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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패션디자이너인 스티브 제이(정혁서·왼쪽)와 요니 피(배승연)가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플래그십 스토어 테라스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앉았다. 뒤에 있는 벽화는 건물 공사를 마친 뒤 스티브가 손수 두 사람과 반려동물들을 그려넣은 것이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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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짝]
‘패션디자이너’ 스티브J & 요니P
대학때 과 커플이었던 두 사람
나란히 런던유학을 떠났고
덜컥 공동브랜드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귀국과 결혼과 일
11개국 40개 매장을 키워냈다
“6달마다 컬렉션을 거듭할수록
둘이니까 훨씬 낫더라고요
행복한 삶이 밝은 옷을 만들죠
내년엔 2세를 만들 거예요”
그들이 펴낸 책에도, 숍 입구에도 ‘투 헤즈 아 베터 댄 원’(Two heads are better than one)이라는 영어문장이 적혀 있다. 둘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다, 즉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거다. 가수 이효리는 그들을 두고 ‘엽기발랄 솔메이트’라 표현하기도 했다.
요즘 한국 패션계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이자 ‘환상의 짝꿍’인 패션디자이너 스티브 제이(정혁서·36)와 요니 피(배승연·35)를 지난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들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난달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패션위크에서 ‘스티브 제이 앤 요니 킴’ 컬렉션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은 패션쇼 중 하나였다. 입장 못한 관람객들에게 두 사람이 사과까지 해야 했을 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화려한 쇼장에 견줘보면 사무실은 단출했다. 1~2층 매장을 연결한 철제 계단에는 검정 고양이 두마리가 편안하게 졸고 있었다. 그들 곁을 스쳐 올라가니, 자그마한 3층 사무실이 나왔다. 직원이 ‘다방식 커피’를 타줬고, 뒤따라 들어온 그들은 티백 녹차를 가져다 마셨다. 노란머리에 짙은 아이라인을 그린 요니와 콧수염 기른 스티브는 튀는 외모로도 유명하다. 반면 매장이나 사무실이나 이웃집 같은 자연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대학 때 ‘과 커플’이었던 두 사람의 유학 시절은 패션학도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전설이다. 2003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 스티브를 뒤따라 유학길에 오른 요니는 2007년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석사)을 졸업했고, 2008년 스티브도 ‘센트럴 세인트 마틴 칼리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2006년 런던에서 ‘스티브 요니’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2006~2007년 삼성패션디자인펀드에 선정되면서 컬렉션도 꾸준히 했다. 스티브는 날고 기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졸업작품 쇼 우승을 거머쥐며 영국판 <보그>에 소개됐다. 요니는 학생 신분으로 패션회사 ‘키사’의 헤드 디자이너로 뽑혀 교수를 놀라게 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한 ‘이중생활’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해보려고 노력했어요. 콘테스트도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고요. 그러는 과정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실패든 성공이든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스티브)
2010년 두 사람은 한국으로 브랜드를 이전했다. 먼저 귀국한 스티브가 “패션계 위상이 높아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결단을 내렸고, 망설이는 요니를 설득해 “돌아온 지 사흘 만에 서울 강남 가로수길에 의자도 없이 덜렁 책상 하나만 놓고”(스티브) 사무실을 차렸다. “우린 뭐든 초스피드예요.”(요니)
귀국 뒤엔 양가에서 밀어붙여 한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물론 전날까지 둘 다 밤새 야근을 하긴 했지만. ‘스티브 제이 앤 요니 피’라는 이름으로 11개국 40개 매장을 만든 지금까지 20대를 오롯이 일과 공부에 바쳤고, 30대 중반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다.
한성대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던 2학년 1학기, 아웃사이더처럼 겉돌며 지내던 스티브의 눈에 햇살 가득한 봄볕 속 환하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요니가 들어온 건 “운명” 같았다. 수업시간에 스티브가 ‘내일 동물원 갈래?’라며 쪽지를 보냈고, ‘좋아!’ 하고 요니가 단박에 적어 보낸 뒤 만 15년이 훌쩍 넘도록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지겨울 법도 하건만, 두 사람은 놀랍게도 아직 “연인보다 베스트프렌드 같고, 말하고 싶을 때 가장 말하고 싶은 사람”(요니)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저희처럼 이렇게 오랜 시간 누구와 같이 보내는 경험을 안 해봤을 텐데, 하면 또 재미있어요.(웃음) 친구로서 지내는 시간이 많거든요. 재밌는 친구-요니-가 있는데, 부부로서도 재미있으니 좋죠. 사람은 카멜레온 같아 늘 변하는데 요니에게서 그런 변화를 발견할 수 있어요. 운명도 있는 것 같고요.”(스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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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제이 앤 요니 피’가 최근 선보인 꽃무늬 자수가 들어간 데님(왼쪽)은 두 사람이 ‘베스트 작품’으로 꼽은 것 중 하나다. 페이즐리 무늬(오른쪽) 의상들도 반응이 좋다. 영감을 얻어 손으로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뒤 그래픽으로 만든 것이다. 스티브 제이 앤 요니 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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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어른으로 성장한 ‘두 친구’는 “같이 배우고 영감을 받았고, 생각과 방향도 비슷했다”(요니)고 한다. 둘 간의 균열이나 마찰은 없었냐고 하자 스티브는 “컬렉션을 거듭할수록 균형이 맞춰지고 점점 좋아져 시너지 효과가 확실히 났다. 혼자 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생각이 없잖아 있지만 둘이니까 훨씬 낫더라”고 했다. 요니도 “혼자라면 상상도 못 했을 것들을, 둘이니까 함께 해올 수 있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줄’도, ‘빽’도 없었던데다 어리기까지 한 동양의 디자이너들이 영국에서 패션 브랜드를 만들며 장벽에 부딪힌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윤을 따져가며 경영수업을 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 다 디자이너잖아요. 이익보다 ‘감성 경영’을 했어요. 한 사람은 경영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를 많이 나눴고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우리의 스타일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지금 모습이 나온 것 같아요. 이윤은 더뎠을지 몰라도.”(요니)
“저희가 처음에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이게 아닌가’ 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잘한 거 같아요. 옛날엔 좋은 원단을 보면, 그러면 안 되는데, 둘이 같이 일단 ‘지르고’ 그랬죠. 그 원단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웃음) 콘테스트에 나가 상으로 2만유로를 받았는데 거기에 돈을 더해서 원단을 산걸요.”(스티브)
둘 가운데 누구도 ‘다음 시즌을 위해 자금을 아끼자’고 하지 않았다. 돈이고 에너지고 남김없이 쏟아부어 6개월마다 컬렉션을 했다. 음악과 설치미술로 예술성을 더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영감을 얻고, 노숙인을 쫓아다니며 스타일 궁리도 했다. 온몸으로 ‘문화’를 학습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의 옷은 “웨어러블(입기 좋은) 하면서도 회화적 감성을 더해 완성도 있는 스타일”(스티브)을 지향한다. 편하게 입을 수 있지만 독특한 패턴이나 상징이 반드시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일 재미에 푹 빠져 사는 그들에게 아이를 낳으라는 압력은 없는지 묻자 대뜸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저희는 사실 ‘우리만의 세상’을 살기보다 행복한 삶을 꿈꿔요. 저희 옷이 밝잖아요. 우리의 행복한 삶이 우리 옷을 밝게 만들어요. 결혼도 그랬고, 아기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내년엔 2세도 생각하고 있어요.”
요니가 얘기하자 스티브는 “작년에도 올해 낳는다고 했어”라며 살짝 타박했다. 둘이 한바탕 웃고 나선 금세 신이 나 주거니받거니 수다를 이어갔다. “2세가 나오면 또 더 재밌는 룩이 펼쳐질 것 같아. 베이비 라인 막 나오고….”(요니) “저도 재밌을 것 같고, 작업에 아이 영향도 많이 받을 것 같아요.”(스티브)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스티브는 “스포츠도 도전이고 일도 도전의 선상”이라고 했다. 둘 다 뭔가 매혹되지 않으면 손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는 체질들이라, 기업에서 오는 프로젝트나 협업(컬래버레이션) 제의도 선택 기준은 딱 한가지다. 재미있을 것. 지금까지 혼이 쏙 빠지게 재밌는 일을 하면 눈물이 쑥 빠지게 멋진 결과가 나왔다.
“돈이 된다거나 억지로 하는 거는 하기가 싫고, 재미있어서 하는 게 저희에게 맞는 거예요.”(요니) “저희가 진짜 재밌고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결과물들에서 차이가 나요.”(스티브)
그렇다고 언제나 신명나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패션쇼를 준비하면서는 ‘받지 말자’ 작정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오곤 한다. 요니의 경우 “피날레 때 축하를 많이 받으면서 치유가 된다”고 했고, 스티브는 “놀거나 가족들이랑 같이 있는 게 치유”라고 말했다. ‘가족은 원래 애증관계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오래 외국에 떨어져 지냈잖아요. 그래서 가족들이 더 소중하고, 짠한 감정이 있어요. 영국에서 돌아와선 늙어계신 엄마 아빠를 보고 막 울었어요.”(요니)
그간 성과도 많았다. 2010년 코리아 패션대상에서 ‘올해의 디자이너상’으로 지식경제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11년엔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스티브&요니’s 디자인 스튜디오>를 냈다. 방송을 하면서 연예인만큼 유명세도 탔지만, 엉뚱한 시도를 했다가 얻는 ‘생고생’도 부지기수였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려고 한남동 뒷골목 30년 된 세탁소 건물을 얻어 직접 리모델링 공사에 나섰던 것도 그렇다. 문을 먼저 뜯어버려 한겨울 찬바람 속에서 컬렉션 의상을 만들었고, 어이없게도 봄이 되자 전문가에게 공사를 맡겼다.
영국의 다국적 친구들 속에서 스펀지처럼 상대방의 문화를 흡수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셜테이너로 변모한 가수 이효리와 친구들이 함께 케이블 채널 리얼리티 프로그램 <골든12>를 찍고 난 뒤, 환경과 동물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그들의 사무실 테라스 텃밭에 딸기가 꽃을 피우고, 상춧잎이 반들반들 자라고 있는 것도 ‘보여주기식 방송’을 한 게 아니라 실제 삶을 바꿔버린 덕이다.
“방송하면서 텃밭을 가꾸다 보니 거기에 확 빠진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바뀌어서…. 에코백도 그랬고, 저희 퍼(모피)도 초창기엔 잘 팔렸거든요. 그런데 그걸 다시 페이크 무스탕(가짜 모피)으로 바꾸었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기존의 것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실천한 거죠.”(요니)
시장을 너무 염원해도, 예술가의 감성이 너무 지나쳐도 대중은 외면한다. 그러나 예술성을 높여 패션의 영역을 확장시켜가는 것은 문화 창작자가 할 일이다. 단적인 예가 2009년 런던 트래펄가 광장 근처 한국문화원에서 연 프레젠테이션쇼였다. 패션과 행위예술, 설치미술을 포함해 장르를 넘나드는 종합예술에 도전한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얘기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책무 가운데 하나죠.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는 6개월마다 뭔가 새로움과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옷뿐 아니라 전시, 음악과 문화 등을 함께 잘 버무려서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거든요. 문화를 대변하고 즐기는 ‘문화 컬렉션’을 해서 널리 전파하고 싶습니다.”(스티브)
“디자이너들 누구나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하고 싶은 꿈이 있지만, 소소하게는 오가닉한 의상들처럼 솔직하게 제가 좋아하는 것도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남이 아닌 ‘진짜 내 모습’을 대변하고, 행복한 생활이 묻어나는 것들이요. 디자이너로서 삶과 일의 균형이 잘 맞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싶은 것이 꿈이에요.”(요니)
두 사람을 닮은 두 마리의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곁을 지나갔다. 테라스의 딸기꽃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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