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1.04 19:11 수정 : 2013.11.06 16:25

김종구 논설위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 약속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제14대 대선을 앞둔 1992년 12월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 부산 분들이 도와주면 다음에 대구도 화끈하게 밀어주고” 등의 말을 하며 관권 부정선거를 당부했다.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약속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대구·경북을 정치적 기반으로 성장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은 각종 인사에서 부산·경남을 화끈하게 밀어주고 있다.

티케이(대구·경북)와 피케이(부산·경남)는 그동안 같은 영남이면서도 아웅다웅 다퉈왔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영포라인의 득세 속에 피케이가 소외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정부와 청와대의 장차관급 90명 가운데 부산·경남 출신은 20명, 대구·경북 출신은 12명으로 오히려 피케이들이 많다. 김기춘 실장이 말한 ‘우리가 남이가’ 정신이 박근혜 정부에서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애초 박 대통령이 약속한 ‘대탕평’은 대한민국의 대탕평이 아니라 ‘영남의 대탕평’이었던 셈이다.

권력의 핵심인 사정라인을 피케이가 독식하면서 정부의 사정기관장 회의는 부산·경남 향우회가 됐다. 이런 모임의 장점은 긴말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척하면 삼천리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이심전심, 염화시중의 미소가 피어난다. 서로 형님·동생 하는 사이니 의견 충돌로 파열음을 낼 일도 없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 축소와 국민의 눈길 돌리기용 사정 작업, 진보적 성향의 공무원·교사 단체 옥죄기 등 모든 일이 일사천리, 순풍에 돛 단 듯 권력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뒤집어 보면 ‘쟤네들은 남이다’다. 서로 같은 편이라는 동류의식은 원래 다른 한쪽을 멀리하는 배척의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남’은 지역일 수도 있고 이념일 수도, 계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땅에 함께 사는 우리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우리는 남이다’의 사회다.

박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발탁한 이유도 어찌 보면 ‘우리가 남이가’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안으로는 영남의 대동단결과 보수세력의 결집으로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밖으로는 반대편을 철저히 억누르는 국정운영 기조를 힘있게 이끌어갈 사령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김 실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뒤 날이 갈수록 ‘결속과 분리’ 정책이 가속화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지역편중 인사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선심 쓰듯 지역 안배로 몇 자리 나눠주는 시늉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안면몰수하고 마음 맞는 동네 사람들끼리 요직을 나눠 갖는 것이 오히려 더 솔직한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정권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찍지 않은 48%를 완전히 ‘남’으로 내팽개치고 있다.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조금이라도 걸림돌로 생각되는 상대는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윤석열 여주지청장 등 개인뿐 아니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공무원노조 등 미운털이 박힌 단체들은 모두 척결의 대상이다. 박 대통령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가 ‘국민’이지만, 지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은 비(非)국민이다.

이제 이 정권은 화합이니, 포용과 통합, 지역갈등 해소니 하는 따위의 거추장스러운 가식마저 완전히 벗어던졌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것도 박근혜 정권 들어 나타난 새로운 풍경이다. 안도현 시인이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로부터 무죄 평결을 받은 것은 “호남 배심원들 때문”이고, 권은희 전 수사경찰서 수사과장이 외압에 굴하지 않은 것은 “호남의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호남 하면 부정, 반대, 비판, 과거 집착 등 4가지 단어가 떠오른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이 어떤 국민을 ‘쟤네들은 남’이라고 여기면 그들 역시 ‘대통령은 남’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얼마나 서글프고 불행한 일인가.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자꾸만 자신도 국민도 함께 불행해지는 길로 매진하고 있다. 참으로 절망적인 현실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종구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