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티브이방송 <사자후>가 2009년 1월20일 아침 7시20분32초부터 37초 사이에 촬영한 동영상. 화염은 망루 4층 지붕 처마 아래서부터 모서리 틈새를 따라 수직으로 흘러내려와 3층에서 불똥들로 맺히다가 1층 바닥에 닿아 큰불이 되고 이것이 다시 모서리 틈새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맨 오른쪽은 <칼라티브이>가 같은 날 아침 7시6분 무렵 찍은 동영상. 화염병과는 무관한 화염이 망루 지붕 밑 틈새를 따라 수평으로 번지고 있다. 김형태 변호사 제공
|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27> 용산참사 사건(2)
‘엄숙한 이 법정에서 계획적으로 재판의 진행을 방해하고 이 법정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사표현의 장으로 변질시키려 하는 등 범죄 후의 정황도 매우 좋지 않다.’
검찰의 수사기록 3000쪽 제출 거부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계속하는 데 항의해 민변 후배 변호사들이 사임을 하고, 피고인들도 법정에서 뒤돌아 앉았던 일을 두고 판사는 이렇게 판결문에 썼다.
엄숙한 이 법정? 재판받는 사람들이 마음에서 우러나 승복을 하는 재판을 해야 법정이 권위가 서는 법인데, 판사 자신이 저 스스로를 향해 엄숙하단다. 낯 뜨겁다. 1심 부장판사가 철거 상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면서 이런 소리를 할 때 나는 더이상 변호인석에서 이걸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법정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중에 항소심에서 내가 받아 본 3000쪽에는 경찰 책임자들 스스로가 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님을 자백하는 내용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판사의 낯뜨거운 ‘엄숙한 법정’ 운운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이렇게 경찰의 잘못을 자백했다.
“당시 현장상황을 전달받았으면 중단시켰을 것인데, 특공대원들이 어떻게든 작전을 성공시키겠다는 공명심에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팀장이 시너 냄새가 난다는 등의 보고를 하였다면 저는 작전을 중단했을 겁니다. 사실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자들을 망루에 고립시킨 상황에서는 작전을 중단하고 설득작업을 하거나 하면 금방 해결되었을 겁니다.”
1심 재판부는 검사가 3000쪽 열람등사를 허용하라는 법원의 명령까지 거부했는데도 그대로 재판을 강행했다. 내가 만일 그 판사였다면 당연히 법원 직권으로 검찰을 압수, 수색해서 기록을 확보하거나 검찰이 기록을 낼 때까지 재판을 중단했겠다.
변호인들이나 피고인들이 이에 항의한 걸 가지고 ‘엄숙한 법정의 재판 진행을 방해하고 정치적 의사표현의 장으로 삼았다’며 엄벌에 처하다니.
한술 더 떠서 항소심과 대법원은 경찰들이 과잉진압으로 참사가 일어났다고 자백을 한 3000쪽이 제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는 식으로 도저히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때 정권의 시녀 노릇 하던 사법부를 더이상 인정할 수 없다며 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재판 자체를 거부했었다. 말을 안 들으면 판사 목이 날아가는 시절이었으니 그래도 판사들 동정해 줄 구석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세월도 아니건만 어떤 판사들은 기득권층으로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많이 가진 사람들 편을 든다.
당시 화재 동영상들을 보면
망루 4층 지붕 밑에서 시작한
불이 모서리를 타고 번졌다
농성 철거민들이 지붕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을 리 만무하니
검사의 주장은 틀렸다
세녹스 유증기로 가득 찬 망루는
작은 정전기에도 불붙기 쉬웠고
발전기 열도 원인일 수 있었다
“스위치가 꺼져 있었다”는
검사에게 스위치 제출 요구하자
분실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용산참사 1심 부장판사는 그 뒤 고등부장으로 승진했고, 대법원의 주심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1심에서 대법원까지 1년여 세월을 그저 울면서 보냈다. 아니, 지금도 그 일을 돌이키면 눈물이 난다.
2009년 9월, 재판을 맡을 건가 정하기 위해 만난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었다. ‘정치투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변호를 하기로 했다. 80년대 집시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은 문자 그대로 ‘정치투쟁’이었다. 그래서 재판 ‘따위’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재판 거부. ‘그래, 내가 그랬다. 어쩔래. 처벌하려면 해라.’
하지만 용산 참사는 전혀 달랐다. 이건 ‘생존투쟁’이었다. 농성자들이 망루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서 불이 난 건지, 도대체 저걸 정당한 공무집행이라 볼 수 있는지.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했다. 검사가 3000쪽을 안 내놓는다고 재판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 진실을 밝혀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 형량을 1년이라도 줄여야 할 임무가 변호인인 나에게 있었다. 피고인들이나 진압경찰들에 대한 신문을 통해 최대한 사건의 진실을 들어 놓아야지, 재판 거부로 이 기회를 날려 버리면 나중에 세월이 지난 뒤에는 진실규명이 사실상 어려워질 터였다.
나는 <사자후> 인터넷티브이 동영상을 수없이 돌려보고 나서, 한번 해볼 만한 재판이라고 자신을 얻었다. 민변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판을 시작했다.
첫번째 쟁점은 과연 피고인들이 망루 4층에서 2~3층 계단을 올라오던 특공대원들을 향해 불이 붙은 화염병을 던져서 3층 계단에 떨어져 불이 났는지였다. <사자후> 동영상은 망루 문 입구 쪽 정면을 찍은 거였다.
화염병에 점화되어 솟구친 불길은 없었다
|
2009년 2월9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정병두 1차장 검사가 망루 모형을 가리키며 용산참사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검찰은 3000여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
검사는 농성자들이 망루 4층에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계단을 따라 아래로 화염병을 던져 3층 계단에 떨어진 화염병 불꽃이 1층 바닥으로 떨어져 거기에 떠다니던 세녹스에 불이 붙어 대형화재로 번진 거라 했다. 그렇다면 <사자후> 동영상에서는 벽에 가려 처음 사선으로 계단을 따라 던져진 화염병은 보이질 않고 나중에 1층에서 점화되어 위로 솟구치는 불길이 정면 좌측 모서리 틈새로 보여야 했다.
하지만 동영상 7시20분32초부터 37초 사이를 보면 불은 망루 4층 지붕 처마 아래서 시작되고 있는 걸로 판단되었다. 즉, 4층 지붕 처마 아래서부터 화염이 모서리 틈새를 따라 수직으로 아래로 흘러내려와, 3층 창문 위 높이 모서리 틈새에서 불똥들로 맺히면서, 연이어 모서리 틈새를 따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불똥들이 1층 바닥에 닿아 큰불이 되고 역시 모서리 틈새를 따라 위쪽으로 화염이 올라오는 것이 명확하게 관찰되었다.
농성자들이 4층 지붕 처마를 향해 화염병을 던질 리는 만무하고, 동영상에도 화염병과는 상관없는 화염이 불똥으로 맺혀 모서리 틈새를 따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게 확실히 보였다. 이건 검사 주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과정으로 전개된 불이었다.
무엇보다도 7시6분께 동영상에도 똑같은 장면이 있었다. 4층 지붕 밑에서부터 화염이 모서리를 따라 흘러내리면서 불똥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그때는 1층 바닥에 세녹스가 많이 고여 있지 않아 큰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당시를 찍은 또다른 민간 기록인 <칼라티브이> 동영상에 보면 4층 지붕 아래 처마를 따라 불이 수평으로 번져가는 모습도 보인다.
7시6분 동영상 모서리 틈새를 따라 수직, 수평으로 번지는 불 역시 위치나 모양으로 보아 화염병과는 전혀 무관한 게 분명했다. 따라서 당시 망루 안에 있던 농성자들이나 경찰 대부분 이 불을 알아채지 못했다.
4층 처마 아래에서 수평, 수직으로 틈새를 따라 번지는 화염과 불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당시 망루 안에는 세녹스 유증기가 가득 차 있었다. 농성자들은 자가발전기 2대를 돌리기 위해 연료로 세녹스 20리터들이 60통을 망루에 들고 올라갔다. 야간조명과 취사, 한겨울 난방을 위해 발전기를 돌려야 했고 하루에 4통이 들어가니 보름치였다. 망루 짓고 하루 만에 경찰이 진입하자 농성자들은 이 세녹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망루 밖으로 던졌다. 경찰이 옥상을 점거한 상태로 최대 보름 정도 지나면 화염병이고 세녹스고 다 소진되어 화재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농성자들은 경찰이 옥상에 진입하자 세녹스로 만든 화염병을 망루 밖으로 던졌고, 경찰이 1차로 망루 안에 진입해서 1, 2층에서 일부 농성자들을 검거하면서 망루 2층 바닥이 사람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부 아래로 꺼졌다. 이 과정에서 2층에 쌓아둔 세녹스 통들이 넘어지고 세녹스 상당량이 쏟아져 내렸다. 당시 경찰이 소방호스로 엄청난 양의 물을 쏘아댔기 때문에 망루 바닥에 발목까지 물이 차 있었고 이 물 위로 세녹스들이 떠다녔다. 진압 경찰들은 세녹스 냄새가 너무 심해서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환각 증상까지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실장은 법정에 나와 이리 증언했다.
“유증을 형성한 세녹스는 0.2mJ(밀리줄) 정도면 불이 붙는데 사람이 보통 생성할 수 있는 최대 정전기는 200mJ 정도로 봅니다. 1000배 정도 사람이 더 많이 (정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유증기가 공간 내에 퍼져 있다면 어디서나 정전기가 발생해도 상관없습니다. 꼭 유류 표면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세녹스와 발전기를 둘러싼 증언들
망루 안에서는 수십명의 농성자와 경찰들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특공대원 정아무개는 이랬다. “시너가 있는 곳에는 약간의 스파크가 일어나도 불이 잘 나기 때문에 불똥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불이 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층 처마 밑이나 모서리 틈새는 외부 산소가 잘 유입되기 때문에 정전기에 의해 불이 붙기가 더 좋은 위치였다. 나는 발전기의 열도 가능성 중 하나로 제시했다. 세녹스의 발화점은 섭씨 370도가량 되는데 발전기 외벽이나 배기구 온도는 500도까지 올라갔다. 발전기 사용설명서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배기시스템은 특정 재질에는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뜨겁습니다. 발전기 작동중이나 작동 후에도 머플러는 매우 뜨겁습니다. 휘발유 연무는 매우 가연성이 높아 엔진이 시동되면 점화될 수도 있습니다.”
검사는 국과수 감정 결과 망루 안 발전기는 스위치가 “off” 꺼진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1심 현장검증 때 나는 발전기에 집중했다. 망루 밖에 있는 발전기를 살펴보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밖의 것은 스위치가 “on” 켜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검사에게 망루 안에 있던 발전기 스위치를 제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발전기도 불에 탔을 테니 스위치 상태를 보면 꺼진 상태에서 불에 탄 건지, 사후에 꺼진 걸로 조작한 건지를 가려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온 답이 황당했다. 국과수에서 발전기 스위치를 분실했다는 거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국과수가 재판도 안 끝난 상태에서 핵심 감정물을 분실했다니. 나는 지금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발전기가 쟁점이 되기 전인 화재 직후 한 피고인은 검찰에서 화재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부에는 발전기를 이용한 전등을 모두 각 층마다 설치해둔 상태였고 전구에는 불이 다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7시6분 <사자후>나 <칼라티브이>에 처마 밑 틈새를 따라 수직, 수평으로 불이 번지는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증언도 있었다. 한 아주머니는 화재 직후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망루에 있을 때 자가발전기에 의해 불이 나긴 했지만 누군가 (발전기에 연결되어 있는 전등) 코드를 신속히 뽑아 바로 진화가 되었고.”
이 아주머니는 뒤에서는 코드가 아니라 발전기 전원을 껐다고도 진술했으나 앞의 세 번은 경찰이 물을 퍼대 누전된 줄 알고 (전등) 코드를 뽑았다고 진술했다. 발전기는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설령 발전기를 껐다 해도 사용설명서에 나오듯이 한동안 머플러는 매우 뜨거웠다.
이처럼 <사자후> 동영상은 화염병과는 무관한 화재 경과를 보여주고 있었고, 정전기나 자가발전기에 의한 화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망루 안에 있던 진압경찰 대부분이 이 사건 화재 직전 화염병이 던져져 불이 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특공대원들에 대한 기나긴 신문이 시작되었다. <다음주에 계속>
<관련기사>
■
용산참사 사건(1) 그 형사도 법정에서 증언하다 말고 울었다■
용산참사 사건(2) 정치투쟁이라고? 이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야■
용산참사 사건(3) 판사님, 망루 안은 운동장이 아닙니다 ■
용산참사 사건(마지막)저 불타는 용산 남일당 망루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