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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17 22:06 수정 : 2012.02.17 22:06

양현석 와이지 대표

[토요판] 커버스토리|양현석 와이지 대표 인터뷰

‘서태지와 아이들’ 팬에게 아쉬운 소식을 먼저 전한다. 그들의 데뷔 20돌을 기념할 만한 특별 행사는 없다. 2012년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20년 전 그때 서태지와 함께 팀을 꾸렸던 양현석(43)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로 지난 20년을 정리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 축하공연’ 등의 깜짝쇼는 없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춤 배우겠다고 찾아온 태지
첫인상은 피터팬이랄까
그때 음악은 오늘 들어도 좋아

하, 당연한 소리다. 자그마치 20년이다. 아이들, 혹은 아이돌로 1990년대 초반을 살았던 세 남자는 이제 아이돌의 조상급에 해당하는 40대가 됐다. 당시 ‘양군’으로 불렸던 양 대표는 이제 뱃속에 있는 둘째를 포함해 아이 둘과 빅뱅, 투애니원(2NE1) 등 아이돌을 함께 키우는 ‘양아버지’가 됐다. 양아버지란 와이지 소속 힙합그룹 원타임(1TYM)의 멤버 송백경이 만들어낸 호칭으로, ‘양현석+아버지’란 뜻이다. 많게는 서른살 가까이 차이나는 양 대표를 더이상 ‘형’으로 부르기 민망하다는 와이지 신인 가수의 ‘고충’을 헤아린 배려인 셈이다. 그런 그들에게 20년 전처럼 머리에 무스를 칠갑하고 책가방 둘러멘 채 회오리춤을 춰보라고 바라는 건 무리일 수 있다.

대신 양 대표는 13일과 15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 그 시절에 얽힌 추억 등을 밝혔다. 한편 그는 오는 29일 새 앨범 발매와 함께 컴백하는 빅뱅과 관련해 “나에게 빅뱅은 친자식 같은 존재”라며 “몇 달 전부터 오직 ‘빅뱅 부활’만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먼저 “팀 하자”고 꼬셨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20돌의 느낌은 어떤가?

“그때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 덕분이다. 그런데 계절은 변하고 세월은 흐른다. 지금은 와이지 일이 워낙 바빠 소중했던 기억마저 잊고 사는 것 같다.”


-‘양현석 와이지 대표’만이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 시기의 ‘양군’을 기억하는 팬도 있을 텐데.

“맞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양현석이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빅뱅과 투애니원이 인기를 얻으며 한류 바람이 거세진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양 대표와 양군 가운데 어떤 양현석으로 기억되고 싶나?

“1990년 서태지라는 훌륭한 아티스트를 만나 팀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창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춤이 너무 좋은 댄서였다. 서태지가 음악을 만들었다면, 나는 안무 및 패션 콘셉트 구성에 힘을 쏟았다. 아,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 내가 솔로 데뷔를 준비하던 서태지를 설득해 팀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일종의 기획자 역할을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재능은 원래 그쪽이었다.”

-기획자로서 판단해 달라. 지금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다면 성공할까?

“음, 당시의 대중음악 환경은 우리 편이었다. 우리가 데뷔하기 직전 <에스비에스>(SBS)가 막 개국(1991년 12월9일)했으니, 방송사도 많지 않았고 인터넷도 빠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장르를 넘나드는 파격적 음악을 선보인 것이다. 집중적 관심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의 인기가 워낙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왔다면, (그때만큼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하.”

-첫 만남 당시 서태지의 인상은 어땠나?

“그때가 1990년이었다. 그는 뭔가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춤을 배우겠다며 찾아왔는데 록그룹 시나위 활동을 마친 직후라 머리가 굉장히 길었고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장발의 춤 수강생이라니, 놀랐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솔직히 당시에는 내가 춤에 미친 상태였으니까 그에게 그렇게 큰 관심은 없었다. 몇번 만나면서 동화 속 세상을 사는 피터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만든 ‘난 알아요’를 듣고 난 뒤였다. 그의 집에서 그 노래를 함께 들으며 그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 1집 앨범(1992년 발매)이 나오기 전까지 1~2년간 잠자는 시간만 빼고 늘 함께 붙어 다닌,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도 서태지는 전화도 잘 안 하고 돈도 안 갖고 다녔다.”

-가장 좋았던 시기와 그 반대는?

“팀으로 활동했던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4집 <컴백홈> 앨범을 낼 때였다. 내가 힙합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힙합곡 위주였던 컴백홈에 가장 애착이 간다. 지금도 당시 내가 춤추던 모습을 보며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1~2집도 좋았다. 반면 3집 <발해를 꿈꾸며>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록 색깔이 짙은 앨범이어서 랩과 힙합을 좋아한 나로서는 나머지 앨범에 견줘 힘들었다. 팀을 위해서는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그 곡의 안무를 짜기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약 2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그때 앨범을 듣나?

“당시 뮤직비디오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내 아이패드에 넣어두고 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여행 등을 떠날 때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 지금도 당시 음악에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교실 이데아’ 등의 곡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많이 던졌다. 그때 양 대표는 20대였는데 40대가 된 지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또다른 20년이 지난다 해도 우리 사회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주목했던 학교폭력, 사교육 열풍 등 청소년을 둘러싼 문제도 여전하다. 다만 그때 우리의 메시지가 문제제기 수준에 그쳤다면, 기성세대가 된 지금은 과연 우리 아이들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좀더 폭넓은 고민을 하고 싶다.”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워
셋이서 다시 한 무대?
솔직히 그런 일은 없을 것


양현석 와이지 대표
-이를테면?

“나는 대학도 가지 못했고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다. 음악이 좋아 음악을 할 뿐이다. 음악을 통해 고민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메시지를 함께 주고 싶다. 또 개인적으로는 한 아이의 아빠로서 내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돕고 싶다. 청소년 문제의 상당수는 불필요한 교육은 많고 참된 교육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이가 사교육이나 해외 유학 대신 부모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20돌 기념 공연 등의 행사는 없나?

“10주년 때도, 15주년 때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많은 팬이 원하는데 들어주지 못해 죄송하다. 한편으로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둘 때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도 해본다.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 셋이 한 무대에 오르는 행사와 관련해) 솔직히 말하면 그런 가능성은 없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떤 존재였나?

“대중음악의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통해 랩과 힙합음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했고 우리의 열혈 팬이었던 ‘지누션’과 ‘원타임’이 그 영향을 받아 나왔다. 빅뱅과 투애니원은 다시 지누션과 원타임 등의 음악을 보며 자란 세대였다. 지금 와이지에서 연습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은 제2의 빅뱅, 투애니원을 꿈꾼다. 지금 나오는 힙합, 아이돌 뮤지션의 대부분은 서태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친구들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요즘은 오로지 ‘빅뱅의 도약’ 생각뿐

-와이지 대표로서 29일 빅뱅의 컴백을 앞두고 있다.

“지난 몇달간 빅뱅 새 앨범에 몰입하느라 다른 일을 거의 못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음악시장이 주요 경쟁무대였다면 2~3년 전부터 한국의 대중음악 콘텐츠가 아시아를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까지 진출하고 있다. 빅뱅의 이번 음반도 이제는 전세계 케이팝 팬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지난해 빅뱅 멤버 대성의 교통사고, 지드래곤의 대마초 파문 등이 있었는데 어떤 심정이었나.

“이 친구들이 13살 되던 해에 나를 처음 만났으니 내가 거의 부모나 다름없는 입장인데, 지난해 안 좋은 일이 겹쳐 나에게는 가장 힘든 한 해였다. 세상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거다. 자신에게 일어난 힘든 일은 괜찮아도 자식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게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와이지 소속 뮤지션 가운데 빅뱅한테 쏠리는 애정이 가장 크다. 이 친구들이 다시 도약하는 것이 내 몫의 일이다. 요즘은 그 생각뿐이다.”

-세계 시장에서 빅뱅, 투애니원 등이 갖는 핵심 경쟁력은 뭐라고 보나.

“서태지와 아이들 할 때도 일본에 진출하려 했었지만 문화적으로 힘들었다. 일본인이 한국 가수를 바라보는 관점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재능과 끼는 아시아 최강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성대를 타고났다. 한국 여성이 다른 아시아인보다 아름답다는 사실도 무시못할 장점이다. 또한 렙과 힙합, 아르앤비(R&B) 등 서양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한국적으로 재해석 한다는 점에서 해외 진출에 유리하다. 미국이나 유럽인이 들을 때 새로운 듯하면서도 아주 생소하지 않은 거다. 지금 한국이 내놓는 아이돌 콘텐츠는 음식으로 치면 한국형 퓨전요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외국인이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한국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렸다는 사실도 행운이었다.”

-반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외 진출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한국에서는 방송사도 많지 않았고 인터넷도 빠르지 않았으니 독점적 인기를 누릴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해외에 우리 음악을 알리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대중음악 시장이 지나치게 아이돌 위주라는 우려도 있다.

“언더 그라운드 뮤지션의 실력이 더 뛰어나고 아이돌 그룹의 실력은 뒤떨어진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반대다. 케이팝이 국제적 인기를 얻는 것은 그만큼 시장성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시장성과 실력이 반비례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 대중이 찾지 않으면 묻히는 것이다.”

-실력이 있어도 설 자리가 없는 뮤지션도 있지 않나.

“투애니원과 빅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언더그라운드적 문화와 매니지먼트가 효과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더 뮤지션이니까 언더에서만 활동하겠다’고 생각하면 그 길로 가는 것이다. 다만 언더에 있는 친구들을 시장논리에 어긋나지 않게 소개할 수 있는 창구를 늘리는 것은 기획자로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언더에서 실력있는 아티스트가 많아질수록 메이저 음악시장도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사진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제공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 가수 양현석은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현 기획’을 세우며 가수 및 음반 기획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에스비에스(SBS)의 <서바이벌 오디션 케이팝 스타>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와이지를 코스닥 주식시장에 상장해 단숨에 1000억원대 주식부자 대열에 합류한 그는 “서태지라는 훌륭한 아티스트와 팀으로 활동하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며 자신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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