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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고백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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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듣지 않는 사회, 나까지 날 세우고 싶진 않았다”
‘김두식의 고백’ 16개월 동안 “34명의 고백 담은 거울”
남의 인생 함부로 재단하고
변명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저까지 날 세우고 싶지 않았어요
매번 질문지를 준비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때’와
‘따뜻한 때’가 핵심이었죠
미운 사람 생기면 어쩌냐고요?
친구들과 욕하고 털어버려요
나랑 안 맞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되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말자는 게
이번에 얻은 개인적 교훈이에요
지난 16개월 동안 이 지면은 홍정욱, 정혜신, 이명수, 유시주, 문부식, 유숙열, 박경신, 변영주, 박지선, 김종배, 박선숙, 이지성, 김조광수, 송인수, 강기훈, 김성희, 신대철, 박노자, 김홍신, 공지영, 하종강, 고종석, 김연희, 인재근, 이상호, 김대진, 윤태호, 낸시 랭, 이충걸, 유시민, 김창남, 고미숙, 천명관, 이진순 등 개성 넘치는 34명 인터뷰이의 고백을 담는 거울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김두식의 고백’이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인터뷰어의 주관적 느낌을 털어놓는 공간이기도 했지요. 그분들의 숨겨진 모습을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되고 싶었는데, 돌아보니 거울에 묻은 오래된 먼지처럼 지저분한 저의 내면만 잔뜩 드러낸 인터뷰였던 것 같습니다. <한겨레> 기자들의 질문을 중심으로 저의 변명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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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4개월 동안 34명의 인터뷰이를 만나 따뜻한 공감의 시간을 나누었다는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은 <고백>은 한겨레 토요판의 인기 콘텐츠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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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네 번씩 거절당한 적도 많지요
-인터뷰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인상 비평을 곁들인 인터뷰가 1년 이상 계속되다 보니, ‘문득 깨달았다’, ‘~하지 싶었다’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매회 반복되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고, 이러다 망하지 싶었습니다.(웃음)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최일남 선생 같은 필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1년 이상의 인터뷰는 무리더군요.”
-인터뷰에 나선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려운 철학책을 읽다가 막히면 그 철학자의 전기나 평전을 찾아 읽으면서 출구를 찾을 정도로 늘 ‘인간’에 대한 호기심, 배고픔이 있었어요. 여러 사람과 시끄럽게 어울리는 것, 빙빙 겉도는 대화를 정말 싫어하는 대신에 ‘한 번 만나면 친구, 두 번 만나면 친한 친구, 세 번 만나면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할 정도로 사람을 빨리 깊게 사귀는 편이고요. 그런 저의 눈으로 논쟁적인 인물들의 생생한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고백’의 미덕이 있다면?
“인터뷰는 원고 분량이 깡패예요. ‘고백’이 조금이라도 성공적이었다면 그건 순전히 생초보에게 적지 않은 지면을 맡긴 토요판 편집자의 공입니다. 강재훈, 최우리 기자와 안정적인 팀을 꾸린 것도 엄청난 힘이 됐죠.”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섭외죠. 정말 멋진 사람인데 아직 인터뷰 나온 게 없으면 제가 욕심을 내게 되잖아요. 막상 접촉해 보면 예외 없이 인터뷰라는 걸 원래 안 하는 분이에요. 세 번, 네 번씩 거절당한 적도 많고요. 섭외가 워낙 어렵다 보니 처음에 정한 몇 가지 원칙도 지키지 못했어요.”
-어떤 원칙이었죠?
“예컨대 ‘서울대, 연고대 나온 남자’는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것. 충분히 기회가 많은 분들이라 배제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송인수 선생 때 ‘학벌로 먹고사는 분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그 원칙을 양보하면서 뒤돌아보니 이미 하버드대 출신을 둘이나 인터뷰했더라고요. 서울대 피하려다 하버드대에 치여 죽게 된 거죠.(웃음) ‘다 덧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순간 끈을 놓쳤어요. 어떤 학교 출신이라고 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학교 출신이라고 배제하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그런 웃기는 원칙을 세운 것도, 그걸 지키지 못한 것도 고스란히 저의 한계죠. 여성을 절반 이상 인터뷰할 계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34명 중 13명의 비율을 유지하는 데 그쳤어요. 부끄럽게 생각해요.”
-초반에는 오해도 좀 있었죠?
“인터뷰가 녹취된 것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의외로 많더군요. 하지만 다큐 영화와 마찬가지로 인터뷰의 생명은 큰 줄기를 잡아내는 편집 작업에 있어요. 세 시간을 녹취하면 원고지 250장 정도가 되는데, 그걸 36장 또는 26장으로 줄여야 하니까요. 첫 번째 홍정욱 의원 기사가 나간 후 ‘어차피 편집이라면 상대방의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초고는 미리 보여주고 의견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그때부터는 빠짐없이 인터뷰이의 초고 확인 과정을 거쳤죠. ‘인터뷰 대상자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식의 비판을 받은 기사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친 거예요. 대부분 팩트를 바로잡는 수준에서 양식을 지켜주셨고요.”
정혜신·이명수 부부의 펄떡펄떡 뛰던 생동감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했죠?
“‘오프 더 레코드’ 없이 이야기를 쏟아낸 후 문제 될 부분을 모두 빼고 긍정적인 얘기만 써 달라고 한 경우가 한 번 있었죠. 제가 저널리즘에 반쯤이라도 발을 걸친 상태에서 그럴 수는 없었어요. 기사 나가고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셔서 할 수 없이 ‘녹취록 공개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했죠. 잠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경험이 부족한 분이었어요. 제가 마음고생을 하는 걸 보고, 신문사 사람들은 ‘거봐라. 초고를 보여주지 말라고 했지’ 하며 오히려 고소해하는 눈치였어요.(웃음) 그래도 오류를 막는다는 점에서 장점이 더 많았다고 자평합니다. 초고를 확인받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더 깊이 알게 된 것도 사실이고요. ‘오류가 생기면 김두식 문제지, 내 문제냐?’며 웃으면서 끝까지 초고 확인을 거부한 김대진 교수가 대표적인 멋쟁이였죠. 1면 톱으로 간 유시민 장관 역시 한 글자도 손대지 않았는데, 두 분 모두 인터뷰이로서 어떤 경지에 이른 분들이었어요. 욕먹을 걸 알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고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는 건 공지영 선생도 비슷했고요. 박선숙 의원은 김근태 의장 관련된 얘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 후 ‘정리하신 원고가 7057자, 원고지 36장이었는데, 제가 보내는 파일은 7058자, 36.1장입니다’라면서 분량을 맞추기 위해 빼야 할 부분까지 조율했어요. 마감에 쫓기는 기자들의 필요를 아는 분이었죠. 그가 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박경신 교수는 누나에게 나쁜 영향이 있을까봐 기사 나가기 직전까지 망설였는데, 오히려 누님께서 더 적극적으로 격려해 주셨던 게 생각나네요. 집요하게 수정을 요구했던 몇 분은 대체로 자기애가 강한 분들이었어요. 그분들과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도 유익한 경험이었죠.”
-따사로운 인터뷰이지만, 날이 선 비판이 없어도 너무 없고, 달달하기만 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문화, 도무지 변명을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굳이 저까지 날을 세우고 싶지 않았어요. 논쟁보다는 단 한 가지라도 생생한 내러티브를 담아내고 싶었죠. 매번 서너 페이지 분량의 질문지를 준비했지만, 핵심은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때’와 ‘따뜻한 때’ 딱 두 개였어요.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라고 대답한 분이 너무 많아서 실제 지면에는 그 내용을 담지 못했던 것도 기록해두고 싶네요.”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누구였는지, 솔직히 정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인터뷰이가 있었는지?
“다들 매력적이지만 사람마다 결이 달라요. 똑같은 인터뷰를 어떤 독자는 최고, 어떤 독자는 최악이라 평가하는 걸 보면, 독자들도 결이 다르고요. 인터뷰이의 삶의 결이 우연히 어떤 독자의 결에 포개질 때 그 독자에게 의미 있는 기사가 될 뿐이죠. 딱 하나 꼽으라면 정혜신, 이명수 부부의 펄떡펄떡 뛰는 생동감이 제게는 참 매력적이었어요. ‘무의식까지 가면 누구의 행동이든 이유가 있고 근원이 있고 동기가 있다’는 정혜신 선생 말씀은 제 인터뷰의 기본 정신이 됐죠. 제가 처음 의도했던 고백의 의미가 가장 잘 담긴 것은 문부식 선생 인터뷰였고요. 성노동자 김연희씨가 보여준 솔직하고 따뜻한 지성, 윤태호, 천명관 선생의 독특한 통찰력도 기억에 남네요. 낸시 랭씨의 경우 인터뷰 당시 뭔가 이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최근의 여러 보도를 보고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감정기복 심한 30대 중반의 기자라 밝히고) 살다 보면 미운 사람이 있고 그 미운 사람을 또 감정대로 미워하다 보면 내가 미워지는데, 교수님은 미운 사람들이 있는지. 그런 감정이 들면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미운 사람이 생기면 충분히 미워해요. 세 번 이상 만난 믿을 만한 친구들과 그놈을 욕하죠.(웃음) 그리고 털어버려요. 중요한 건 함께 욕할 수 있는 친구의 존재예요. 나랑 안 맞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되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말고, 말 통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게 이번 인터뷰에서 얻은 개인적 교훈이에요. 아까운 인생이잖아요.”
‘오늘을 재밌게 살고픈 이기적인 사람’
-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겨요. 가족일 때가 많죠. 어린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엄마 아빠의 부재를 경험한 분이 많았고, 이혼을 비롯한 가정적인 아픔을 가진 분도 적지 않았어요.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저 이혼했는데, 그 얘기는 쓰지 맙시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아버지의 심한 폭력처럼 너무 아픈 이야기는 제가 알아서 뺐고요. 우리만큼 이상적인 가족상과 실제 가족의 거리가 먼 사회도 흔치 않을 거예요.”
-지난 인터뷰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해요. 누구나 결핍은 있죠. 그 결핍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좀 갈릴 뿐인 것 같아요.”
-(몇 번 의견을 물었다가 거절당해 상처받은 기자라고 밝히고) 2005년부터 신문 기고, 인터뷰, 멘트 인용을 대부분 거절해 오셨는데 이유가 뭔가요? 너무 고고한 것 아닌가요?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유력한 지식인이 됐는데 자기 의견을 밝히는 게 사회적 책임 아닌가요?
“신문에 글을 쓸 때면 안전장치로 수많은 전제를 달았어요. 칭찬만 듣고 싶어서였죠. 진중권, 조갑제 선생의 눈으로 제 글을 읽고 또 읽으며 허점을 보완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 방 지르는 맛’이 없었어요. 2005년에 보수적인 신문 몇 개에서 칼럼 연재를 부탁받으면서 내가 참 색깔 없는 글쟁이구나 깨닫고 글쓰기를 중단했어요. 멘트 인용은 일단 응하기 시작하니 법 관련된 무슨 일이 터지든 기자들 전화가 와서 일을 할 수가 없더군요. 거기 정신없이 응하면 기자들은 또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해. 한물갔어’ 하고 내다버리잖아요.(웃음) 사회적 책임 찾다가 공명심에 쩐 인간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깨달은 건데, 기본적으로 저는 현안을 쫓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그냥 오늘을 재밌게 살고 싶은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원래는 “인터뷰를 마친다”는 지난 회 마지막 문장으로 깔끔하게 연재를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김두식 자신의 고백으로 연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토요판 편집진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뭐가 ‘쿨’한 것인지는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자신을 드러내고픈 은근한 욕망 때문에 결국 스타일을 구기는 사람. 우편향된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손톱만큼의 애정을 비쳤다는 이유로 진보라 오해받아온 사람. 그의 고백은 여기까지입니다. 격주로 멋진 남녀와 사랑에 빠졌던 지난 16개월, 참 행복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조금은 행복하셨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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