니다. 1998년 총선에서 6.7% 득표를 했고, 같은해 10월 사회민주당과 ‘적록연정’으로 집권에 성공하죠. 이후 30년 동안 독일 사회를 탈핵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에도 녹색당이 있습니다. 득표율만 놓고 보면 지난해 4·11 총선에서 10개 정당 중에 8위에 그쳤습니다만, 한국에서도 녹색의 꿈이 조금씩 자랍니다.
“여기 모인 분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양복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에요.”
웃음이 터졌다. 사회를 맡은 마을신문 <도봉신문엔(N)> 편집위원 이창림씨의 말대로였다. 자리에 모인 이들 누구도 각 잡힌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회의장을 채운 사람 100여명은 주위를 둘러보며 즐거워했다. 기존 정당행사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엄숙한 분위기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철도회관에서는 전국의 녹색당 당원들이 모인 가운데 ‘녹색당 풀뿌리정치 워크숍’이 진행됐다. 지역간 풀뿌리정치의 노하우를 나누고 강연을 듣고, 당원들이 직접 동네에서 녹색당원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논의했다. 또 새해 첫 전국 단위 행사인 만큼 올해 녹색당이 어떤 길을 걸을지 당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였다.
“기호는 의석순? 후보 평등권 침해”
“거대한 흐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대화의 소재가 바뀌는 걸 목표로 합니다. 지역사회를 바꾸는 활동을 하다가 당원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끼고, 특히 최근에는 정치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다짐하듯 당원들 앞에서 말했다. 다가오는 2014년 지방선거는 풀뿌리 정치, 생활정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녹색당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한 선거였다.
이날 행사에는 진달래(25) 인천 녹색당 운영위원장과 이형석(28) 대구 녹색당 운영위원장, 풀뿌리 정치를 실천하고 있는 김수민(31) 녹색당 구미시의원도 참석했다. 이들을 포함한 녹색당원 5명은 지난 9일 헌법소원심판청구서에 청구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녹색당 주장은 “‘국회의원 의석수와 정당추천을 기준으로 투표용지에 순서를 게재한다’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제150조 3항이 투표용지에 후순위로 게재되는 후보자와 소속 정당의 평등권(헌법 제11조)과 공무담임권(헌법 제25조)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기호 11번이었던 ‘소수 원외정당’ 녹색당으로서는 제도 개선이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공직선거법 제150조에 대한 문제제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헌법재판소(헌재)는 당시 이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1997년 10월30일 “공직선거에 있어서 정당 후보자에게 무소속 후보자보다 우선순위의 기호를 부여하는 제도는 정당제도의 존재 의의에 비추어 그 목적이 정당하다고 할 것”이라며 의석순으로 이뤄지는 기호 부여가 소수당 혹은 무소속 후보자의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작년 총선 2% 득표 못해 문닫아
‘녹색당 더하기’ 이름 달고 재창당
선거 기호순번제 위헌소송에
원래 이름 되찾기 행정소송 나서
“인지도 너무 낮다는 걸 느껴요
모임장소 빌릴 때 녹색당이라니까
녹색땅이라고 쓰더라고요…
국회 입성도 중요하지만
지역에서 자강하는 게 우선
2014년 지방선거 필승할 겁니다”
그러나 녹색당은 기호 순서가 후보자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순서효과’에 관한 연구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에서 1996년과 2008년 사이에 이뤄진 연방상원선거를 분석했더니 일반적으로 투표용지의 첫번째 번호인 경우 다른 번호보다 약 1% 정도 득표를 더 했다. 그 비율이 주요 정당 후보자의 경우 4%까지 높아진 걸로 드러났다. 미국 연방법원은 20세기 초반부터 투표용지에 후보자를 표기할 때 현직 공직후보자나 다수당 후보자를 가장 먼저 배치하고 나머지 후보자의 이름 알파벳 순서대로 정하는 것이 후보자의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투표기호를 일단 추첨한 뒤 지역별로 게재 순서를 임의로 달리하는 방식으로 선거를 진행한다.
국내 연구에서도 순서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2006년과 2009년 기초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동일한 정당이 복수의 후보를 추천하는 중선거구제가 실시됐다. 이어 2010년 정당 표시 없이 교육의원 선거가 실시됨에 따라 주로 기호 1번이나 정당추천 후보자 가운데 가장 선두의 기호 ‘가’를 배정받은 경우 다른 후보자들에 견줘 유리할 것이라는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정당 표시가 없는 2010년 교육의원 선거를 분석한 한 연구는 앞선 기호를 받은 후보가 순서효과에 힘입어 3.09~7.06%까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도 녹색당 주장에 힘을 보탰다. 김 원장은 “대기업 독과점과 같은 정당 독과점”이라며 기호순번제를 반대해왔다. 그는 현재의 기호순번 제도를 바꾼다면 특정 지역 유권자가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는 현상이나 소수당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정당은 무소속에 견줘 책임소재가 있지만 서로의 장단점이 있다. 의석수대로 순서를 정하는 것은 현재 의회권력을 반영하는 것인데, 새로 권력을 재편하기 위한 선거라면 다시 결정해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익부 빈익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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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한 녹색당원이 ‘당명 되찾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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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왜 녹색당에 끌렸는가
녹색당의 미래는 그다지 순탄치 않다. 지난 4·11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0.48%인 10만3811명이 녹색당에 표를 줬지만, 총선 이후 녹색당은 정당 간판을 내렸다. 현행 득표율 2%가 안 되면 정당등록을 취소하는 정당법 제44조 1항 때문이다. 이 조항은 1980년 11월25일 신군부가 정당활동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개정했다. 소수정당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2005년 8월4일 정당법을 개정하면서 38조에서 다시 44조로 자리를 바꿔 유지되고 있다. 필리핀과 멕시코에 비슷한 사례가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5월 녹색당은 ‘소수정당’의 설움을 공유하는 진보신당, 청년당과 함께 행정소송을 냈다. 이에 지난해 10월 서울행정법원은 득표율 2%가 안 되는 정당의 등록을 취소하는 정당법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을 했다. 행정소송은 헌재 결정이 있을 때까지 중단됐다. 그러나 등록취소된 정당이 이후 4년 동안 동일 당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당법 제41조에 발이 묶여 녹색당은 지난해 10월13일 재창당하면서 ‘녹색당 더하기’라는 새 이름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했다. 녹색당은 41조에 대해서도 별도의 헌법소원을 냈다. 녹색당원들은 1월부터 당명을 되찾겠다며 헌재 앞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당의 이름은 달라졌지만 녹색당은 그대로였다. ‘녹색당 더하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당안팎에서 찾아볼 수 없다. ‘탈핵, 지속가능한 에너지, 개발이 아닌 상생, 수단이 아닌 노동, 평화, 인권, 다양성 옹호, 농업’ 등 녹색당이 표방하는 가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진보정당의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했거나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 중앙정치보다 풀뿌리 정치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녹색당에서 새로운 대안정치를 찾고 있었다.
가난한 녹색당이 내세우는 자산이자 미래는 청년과 여성 비율이 높은 점이다. 지난 1월15일 기준 당비를 납부하고 있는 5300명의 당원 중 35살 이하 청년 당원의 비중이 4분의 1을 넘고 특히 20대 당원이 전체 13%로 다른 정당에 비해 많다. 또 전체 당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녹색당은 당헌에 따라 모든 조직의 위원장을 남녀 같은 수로 구성하고 있다.
“대안의 정당을 찾으러 왔어요. 어떤 조직을 가도 수직적 관계가 많은데 녹색당은 모든 게 수평적 관계예요. 당원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느낌이 좋고, 그런 점에서 당 조직이 건강하고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채식을 한다는 서울 마포의 녹색당원 임혜영(35)씨는 정치적이지 않은 녹색당의 모습을 좋아했다. 저녁식사 시간, 임씨와 같이 채식을 하는 스무명 남짓 되는 사람들은 오징어볶음 대신 버섯과 야채볶음이 든 채식주의자를 위한 도시락을 받았다. 채식주의자용 도시락은 파란색 일반 도시락과 구분되는 빨간 뚜껑이었다.
청년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인 대학생 안준혁(21)씨도 다른 당에 없고 녹색당에만 있는 걸 ‘소수자에 대한 배려’, ‘세심함’으로 꼽았다. 2011년 4월 밀양 송전탑건설반대 희망버스에 오른 뒤 녹색당과 연을 맺게 된 안씨는 녹색당에서 활동하며 졸업 후 고향 경북 김천을 위해 일해볼 마음을 싹틔우고 있다. 청년녹색당원들은 진보신당 연대회의 내 학생조직과 만나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진보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당원들이 느끼는 녹색당의 정치적 과제는 뚜렷했다. 안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너무 낮다는 걸 많이 느껴요. 녹색당 내 탈핵에너지의제모임에서 장소를 빌리면서 ‘녹색당’이라고 말했는데 그곳에서 모임명을 ‘녹색땅’으로 적어뒀어요. ‘함께 살자 농성촌’에서 녹색당도 참여하고 있는데 음식을 나누러 온 시민들이 ‘녹색당’을 모르더라고요. 농성장에 올 정도면 당연히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정말 사람들이 모르는구나 그때 깨달았죠.”
수평적 관계, 대의원도 추첨으로 선발
이날 지난해 8월 녹색당에 가입한 뒤 처음 당 행사에 참여했다는 대기업 사원 곽아무개(27)씨도 녹색당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놓았다. “녹색당 행사에 처음 왔는데 내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할지 실천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그런데 녹색당이 어느 정도 정치적 기반을 가지려면 좀 오래 걸릴 것 같긴 해요. 국회의원 배출하려면 20년? 빠르면 10년.”
녹색당은 지역밀착형 정치에 대한 신념이 강한 정당이다. 그러나 왜 풀뿌리 시민운동이 아니고 정당 정치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답은 찾기 어려워 보였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녹색당 창당 과정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수민 구미시의원은 중앙정치와 분리된 지역정당·주민정당을 만드는 것을 꿈꿨다. 김 의원이 말했다. “소위 말하는 권력의지, 결국 사회경영의지나 통치의지를 내세우는 다른 당과 달리 녹색당은 지역정치라는 구별되는 노선을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스스로 지역에서 자강하는 게 우선이다. 지역정당에 준하는 정치조직을 만들 계획이 있다. 다른 당 당원들과 함께하는 틀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중앙당이 동반 성장하는 것을 기대한다.”
녹색당은 정말 권력의지가 없는 정당일까?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달라진 녹색당의 고민을 서형원 과천시의원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가치는 현실 정치 체계를 인정한 상태에서 단순히 권력을 획득하는 것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권력의지가 없다고들 하는데 지금의 권력 작동방식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지가 아닌가. 기존의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녹색당의 집단적 권력의지는 작지 않다.”
워크숍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24일, 전화통화에서 대구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인 대학생 이형석(28)씨가 말했다. “녹색당 국회의원이 빨리 나오면 좋지요. 그런데 녹색당은 대의원도 추첨으로 뽑을 만큼 한국 정치에서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어요. 물론 국회의원 당선도 중요하지만 그 실험이 증명되는 순간 진짜 녹색당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풀뿌리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정치에 나서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가까운 미래에 기성 정치판에서도 녹색당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 수 있을까. 다만 녹색당의 성장이 여태껏 정치적으로 소수자였던 청년과 여성을 대변하는 가치를 우리 사회가 받아들인다는 의미임은 분명해 보였다.
글·사진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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