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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21 20:47 수정 : 2012.12.22 12:20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일 오전 젊은층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서울 성북구 정릉4동의 투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르포
투표날에 만난 20대들

“반값등록금 시대를 위해서”
“정권교체를 위해서”
거리 체감 투표율은 높았다
“원래 관심이 없어서”
“기말고사가 더 급해서”
더러 안 한 이들도 만났다

초박빙 승부, 해볼 만했다
투표율도 여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만큼
어르신들이 투표장에 몰려왔다
20대의 33.7%는 박근혜를 찍었다
65%의 그대들아, 좌절금지!

땅은 얼어 딱딱했고,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배낭에 운동화, 뿔테 안경과 손에 든 두꺼운 책은 그들의 ‘신분증’이었다. 아침 7시 ‘공시족’(공무원시험족)이 지하철역 밖으로 말간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김아무개(26)씨도 빨간 머리띠만 빼면 비슷한 차림이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지하철 9호선 노량진역 밖을 나선 김씨가 걸음을 재촉하며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1시간 일찍 일어나서 투표하고 오는 길이에요. 주변에서 투표 많이 하는 분위기예요. 저도 노량진에서 자취하고 있는데 투표하려고 송파 집에서 잤어요.” 어머니가 챙겨주신 빵이 든 쇼핑백을 흔들며 김씨가 학원 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포장마차 주인과 손님은 한마음

박빙의 승부가 시작된 대선 당일, 20대 청년의 투표 의지는 예상보다 뜨거웠다. 아침시간 ‘겨울방학 수강료 특별할인’ 포스터가 선거벽보처럼 붙어 있는 노량진에서 만난 20대 공시족들 역시 꽤 부지런하게 투표를 마치고 학원으로, 독서실로 복귀중이었다. 젊은층의 지지율이 높은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재인! 문재인!”

김이 서린 포장마차 천막 사이로 텔레비전 속 문재인 지지자들의 함성이 흘러나왔다. 주먹밥과 토스트 등을 파는 포장마차 주인 윤아무개(58)씨가 10인치 구형 아날로그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노량진1동사무소에서 2번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하고 온 윤씨가 다음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대학등록금 부담 줄여달라’였다. 26살인 대학생 딸이 전문학교를 다니지 못해 임금 차이가 난다며 대학을 다시 가겠다는데 등록금이 걱정이다.

“쭉 봐왔는데 박근혜씨는 기존 지지층이 분명해 보이고, 문재인은 젊은층에서 많이들 갈아탄다고 하더라. 우리 딸도 토론회 보고 남자친구랑 문재인으로 갈아탔대.”

윤씨가 만든 김밥을 사던 김아무개(25)씨도 이미 투표를 끝냈다. 경기도 동두천시 주민이지만 부재자투표를 한 김씨는 ‘정권교체’를 1순위로 바랐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어린이집 보육교사를 하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한 지 1년째였다. 김씨는 “같은 여자이고 그분이 아무리 정치적 환경에서 잘 자랐다 해도, 사회생활도 잘 안 해본 것 같고 일반 사람들 정서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문재인 후보를 뽑았다. 학원 선생님과 동료 시험준비생 간의 끈끈한 커뮤니티가 형성된 노량진에서는 “선생님들이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아침 수업시간을 늦추거나 부재자 신청서를 갖다줘서”인지 투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듯했다.

셔터가 내려간 가게들 사이에서 불을 밝히고 빵을 굽던 제빵사 이지인(26)씨도 투표를 했다. 경기도 과천이 집인 이씨는 “사장님이 편의를 봐줘서” 아침 6시에 투표하고 7시에 가게문을 열었다. 19일 오전 9시 투표율은 11.6%로 2007년 대선보다 2%포인트 이상 높았다.

편안한 운동화가 앞코가 잘 빠진 부츠로 바뀌자 사정은 달라졌다.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역 지하 신세계백화점 직원용 출입문 앞에서 만난 20대들은 바빠 보였다. 이들은 노량진의 20대가 바리바리 챙겼던 책과 짐을 들고 있지 않았다. 이른 출근시간이 부담되거나 관심이 없다는 이유에서 이들에게 대통령선거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이벤트였다.

“원래 투표 안 해요.” 오전 9시2분, 한쪽 눈을 가릴 듯 갈색 머리를 넘긴 27살의 남자가 쏘아보듯 말하고 출입문 안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오던 남자 3명은 “출근시간이 빨라 아직 투표하지 못했다. 퇴근시간이 8시라 투표는 못할 것 같다”며 쭈뼛거렸다. 강원도가 집인 정소라(25)씨는 부재자신고를 못했다. 서울 마포의 김세영(21)씨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 박근혜 후보를 뽑았다. 평소보다 20분 먼저 일어나 투표를 하고 나왔다는 배송실의 김정민(30)씨가 이들을 대변하듯 말했다.

“백화점 매장마다 출근시간이 달라요. 보통 일반매장은 준비시간이 있으니까 9시, 9시30분까지는 나와야 할 거예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게 말처럼 쉽지가….” 출근시간을 조정해주는 회사의 배려는 없었다. 꽤 많은 직원이 투표했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낮의 고공 투표율, 설마 이기는 거야? 연령별로 보면 20대 투표율은 항상 가장 낮다. 지난 4·11 총선에서 20대 초반(20~24살) 45.4%, 20대 후반(25~29살) 37.9%로, 60살 이상 투표율(68.6%), 50대 투표율(62.4%)은 물론 전체 투표율(54.2%)보다 한참 낮았다. 하지만 <뉴스타파> <나꼼수> 등 새로운 형태의 보도가 점점 더 인기를 끌면서 정치에 무관심하던 20대의 변신이 예견됐다. 특히 엎치락뒤치락하는 이번 선거전에서 세대별 투표율은 이전 선거와 달리 ‘해볼 만한 경쟁’인 것처럼 보였다.

19일 오전 인천시 남구 용현동 용현여자중학교에 설치된 용현5동 제6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선거인 명부를 확인하고 있다. 인천/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제가 지지하는 후보가 되면 좋겠지만 어른들의 박근혜 지지 표도 무시 못할 것 같아요. 저희 엄마도….” 백화점 옆 대형서점에 입점한 팬시매장의 아르바이트생 백성은(23)씨도 투표 의지가 강했다. 백씨는 오후 4시30분에 퇴근하고 투표를 할 마음이었다. <뉴스타파>를 즐겨 듣는다는 백씨는 “언론탄압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문 후보를 지지했다. 2년제 대학의 미용학과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닐 미용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백씨가 말했다.

“지난 총선 때 20대 투표율이 낮아서 졌다는 말을 들으니 안타깝더라고요. 요즘 20대들이 워낙 살기 힘들어서 안 뭉친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 대선은 (박빙이라니) 재밌어요.” 오전 11시 투표율은 26.4%. 최종 투표율 80.7%였던 15대 대선보다 높았다. 높은 투표율은 젊은층이 투표 참여를 많이 한 결과라는 보도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지상으로 나오자 밝은 해가 이미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도림천을 따라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가는 길, 신림3교 위 박근혜 후보의 얼굴 옆으로 “위기극복·안정된 나라” 문구가 쓰인 펼침막이 펄럭였다. 하지만 쑥고개 방면 언덕에 솟은 건물 벽에 붙은 “원룸, 상가 임대”라는 펼침막 글씨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대명(28)씨가 투표한 대학동 제1투표소도 다른 투표소들처럼 50명 넘는 사람 줄이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졌다.

“사법시험 준비한 지 3년째고요. 밥 먹으러 나온 김에 투표하러 왔어요. 고시촌도 이번 투표 다 하는 분위기예요.”

문 후보를 뽑았다는 이씨와의 인터뷰가 끝나버린 건 70대 한 할머니의 호통 때문이었다. 출구조사를 할 거면 서류를 들고 오라던 할머니는 문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 숨지기 몇년 전에 학생운동을 했다며 반대의견을 밝혔다. 이후 기자가 출구조사 요원이 아니라 <한겨레> 소속임을 확인하더니 더 큰 소리로 외치고는 자리를 떴다.

“빨갱이 신문사네!”

‘추리닝’과 패딩점퍼를 입은 고시생들 사이사이 키 작은 어르신들이 빼곡히 선 대학동 투표소의 줄은 낮 12시30분이 넘자 조금 줄어들었다. 오후 1시 현재 투표율은 45.3%. 인근 식당 안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20대 고시생들의 눈에서 놀라움과 설마 하는 기대감이 조금씩 스쳤다.

서울 신촌의 풍경은 여느 휴일과 다르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개찰구 앞에서 한껏 치장한 멋쟁이들 사이에서 혼자 스마트폰을 보던 양기쁨(20)씨도 아침 8시에 가족과 투표를 마쳤다. 처음 참여하는 대선이라 “설렌다”는 양씨의 전공은 실용댄스. 경기도 안성에서 친구들을 만나러 나왔다는 양씨는 오버사이즈 검정 코트에 검정 모자를 쓰고, 눈에는 아이라인으로 멋을 냈다.

신촌 거리에서 마주친 20대의 ‘체감’ 투표율은 높았다. 연세대 앞 횡단보도에 서대문구에서 걸어둔 투표 독려 펼침막이 멋쩍게 보일 만큼, 거리의 20대들이 투표하고 나왔다고 응답했다.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는 20대도 흔했다. 하지만 20대에게 정치란 이전 세대처럼 일상보다 앞선 ‘대의’가 아니었다. 투표보다 당장 급한 현실을 택하는 20대도 간간이 만날 수 있었다.

“몇시까지예요?”

연세대에서 만난 이 대학 의예과 문아무개(26)씨가 물었다. 문씨는 방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직 투표를 안 한 문씨와 달리 아침에 투표를 마친 같은 과 친구 류아무개(26)씨는 “의료정책을 비교해보니 새누리당 법안이 현실에 맞는 것 같아” 박 후보를 지지했다.

같은 학교 경제학과 김아무개(20)씨의 관심사는 끝나지 않은 기말고사였다. “정치를 잘 몰라서 부모님 뜻대로 박근혜님을 지지한다”는 김씨는 이번 선거가 자신의 첫 대선인지도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정작 투표 못한 투표소 자원봉사자

아직 기말고사가 끝나지 않은 대학의 중앙도서관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태우던 사회학과 남학생(24)은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지만, 뽑고 싶은 사람이 없어지자 부재자투표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문 후보가 당선되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것도 없다. 구태정치가 싫다”고 잘라말했다. 2007년 대선 때도 군 입대를 앞둔 상황이라 정신이 없어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그도 누가 대통령이 될지는 궁금하다고 했다. 함께 있던 정치외교학과 김승훈(23)씨는 안 전 후보를 지지했지만 박 후보를 뽑았다. 김씨는 “보편적 복지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오후 5시. 투표율이 70%가 넘었다. 선거 결과가 야당에 유리할 것이란 추측성 보도가 쏟아졌다.

투표 마감이 30분 남은 시각, 예상대로 20~30대 유권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울 신촌동 제4·5투표소가 있는 창서초등학교로 달려들었다. 불 꺼진 건물 현관문 앞에서 심경란(23)씨는 열심히 셀카를 촬영중이었다.

“박 후보의 역사인식이 싫어서 문 후보를 뽑았어요.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아요.”

심씨는 일본 효고현에서 연세대로 입학한 재일동포 4세. 이번 대선이 첫 대선 투표였다. 아직 시험이 안 끝난 심씨 역시 집으로 돌아가 남은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심씨가 떠나고 난 자리에서 젊은 유권자 여럿이 셀카를 찍고 또 찍었다. 실제로 젊은층 투표율이 높은지 궁금했다.

“아니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 오후에도 어르신들이 많이 오셨어요.”

낮 12시부터 투표 안내 자원봉사를 하던 이화여대 김현정(19)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투표율이 높다면 투표하러 오는 젊은 유권자가 많았으리란 예상은 빗나갔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도 이번이 첫 대선. 김씨도 정작 기말고사 기간이라 부재자 신청을 깜박 잊고 하지 못했다. 오후 6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박근혜 50.1%, 문재인 48.9%로 박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다.

“제 고향이 구미인데, 구미에서 박근혜는 종교예요, 종교.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가 있잖아요. 나는 별로던데….”

제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시간이 종료되고 30분. 신촌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탄 여학생(23)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남학생(25)이 대답했다.

“어른들이 박근혜를 정말 많이 지지하더라. 여론조사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는데 어른들은 지지 후보를 드러내지 않아서 박 후보 숨은 표가 많이 있을 것 같았어. 왠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것 같아.”

여학생도 남학생의 예감에 동의했다. 예감이 맞았다고, 출구조사 결과를 슬쩍 알려주자 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학생들과 지하철을 함께 탄 60대 어르신이 이들의 대화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튿날 발표한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은 65.2%. 투표한 20대의 65.8%가 기호 2번을 뽑았다. 50대 투표율(89.9%)과 전체 투표율(75.8%)에 미치지 못해 빛이 바랬지만, 이전 20대 투표율과 비교해볼 때 높아진 수치였다. ‘20대가 투표를 안 해서 졌다’는 정치분석의 관행은 이번 선거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50대 이상의 결집력이 막강했을 뿐 20대는 ‘할 만큼 한’ 선거였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 요즘 20대는 앞선 학생운동 세대와 다릅니다. 투표 말고는 해본 정치경험이 별로 없지요. 과반의 지지를 받은 박근혜 당선인이지만,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투표한 20대의 33%만이 박 후보를 뽑았습니다. 이는 투표로 세상을 바꿔본 효능감을 맛보지 못한 20대가 65%란 말이기도 하지요. 투표날 만난 20대는 예전처럼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할 만큼 한’ 20대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한겨레 캐스트 #18] <대선 특집> 박근혜 시대’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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