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집 앞에서 박준혁(가명·13) 군의 할머니 김순영(가명·59)가 폐지를 주워 리어카에 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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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폭력대물림 가정 준혁이네
손자의 방에는 할머니만 들어갈 수 있다. 박준혁(가명·13)군의 방문 앞에는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음. 제외→할머니’라고 쓴 경고문이 붙어있다.
준혁이 기대는 사람은 할머니뿐이다. 엄마는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종종 준혁을 때렸다.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다세대주택 지하에서 만난 할머니 김순영(가명·59)씨는 그런 손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 흘렸다.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준혁의 아버지(31)는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와 준혁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는 준혁과 동생 민혁(가명·12)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피시방에 데리고 가 며칠 밤을 샜다. 준혁·민혁의 이름으로 휴대전화를 사서 팔아 넘겨 가족에 수백만원씩 빚을 안기기도 했다.
휴대전화나 돈을 훔쳐 교도소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는 1년6개월간 복역을 마치고 지난해 8월 출소했다가 지난 6월 또 다시 절도죄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지난달 풀려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준혁에겐 가득하다.
준혁에겐 엄마의 기억도 없다.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여학생과 1년간 동거하면서 준혁과 민혁을 낳았다. 미성년자였던 엄마는 남편이 절도죄로 교도소에 들어가자 집을 나가 버렸다. 남겨진 아이들은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미성년자였던 엄마는 집을 나갔고정신장애 아빠는 교도소 들락날락
허드렛일로 손자들 키운 할머니는
체중 32㎏에 빈혈 심해 쓰러지기도 폭력적 행동 준혁이는 ‘자살위험군’
정서상태 불안정해 심리치료 시급 아버지의 정신장애와 범죄 뒤에는 또다른 과거가 있다. 할머니 김씨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김씨는 자신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버렸다. 그 아들이 준혁의 아버지다. 아들은 커갈수록 제 아비를 닮기 시작했다. 어머니인 김씨를 때렸고 남의 물건을 훔쳤다. 거짓말과 망상 증세도 심해졌다. 아들이 20대 후반에 이른 몇년 전, 병원은 아들에게 정신장애가 있다고 판정했다. 그 와중에도 김씨는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고 식당에서 잡일을 하며 아들을 키웠고, 나중에는 손자 둘을 보살폈다. 그러나 억척스레 가족을 지키려던 김씨도 나이 앞에서 무너졌다. 삼십대에 이르러서도 거듭 사고를 저지르는 아들 때문에 김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술에 기대는 날이 늘면서 환갑을 앞둔 김씨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몸무게가 32㎏까지 떨어졌다. 최근엔 악성빈혈로 갑자기 쓰러져 두달간 입원했다. 퇴원 뒤에도 어지럼증으로 화장실에서 넘어져 머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인 김씨는 현재 동사무소를 청소하거나 폐지 줍는 일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지탱하고 있다. 13평짜리 지하 다세대주택에서 사는 그에게 나라는 월 43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방치된 손자들은 제대로 크지 못했다. 또래에 비해 성장이 느렸던 둘째 손자 민혁도 얼마 전, 지적장애 3급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학교를 무단 결석하거나 주변 물건을 훔치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이고 있다. “아들을 통제할 수 없고, 손자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괴롭다”고 할머니 김씨는 한탄했다. 지역 복지기관들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고 있다. 준혁과 민혁은 방과 후 지역아동센터에 다녔으나 친구들과 마찰이 잦아 그만뒀다. 아이들을 가정에서 키우는 게 더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한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아이들을 쉼터로 옮기려고 했지만, 준혁·민혁 형제는 할머니한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반대했다. 지난달부터 서울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활동보조인을 파견해 가사 및 준혁 형제의 상담을 돕고 있다. 지적장애 판정을 받은 동생 민혁도 문제지만, 형 준혁의 상태도 심상치 않다. 내성적인 준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았는데, 지난해 가을부터는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할머니를 때리는 등 폭력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우울지수가 높아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신은경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사회복지사는 “준혁은 자존감이 낮고 가족에 대한 분노가 많으며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정서 상태를 갖고 있다”며 “준혁은 장애로 등록되지 않아 정서재활 치료비를 100%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데, 자살 위험에서 준혁이를 구해낼 심리 치료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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