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10 18:36
수정 : 2014.03.1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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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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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선수가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아깝게 은메달에 그친 날 다른 신문사 사람들 몇몇과 점심을 함께했는데 참석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금메달을 놓친 게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여? 아무 데나 대통령을 갖다 붙이면 되나. “아니 정말로 그렇다니까. 대통령이 안현수 선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한국 빙상계가 ‘멘붕’에 빠진 탓에 아무리 편파 판정을 해도 이의제기를 제대로 못 할 것을 알고 한 짓이라니까.” 뭐 약간 그럴듯한 해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견강부회가 너무 심하네. 이런 억지 논리로 존엄하신 대통령을 능멸하거나 여기에 동조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네들은 종북 언론인이 분명해.
며칠 뒤 이번에는 한 아마추어 체육단체 관계자를 만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요즘 각 체육단체들이 정관과 규약 개정 작업을 하느라고 난리입니다. 같은 대학 출신자가 협회 임원의 20%를 넘으면 안 된다는 조항을 넣으라는 대한체육회 지시가 떨어져서요. 파벌을 없애라는 박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답니다.” 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체육계 파벌 문제의 심각성이야 잘 알지만 그렇다고 대학 출신의 퍼센트까지 명문 규정으로 제한하는 극약처방을? “정말 그렇다니까요.”
확인해 보니 맞았다. 대한체육회 산하 56개 가맹단체들은 지난달 말까지 대의원총회를 줄줄이 열어 ‘동일 대학의 출신자 및 재직자가 재직 임원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을 정관(규약)에 신설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게 대한체육회 아이디어인가요, 아니면 문화체육관광부 지시 사항인가요? “제 입으로 어떻게 말을 합니까. 잘 아시면서….”
참으로 혁명적인 조처다. 거기다 상의하달의 일사불란함과 신속함이라니! 박 대통령이 애초 약속한 탕평책과 국민화합은 바로 체육계의 탕평·화합을 지칭했던 것이었나 보다. 이제 체육계의 고질병인 파벌 현상은 사라지고 앞으로 각종 국제경기에서 더 많은 금메달, 은메달이 쏟아져나올 게 분명하다.
그런데 슬그머니 의문이 든다. 파벌이니 출신 대학의 편중 문제니 하는 게 단지 체육계만의 문제인가. 실력에 관계없이 선수 선발이 이뤄지고, 자기네 편끼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지만 반대편은 철저히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병폐는 관료사회나 공기업 쪽이 훨씬 더 심해 보인다. 체육계는 그나마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공식적인 평가대회라도 있지만, 이쪽 동네는 그런 것도 없다. 형편없는 선수가 1등을 차지해도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작동해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 길조차 없다.
박근혜 정부 들어 영남, 서울대, 육사 출신 등의 편중 현상이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이야기다. 사정라인을 비롯한 곳곳의 권력 핵심은 ‘영남 향우회’ 차지가 됐고, 안보 관련 고위급 회의는 ‘육사 동창회’가 됐다. 유도, 태권도, 빙상 등에서 용인대, 경희대, 한국체육대 등의 출신 비중이 높다는 것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러시아로 귀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공직사회의 이런 부조리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정부조직법이나 국가공무원법 등 관련 법규와 규정을 체육단체의 정관·규약과 똑같이 개정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 및 특정 대학 출신자가 고위 간부직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는 규정을 명문화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관료사회와 공기업의 경쟁력이 쑥쑥 자라나 외국과 겨뤄도 금메달과 은메달이 거뜬할 것이다.
관련 법 규정 개정은 시간이 좀 걸리니 일단 쉬운 일부터 손을 대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국가정보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에서 저지른 조직적인 거짓말과 진실 은폐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남재준 국정원장을 해임하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번 기회에 가뜩이나 많은 육사 출신 ‘안보 임원’ 비율도 좀 줄일 겸 말이다.
언론계의 대선배 한 분이 오래전에 쓰신 칼럼 제목이 하나 생각난다. ‘그쪽 말고 이쪽을 보라.’ 각종 시시콜콜한 문제를 챙기면서도 막상 중요한 국가 현안은 외면하는 ‘선택적 만기친람’의 지도자 박 대통령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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