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5.31 19:54 수정 : 2013.06.02 11:23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5월28일 이들은 서울 종로구 재동 ‘카페 코’에서 유신과 오늘, 오늘이 된 유신에 대해 2시간을 논했다. 왼쪽부터 서해성 소설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개그우먼 곽현화씨.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41> 마지막 이야기꽃

한홍구
광주항쟁은 유신 잔당과의 싸움
역사학자로서 유신을 쓴 건
이 시점에 큰 행운이자 불행

서해성
그동안의 연재 일별해보면
‘공순이’ 얘기 여러모로 감동적
지식인 위주 평가의 한계 넘어

곽현화
‘까라면 깔 것이지 왜 말이 많아’
학교서 들었던 그 말이 바로 유신
박정희는 왕 되고 싶었던 건가요?

한홍구의 대선은 이제야 끝났다. 그의 대선은 길었다. 개표 결과가 나온 밤에도 그는 ‘유신과 오늘’을 써야 했다. 그 팔자야말로 역사가가 짊어질 수 있는, 짊어져야 할 진정한 몫일 게다. 얼마 전 그가 상임이사로 있는 평화박물관은 종로경찰서에서 온 사람들에게 압수수색을 당했다. 다들 이 일이 대선 직전 화제가 되었던 평화박물관 ‘유체이탈’ 전시회와 관련있다고들 믿고 있다. 요즘 그가 자주 받는 인사말은 ‘괜찮냐’는 것이다. 대선도, 유신 연재도 끝났지만 정작 한홍구의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가로서 그는 늘 현재에 산다. 그는 과거를 기술하되, 현재를 기술한다. 그는 역사적 사태와 모순을 눈앞으로 끌어와 현재와 싸운다. ‘유신과 오늘’은 현재사학자로서 한홍구의 검법과 내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구어체 역사기술이다. 우리 역사기술은 여기에 이르는 데 신채호, 박은식 이래 100년이 필요했다. 그의 체중은 무거우나 연재 내내 그의 붓은 어김없이 경쾌했다. 연재를 마무리 지으며 서해성과 대거리를 나누었다. 곽현화의 추임새는 세대 간극을 메워주기에 충분했다.

유신과 오늘? 유신이 오늘!

서해성 연재 제목 ‘유신과 오늘’이 ‘유신이 오늘’이라는 말이 되고 말았어요. 역사가에게 과거란 현재일 수밖에 없고 예언자적 시선으로서 역사라는 말이 불행히도 들어맞는 셈인데.

한홍구 연재를 기획할 때는 역사학자로서 적어도 유신부활은 곤란하다고 여겼죠.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유신을 잘 모르고 있거든요. 박통 죽고 태어난 사람이 30대… 유신시대가 어땠는가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베를 보면서 이게 디지털 계엄군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총 대신 키보드를 든 계엄군들. 이건 난데없이 나온 게 아니라 앙시앵레짐 6년차의 역사난동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죠. 그 뿌리는 반공, 그 내포로서 지역감정, 그리고 통치행위로서 독재.

프랑스 역사에서는 알다시피 나폴레옹이 혁명을 짓밟고 황제로 즉위했고 나중에는 그의 조카가 다시 왕이 되었어요. 이걸 투표로 대중이 추인해주었다는 대목을 사려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유명한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거죠.

두 해 전 여럿이 모여 유신을 말해보자고 했는데요. 다른 언론사에도 제안을 했고. 그때 회의를 돌아봐도 그렇고 이만열 선생(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다짐과 격려를 모두에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만열 선생님께서 현대사 전공하는 사람 몇몇을 부르셨어요. 유신 40년에 유신정권의 상징인물이 대선에 나오는데 역사학계가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역사학자로서 현실에 책임지는 자세를 분명히 하신 거죠. 선생님이 신앙적으로는 진짜 보수기독교인인데 말이죠. 한국에서는 ‘진짜 보수’가 진보적 역할을 다 했어요.

곽현화 그러고 보니 티브이 같은 데서 유신 관련한 내용을 보지 못한 듯하네요. 그분이 당선될 거라고 예상을 해서 선견지명으로 그런 건가요?(웃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유신이나 광주가 완결되지 않은 거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게 그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걸 더 쉽고 재미있고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임무가 지식인, 특히 역사학자에게 주어져 있었던 거죠. 광주 영화 <화려한 휴가>나 <26년>처럼 말이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를 위한 행진곡’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도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임’은 죽은 자를 위한 거고 ‘나’는 산 자를 위한 건데 민주정권 10년의 성취가 거기에 미쳤는가 하는 대목이죠. 암튼 유신 하면 떠오르는 걸 하나씩 든다면?

선글라스! 라이방!

한/서 역시 배우야.(웃음)

나는 교련! 내가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교련 때문이야! 사열, 분열하고, 월요일엔 애국조회, 목요일엔 교련조회. 제가 행진을 하다 보면 왼팔과 왼다리가 함께 나가요. 죽을 맛이지.(웃음) 어떻게 하면 교련 안 받을 수 있나 했더니 통일이 되어야겠더라고.

반공웅변대회와 함께 ‘1234’라는 노래가 떠올라요. 1하시는 대통령 2나라의 지도자 3일정신 받들어 4랑하는 겨레 위해 5일륙 이룩하니 6대주에 빛나고 7십년대 번영은 8도강산 뻗쳤네 9국의 새 역사는 10월유신 정신으로~.

우리가 입으로는 이렇게 유신을 갈구고 있지만 몸은 아직도 기억해요. 애국가 소리 들리면 동작 그만 되고. 극장에서도 땅콩(팝콘 먹은 건 그 뒤) 먹다가 불현듯 일어서던 세대이니.

하물며 뇌는 망가져도 몸은 기억하죠. 탁월함이란 언제든 몸의 기억이거든요. 저 또한 탁월한 유신전사였죠. 우리 몸과 기억, 현재로 살아있는 그 유신을 본격 해부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이번에 해냈다는 점에서 대선을 떠나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왼쪽부터 서해성 소설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개그우먼 곽현화씨.

장준하는 다카기 마사오에 토벌된 마지막 독립군

연재를 하면서 우리 세대가 유신 때 길들여진 방식을 거꾸로 해서 전두환과 싸웠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 또한 민주주의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요. 박정희는 민주주의, 자유를 비효율의 극치라고 생각했죠.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 일본의 민주주의 개혁 및 운동)를 짓밟고 나오면서 내세운 담론이죠. 정당은 국회에서 싸움질이나 한다, 일본 전통과 맞지 않는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게 실은 일본군국주의 논리거든요.

박통은 민주주의라는 걸 귓등으로도 배울 기회가 없었죠. 개인으로 보면 불행이죠. 대구사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해방 뒤 조선경비사관학교 등 사관학교 3, 4번 나온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죠. 결국 남는 건 과시적 효율과 인격통치, 곧 독재죠.

일본식 교육 받은 사람이니 미국과도 맞지 않았어요. 자기는 천황폐하 같은 지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애들은 50년대부터 원조물자에 팝송 듣고 자라나 ‘친미’였지. 다 함께 일해야 할 때 송창식, 윤형주의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 따위를 노닥거리는 걸로 보인 거죠. 박정희는 30년대에 배웠던 걸 구현하고 싶었고 70년대 청춘들은 동시대 바깥세대와 나란히 가고 싶었죠. 박정희는 시대착오였고, 그의 눈에 이놈들은 애국적이지 않았어요.

인격통치의 특성이 이윽고 무모순, 무오류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거죠. 토론이나 비판은 당연히 불필요한 거고.

유신 뒤에 태어난 세대인데, 애국이 나쁜 게 아닐 텐데 그런 순간에 애국을 강조하면 숨 막혔겠죠. 나의 애국은 ‘오, 필승 코리아’쯤 되죠.

광장의 기쁨은 정말 나중의 일이죠. 그 영향력에 비하면 아직까지 정본 유신사가 없어요. 유신의 문화적 의미, 일상 등. 그래서 유신이 복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연재 한 회분이 150~200장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부문별 정리와 대중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정치사, 문화사, 사회사… 또 마감이 있어야 쓰겠지만 당장은 좀 쉬고 싶어요.(웃음) 신군부가 유신의 아들이란 것도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었어요.

유신이란 실은 6월항쟁까지 이어진 거죠. 박정희 있는 유신체제와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광주항쟁은 유신 잔당과의 싸움이었어요. 박정희 뒤를 이은 대통령들이 박정희 경호원, 근위장교였죠.

반유신투쟁 이야기를 해보죠.

한국 재야니 진보인사들이 대개 보수에서 나왔죠. 독립운동으로 보자면 백범이 제일 오른쪽에서 기준 잡을 분인데, 그가 빨갱이라면서 떨어져 나온 게 이범석이고, 이범석이 빨갱이한테 관대하다고 따로 나온 게 장준하. 장 선생이 1972년 4월 유신 직전 수유리 묘지를 다녀와서 쓴 글에, 4·19에 애들만 죽었는데 이들에게 자유니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한 어른들은 다 어디 갔냐는 대목이 있어요. <사상계>를 찍어낸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죠. 앞으로는 애들이 앞장서면 안 된다는 거죠. 긴급조치 1호 구속자는 장준하, 백기완이었죠.

반공에서 출발해 이윽고 민주화의 주체로 바뀌어간 거죠. 장준하, 문익환, 함석헌… 유신을 거치면서 말이죠. 마침내 장준하는 ‘모든 통일은 선이다’라고 했어요. 김구보다 더 센 말을 한 거야.

그러니까 죽었지. 친일파가 독재한 거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어요. 장준하 유해를 보면 타살된 게 분명한데 그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해방되고 30년 후에 마지막 광복군이 다카기 마사오에게 토벌된 거거든.

그 딸의 첫 국무회의 안건이 복장검사라니…

일제 장교 세력에게 최후 소탕된 그 독립군은 반유신투쟁 중 최초의 민주인사로 죽은 거죠. 연재를 일별해보면서 여러모로 ‘공순이’ 얘기가 감동적이었어요. 대개 민주화운동 평가는 지나치게 지식인 중심이었거든. 여공들은 모순이 훨씬 더 중첩된 존재죠.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사건을 두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느냐’고 했어요. 피해 당사자들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사과는 안 해도 좋다, 그 입 닥치라’고 했어요. 새로 상처나 내지 말라는 거였지. 그 글 쓰고 인사 많이 받았어요. 마지막 광주 관련 글하고. 이번 연재에서 ‘공순이’ 얘기를 여러 번 했죠. ‘공순이’들은 반유신, 민주주의라는 말은 안 썼지만 목요기도회에서 실제 자리를 채운 것도 이들이었고 인혁당 사건에 자주 가서 힘을 보태준 것도 이들이죠. 한국 노동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 중 하나가 70년대는 왜 여성들만 노동운동했냐는 것인데 질문이 잘못된 거죠. 왜 남성들은 노동운동을 안 했는가여야 하죠.

아픈 게 많으니 여성들이 더 빠를 것 같기는 해요!

남성들이 안 한 게 있어요. 군대 다녀와서 ‘사람’이 된 거죠. 사람 됐으니까 노동운동도 안 하고 사회 적응도 빠르죠.

지배권력과 공모하도록 몇 천 년 동안 훈육되어온 점도 있고요. 유신시대 정치인 활동도 짚어보죠.

박정희는 완벽한 침묵을 꿈꿨어요. 유신 분위기란 반대자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거였거든. 국회의원 잡아다 패면 그 밑으로는 찍소리도 못 할 거 아냐. 학생들조차 데모 못 하고 있는데 김대중만 해외에서 떠든 거죠. 저놈만 입 닫게 하면! 박정희가 김대중 잡아들이라고 했겠냐고요? 각하가 그러실 분이 아니죠.

박정희 유산 중에 쓸 만한 것들을 꼽아보죠.

고교 평준화, 그린벨트, 의료보험.

흥미롭게도 셋 다 박통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사람들이 지키자고 하고 있어요.

우리가 박정희까지 챙기려니 바빠!

유산을 가장 많이 까먹은 건 엠비고.

두 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리되는 부분, 새로 알게 된 부분, 신기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다 물을 수는 없고, 그런데 박정희는 왕이 되고 싶었던 건가요?

처음엔 명치유신 지사들(일본 근대화와 정한론을 이끈 사람들)이 목표였죠.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된 뒤에는 천황 같은 대접 받고 싶어 했다고 볼 수 있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국가 모델로서 유신이란 일제가 설정한 식민지 국가상의 일정한 완성이란 느낌이 들어요. 이는 친일의 달성 등과는 문제의식이 다른 거죠. 민주주의 경험과 사고와 상상력이 전혀 없는 일제 군인 출신들이 상정할 수 있는 퇴행적 최고 모델이라는 거죠. 그 유신이 6월항쟁으로 종언을 고했다고 너무 쉽게 믿은 거죠.

학교 다니면서 자주 들은 말이 ‘까라면 깔 것이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였어요. 그 심리나 의미가 유신과 비슷하네요.

유신이 오늘이 됐다는 걸 실감케 하는 말이 있어요. 박근혜 대통령 첫 국무회의 안건이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이었어요. 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한다거나 과거사로 아픈 이들 치유하겠다거나 청년실업, 비정규직, 복지가 아니라 복장검사였어요. 유신이 국민을 대상으로 두발, 복장검사했던 건데, 그게 싫어서 민주화운동한 건데 말이죠.

살다보면 이 사회가 어딘가 불편한데 달리 알 길이 없었을 때가 많았거든요. 오늘 그 몰랐던 부분에 대한 답을 얻게 해준 자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몸이 기억한 것은 무의식으로 작동하지요. 그게 무심결에 전수되고. 그걸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유신과 오늘’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국인의 자유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한국적이거나 우리의 자유 말고, 너의 자유를 위하여.

역사학자로서 유신을 쓴 건 행운이자 불행입니다. 학문적으로 손 타지 않은 영역에 들어온 기쁨보다 한 시민으로서 그 부활이 고통스러운 까닭이지요. <끝>

정리 서해성,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