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6 18:39
수정 : 2014.01.0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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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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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다. 일종의 섹스이기도 하다. 상대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자신도 전인격을 투입하는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전설적 여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터뷰 철학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학부에 ‘팔라치 스타일 인터뷰’란 과목이 개설될 만큼 공격적인 인터뷰로 유명했던 그는 아야톨라 호메이니, 야세르 아라파트, 헨리 키신저 등 세계의 숱한 정치지도자들을 인터뷰할 때 늘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때로는 공격과 독설, 모욕적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팔라치가 인터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세계적 인물이 아니다’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인터뷰는 권위가 있었다.
모든 기자가 팔라치처럼 될 수는 없다. 모든 인터뷰가 공격적이고 도발적일 수도 없다. 더욱이 기자가 여럿 참여하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그런 파격적 인터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6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지켜본 심정은 매우 씁쓸하다. 상대를 완전히 발가벗기기는 고사하고 옷깃 하나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꽁꽁 감싼 채 털끝도 내놓지 않았다. 기자들은 그 갑옷을 향해 하릴없이 무딘 창을 던졌을 뿐이다.
박 대통령의 머리가 그렇게 뛰어나다는 것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기자들의 복잡한 질문 내용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거침없이 답변했다. 지난 대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웬만하면 “마지막 질문의 요지가 뭐였지요?” 정도의 질문을 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일절 없었다. 그 비결은 간단하다. 청와대는 질문 내용을 미리 모두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대통령은 준비한 답변을 그대로 읽어내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무슨 예기치 않은 질문이며, 대통령의 당혹해하는 모습 따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박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의 최대 화두는 ‘소통’이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기자회견 자체부터 소통의 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어야 옳다. 기자회견의 소통은 다른 게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질문, 팽팽한 긴장감과 열기, 상대방을 향한 뜨거운 돌진, 이를 맞받아치는 치열한 방어 속에서 피어난다. 팔라치가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한 것은 그런 점에서 기막히다. 하지만 청와대 기자회견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듯한 질문, 대통령의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에 그친 답변, 미적지근하고 맥빠진 분위기 속에서 80분은 오히려 지루한 시간이었다. 국민은 오랜만에 대통령의 ‘옥음’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동안에도 청와대 기자회견은 격식에 지나치게 매몰돼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어느 면에서는 청와대 기자회견이야말로 횟수나 진행 방식 등 모든 면에서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권 들어 대통령 기자회견은 정상화는커녕 더욱 비정상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질문지가 미리 나돈 것부터가 이를 웅변한다. 이 정부의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는 암암리에 기자회견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다.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다시금 확인된 것은 거대한 유리벽이다. 대통령과 언론, 국민과 언론, 그리고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가로놓인, 겉으로는 투명해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벽이다. 대통령은 그 벽 너머로 손을 내밀어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의 손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씻어줄 생각은 꿈도 꾸지 않고 있다. 언론 역시 국민의 절절한 심정과는 상당히 절연돼 있어 보인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외국 언론과는 수차례 인터뷰를 하면서도 국내 언론과는 한차례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 한국 기자들로서는 팔라치처럼 대통령한테 공격적 인터뷰를 한번 해보고 싶어도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면 팔라치가 박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면 어떻게 될까. 과거 몇몇 정치지도자들은 그의 껄끄러운 질문에 분노가 폭발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도 했다. 혹시 박 대통령도 그런 예를 따르지는 않을까. 아니, 원래 우아한 분이시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도 같다. 팔라치는 이미 2006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모두 부질없는 공상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천만다행인 줄도 모르겠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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