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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0 20:11 수정 : 2013.05.24 19:30

지난달 25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진순 교수는 자신이 운동권 학생이던 1980년대를 “시대적 고민이 실존적 고민으로 바로 연결되던 불행한 시대”였다고 돌아봤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여야 망라한 정치권 386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99년 만든 ‘제3의 힘’ 참여
2000년 룸살롱 사건으로 해체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가다

“일단 살아남아 힘을 갖자”고
미친듯이 달려오기만 한 386들
옛날에 뭐 했는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한겨레> 토요판에 ‘엄마의 콤플렉스’를 연재하는 이진순 올드도미니언대 교수는 한때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의 실무위원으로 인터넷 홍보를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제3의 힘’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첫 번째 서울대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정우 변호사를 중심으로 김영춘, 송영길, 정태근, 우상호, 이인영, 고진화, 천호선, 김서용 등 여야를 망라한 이른바 ‘386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1999년 창립한 정치운동 단체입니다. “썩어빠진 구정치”를 대체할 주역임을 자부했던 이 단체는 “독자적인 정당 건설을 몇 년 뒤로 미루되, 2000년 총선에서 국회 진출을 원하는 회원의 경우 나중에 ‘제3의 힘’으로 원대복귀하는 것을 조건으로 출마를 허용한다”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마련했을 정도로 현실 정치 참여를 자신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5·18 전야제 후 일부 젊은 정치인들이 벌인 술자리가 임수경씨에 의해 ‘제3의 힘’ 게시판에 폭로된 데 이어, 이정우 총무와 실무위원 전원이 게시판 글 삭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이 조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허무한 결말이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 코너에 유난히 자주 등장했던 그 세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 저는 마침 이진순 교수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몇 년 전 어느 학술발표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제대로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감히 해결책을 마련해줍네 마네 끊임없이 계몽하려고만 했다”며 자신의 20대를 눈물로 고백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었습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겨우 인터뷰에 응한 그는 “지난 시절의 무용담은 늘어놓고 싶지 않다”며 미리 선부터 그었습니다. 일단 근황부터 물었습니다.

“매주 월수금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서울숲에 가서 건강달리기 모임에 참석해요. 주로 성동구 아줌마들이 모여서 아무런 연고 없이, 회비도 없이, 하다못해 회원 명단도 없이 그저 함께 걷는 모임이에요. 만나서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지만 사실은 서로 연락처도 모르는 탈근대적인 모임이죠(웃음). 처음에 ‘무슨 아파트 사는 누구 엄마예요’라고 제 소개를 하니, ‘우리는 누구 엄마라고 안 하고 이름을 말하는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운동 끝나면 함께 김밥도 먹고 회식도 하고 응봉산으로 개나리 구경도 가면서 진짜 힐링이 돼요. ‘학부형 모임에서 상처받았다’고 일단 운만 떼면 앞뒤 맥락 없이도 아줌마 특유의 통찰력 있는 조언, 격려, 위로를 주시는데 그게 아주 적확하거든요.”

점거농성…장학퀴즈…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주립대 교수 신분을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나요?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미국 살다가 11년 만에 왔다고 소개는 했지만, 그걸로 끝!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더 묻지도 않아요.”

-아줌마들끼리 모이면 가십이 많지 않나요?

“그게 아줌마 모임이나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저는 신입이라 주로 듣기만 하는데, 오늘이 6자회담 한·중 대표 만나는 날이라든지, 오세훈이 한양대 특임교수로 왔다든지 하는 시사적인 얘기는 다 그분들에게 들었어요.”

-학교는 휴직하신 상태죠?

“미국 생활이 재미없고 몸도 안 좋아서 작년에 재임용 통과하고 병가를 냈어요. 올해 7월에는 돌아가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사직 의사를 표명한 상태예요.”

-교수를 그만두신다고요? 왜죠?

“원래부터 교수가 되고 싶어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어요. 말하자면 긴데…. 99년에 386세대가 뭉쳐서 뭘 해보자고 시도하는 모임(제3의 힘)에 참여했어요. 방송작가로 일하며 꼴딱 밤을 새우고 나서도 새벽이면 모임에 가서 회의를 준비할 만큼 열심히 했어요. 결과는 참패였죠. 이번 대선 때 사람들이 겪은 것 이상의 상실감을 저는 이미 그때 경험했어요. 친구도 잃고 동지도 잃고, 제가 끌어들인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산속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보따리 싸서 미국에 갔어요. 대학원 원서에 왜 공부하고자 하는지를 써야 하는데 정말 한 페이지도 못 쓰겠더군요. 뭘 쓰려고만 하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제게 영작을 가르치던 분이 일단 말로 해보라고 하기에, 제가 한참 망설이다가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빈손으로는 갈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안됐다면 왜 안 됐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해결 못 하고 미국에 왔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뭔가 들고 가야 한다’고 콩글리시로 말했어요. 반전 세대에 속한 선생님이었는데 제 얘기를 알아듣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더라고요. 박사를 따고 2009년에 교수가 됐지만 늘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느꼈어요. 점점 그 생각이 강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죠. 몸도 여기저기 정말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한국에 자리 잡으려는 사전 준비도 없이 그냥 돌아오신 건가요?

“뭔가를 하려고 노력은 하죠(웃음). 그러나 교수로 수평 이동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꿈꾸는 일을 이루기 위해 꼭 교수여야 할 필요는 없거든요.”

어떤 꿈인지를 묻자 ‘지식공유 운동’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시민들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질 좋은 자료들을 갖춘 인터넷 기반의 시민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과 소셜 벤처라는 두 흐름을 묶어내는 네트워크 코디네이터 노릇을 해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과거를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발상이었습니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 1985년 총여학생회장을 지낸 이진순은 같은 해 11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고 1991년까지 노동 현장에서 치열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문화방송 장학퀴즈 출제자로 방송 일을 시작한 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로 이름을 날리며 2000년 연말 문화방송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미국 유학을 떠나 2009년 럿거스대학에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지금까지 미국 대학생들에게 시민저널리즘,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쳤습니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이진순의 인생 타임라인

고2 때 진황운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유

-어려서는 어떤 아이였나요?

“부모님이 헤어진 초등학교 3학년 이후에는 엄마랑 살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고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집안이 풍비박산나면서 확 조숙해진 것 같고요. 말없고, 소심하고, 겁 많고, 그런데 속으로는 생각이 많았어요. ‘어른들이 나를 어린애로 대하니 그 기대에 맞게 어린애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일부러 생각했을 정도로요.”

-얼짱으로 유명한 부잣집 딸인 줄 알았는데요.

“전혀. 초등학교 때 신문기사에서 우연히 ‘결손가정’이란 표현을 읽고,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느꼈어요. 동정의 눈길을 받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조숙하고 병적이고 친구도 없었죠.”

-그런데도 공부는 잘했군요.

“부침이 심했는데, 고2 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잘하게 됐어요. 진황운 선생님이라고 제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첫 번째 친구였죠.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희 반 60명이 모두 안 친한 척하면서 선생님과 개별적인 대화 통로를 가지고 있었어요(웃음). 공부하라고 들볶지 않으셨지만 뭐든지 우리 반이 1등을 했죠. 공부를 잘하면 책을 사주셨는데, 10명이면 10명 각자의 특성에 맞춰 꼭 필요한 책을 골라주셨어요. 제 가정통신문에 ‘바람이 분다 해도 깊은 바닷물 속의 물고기는 즐거이 유영할 수 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학생에게’라고 적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만나 뵌 지 오래됐는데, 기사에 선생님 성함을 꼭 적어주세요(웃음).”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시절은 어땠나요?

“직장은 힘들면 사표 내고 나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총여학생회장은 감옥 가는 순서 대기표와 같아서 사표를 낼 수가 없었어요. 운동권 내부의 비밀주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합리성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학생운동 시절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가 잘못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나죠. 예를 들면 지금 사는 성수동은 제가 야학 했던 동네예요. 야학에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교회 같은 데서 하는 검정고시 야학과 우리가 하던 노동 야학. 노동자들은 주로 검정고시를 위해 야학에 왔어요. 그런데 거기다 대고 검정고시 꼭 봐야 하냐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죠. 그때 그냥 검정고시나 제대로 가르칠걸 하는 후회가 돼요. 흔히 386들은 자기 잘못한 거는 말 안 하고 고생한 무용담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옛날에 뭐 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

-그래도 저는 우리 세대의 정통성이 1980년대 고시, 유학, 취업 준비한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도 이제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사는지를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좋겠어요.”

나에게 힐링을 주는 건 동네 아줌마들

-‘제3의 힘’ 또는 386세대가 정치 분야에서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룸살롱에 왜 갔냐 같은 건 화두가 아니고요. 기성정당의 논리와 자기를 구별하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5·18을 맞아 광주에 내려갔으면 선배 정치인이 끌고 간다고 해도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치기라도 보였어야죠. 재수 없어 터진 사건이 아니에요.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세대 중장년층, 60~70년대에 태어난 박정희의 아들딸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취지향성의 문제예요.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해. 일정한 직급에 올라가면, 그때 가서 우리 회사를 이렇게 바꿀 거야’ 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변하는 건 생각하지 못한 거죠. 제가 요즘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정말 도와줄 줄 알았던 선배 중에 ‘네가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어디 얼굴이라도 나오지’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기존 문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두들 상상력을 잃어버렸어요. 끊임없이 자기 상상력을 반납하면서 기존 페이스를 따라간 거죠.”

-고지부터 점령하라는 ‘고지론’의 노예가 된 셈이네요.

“그래서인지 옛날 똑똑하고 명민했던 선후배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면 다들 너무 삶에 지치고 부대끼고 닳아서 멍해져 있어요. 저 혼자만 10년간 어디 피난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예요. 그런 와중에 저에게 힐링을 주는 게 동네 아줌마들이죠.”

언젠가 미국 출장길에 며칠 그의 집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밤새 함께 떠들고 아쉽게 헤어지는 기차역에서 그는 제 손에 작은 봉지를 쥐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가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그가 친누나처럼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봉지가 남긴 묘한 한국적 정서에 울컥하면서 ‘이분은 결국 돌아오겠구나’ 확신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귀국한 그의 손에는 과연 한국 사회를 위한 어떤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지,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저의 마지막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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