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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석 와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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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양현석 와이지 대표 인터뷰
‘서태지와 아이들’ 팬에게 아쉬운 소식을 먼저 전한다. 그들의 데뷔 20돌을 기념할 만한 특별 행사는 없다. 2012년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20년 전 그때 서태지와 함께 팀을 꾸렸던 양현석(43)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로 지난 20년을 정리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 축하공연’ 등의 깜짝쇼는 없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춤 배우겠다고 찾아온 태지첫인상은 피터팬이랄까
그때 음악은 오늘 들어도 좋아 하, 당연한 소리다. 자그마치 20년이다. 아이들, 혹은 아이돌로 1990년대 초반을 살았던 세 남자는 이제 아이돌의 조상급에 해당하는 40대가 됐다. 당시 ‘양군’으로 불렸던 양 대표는 이제 뱃속에 있는 둘째를 포함해 아이 둘과 빅뱅, 투애니원(2NE1) 등 아이돌을 함께 키우는 ‘양아버지’가 됐다. 양아버지란 와이지 소속 힙합그룹 원타임(1TYM)의 멤버 송백경이 만들어낸 호칭으로, ‘양현석+아버지’란 뜻이다. 많게는 서른살 가까이 차이나는 양 대표를 더이상 ‘형’으로 부르기 민망하다는 와이지 신인 가수의 ‘고충’을 헤아린 배려인 셈이다. 그런 그들에게 20년 전처럼 머리에 무스를 칠갑하고 책가방 둘러멘 채 회오리춤을 춰보라고 바라는 건 무리일 수 있다. 대신 양 대표는 13일과 15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 그 시절에 얽힌 추억 등을 밝혔다. 한편 그는 오는 29일 새 앨범 발매와 함께 컴백하는 빅뱅과 관련해 “나에게 빅뱅은 친자식 같은 존재”라며 “몇 달 전부터 오직 ‘빅뱅 부활’만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먼저 “팀 하자”고 꼬셨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20돌의 느낌은 어떤가? “그때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이다. 그런데 계절은 변하고 세월은 흐른다. 지금은 와이지 일이 워낙 바빠 소중했던 기억마저 잊고 사는 것 같다.”
-‘양현석 와이지 대표’만이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 시기의 ‘양군’을 기억하는 팬도 있을 텐데. “맞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양현석이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빅뱅과 투애니원이 인기를 얻으며 한류 바람이 거세진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양 대표와 양군 가운데 어떤 양현석으로 기억되고 싶나? “1990년 서태지라는 훌륭한 아티스트를 만나 팀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창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춤이 너무 좋은 댄서였다. 서태지가 음악을 만들었다면, 나는 안무 및 패션 콘셉트 구성에 힘을 쏟았다. 아,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 내가 솔로 데뷔를 준비하던 서태지를 설득해 팀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일종의 기획자 역할을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재능은 원래 그쪽이었다.” -기획자로서 판단해 달라. 지금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다면 성공할까? “음, 당시의 대중음악 환경은 우리 편이었다. 우리가 데뷔하기 직전 <에스비에스>(SBS)가 막 개국(1991년 12월9일)했으니, 방송사도 많지 않았고 인터넷도 빠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장르를 넘나드는 파격적 음악을 선보인 것이다. 집중적 관심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의 인기가 워낙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왔다면, (그때만큼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하.” -첫 만남 당시 서태지의 인상은 어땠나? “그때가 1990년이었다. 그는 뭔가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춤을 배우겠다며 찾아왔는데 록그룹 시나위 활동을 마친 직후라 머리가 굉장히 길었고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장발의 춤 수강생이라니, 놀랐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솔직히 당시에는 내가 춤에 미친 상태였으니까 그에게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다. 몇번 만나면서 동화 속 세상을 사는 피터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만든 ‘난 알아요’를 듣고 난 뒤였다. 그의 집에서 그 노래를 함께 들으며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1집 앨범(1992년 발매)이 나오기 전까지 1~2년간 잠자는 시간만 빼고 늘 함께 붙어 다닌,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도 서태지는 전화도 잘 안 하고 돈도 안 갖고 다녔다.” -가장 좋았던 시기와 그 반대는? “팀으로 활동했던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4집 <컴백홈> 앨범을 낼 때였다. 내가 힙합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힙합곡 위주였던 컴백홈에 가장 애착이 간다. 지금도 당시 내가 춤추던 모습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1~2집도 좋았다. 반면 3집 <발해를 꿈꾸며>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록 색깔이 짙은 앨범이어서 랩과 힙합을 좋아한 나로서는 나머지 앨범에 견줘 힘들었다. 팀을 위해서는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그 곡의 안무를 짜기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약 2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그때 앨범을 듣나? “당시 뮤직비디오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내 아이패드에 넣어두고 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여행 등을 떠날 때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지금도 당시 음악에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교실 이데아’ 등의 곡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많이 던졌다. 그때 양 대표는 20대였는데 40대가 된 지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또다른 20년이 지난다 해도 우리 사회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주목했던 학교폭력, 사교육 열풍 등 청소년을 둘러싼 문제도 여전하다. 다만 그때 우리의 메시지가 문제제기 수준에 그쳤다면, 기성세대가 된 지금은 과연 우리 아이들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좀더 폭넓은 고민을 하고 싶다.”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워
셋이서 다시 한 무대?
솔직히 그런 일은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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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석 와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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