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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0 20:05 수정 : 2013.05.21 14:50

박정희 정권의 파국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왔다.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행사’가 열리던 궁정동 안가에서 ‘거사’를 실행했다. 1979년 11월7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에서 김재규가 밧줄에 묶인 채 권총을 들고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9> 10·26 사건(상)

“시국이 위험하다
오늘 저녁 해치우겠다”
거사 직전 김재규 한마디에
심복들은 망설임 없이 가담
“이 버러지 같은 새끼…”
차지철에 이어 박정희를 쐈다
계획은 맞아떨어지는 듯했는데…

개헌 건의 등 극한 상황 피하려는
모든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부마항쟁에 민감했던 대통령과
“죽여도 된다” 부추긴 차지철
그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제거하기로 했다

1979년 8월의 와이에이치(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신청,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격렬한 부마항쟁의 발발과 계엄령 선포 등으로 상황은 절정을 향해 숨막히게 치달아가고 있었다. 파국은 너무나 갑자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와버렸다. 유신체제 수호의 총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친형과도 같은 각별한 사이였던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사건 수사책임자 전두환은 10·26사건을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박정희의 추종자들에게 이 사건은 ‘패륜아’ 김재규가 공적으로는 ‘국부’요, 사적으로는 ‘은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시해란 봉건시대에나 쓰는 말이다)한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총 쏘고 죽이며 엄벙덤벙 난리굿을 친 사건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린 아쉬운 사건이었다. 계엄하의 철저한 언론통제 때문에 밖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을 단호하게 민주구국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대통령·육군참모총장과 각각 잡은 저녁 약속

10월26일 오후 4시10분께 경호실장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로 저녁 6시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대통령이 연회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비밀장소)에서 만찬을 할 것이니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운명의 10·26, 그 날짜를 택한 것은 김재규가 아니라 박정희 자신이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자는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과의 만찬이 있는데 이중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김재규는 남산의 집무실을 떠나 궁정동 안가로 와 자신의 집무실 금고에 있던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김재규가 궁정동에 도착했을 무렵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해병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으로부터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대행사’는 주로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 유신체제의 권력서열 1위에서 4위까지의 인사들이 2~3인의 여성과 함께 술 마시는 자리이고, ‘소행사’는 대통령이 여성을 은밀하게 만나는 자리였다. 청와대 경호실 차장까지도 그 존재를 모를 정도의 은밀한 장소였던 궁정동 안가에서는 ‘대행사’가 월 2회, ‘소행사’ 월 8회꼴로 매달 10회가량의 연회가 열렸다고 한다. 경호실과 중정의 담당 직원들 사이에는 ‘대행사’, ‘소행사’라는 말이 아예 공식용어가 되었다. 중정 의전과장의 주된 임무는 이런 행사가 벌어지는 궁정동 안가의 관리와 여기에 참석할 여성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날도 박선호는 연회 한 시간 반가량을 남기고 허겁지겁 연회에 참석할 여성을 ‘섭외’하여 은밀히 모셔와 단단히 교육시켜 연회에 들여보내야 했다.

연회가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 김재규는 옆 건물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갔다. 정승화는 김재규를 대신해서 그를 접대하던 중정 제2차장보 김정섭과 식사중이었는데, 김재규는 그들에게 대통령과의 식사가 곧 끝나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꺼내 온 뒤, 의전과장 박선호와 현역 육군대령으로 자신의 수행비서인 박흥주를 불러 엄청난 얘기를 꺼냈다. “시국이 위험하다. 나라가 잘못되면 우리도 다 죽는다. 오늘 저녁 해치우겠다. 방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을 제압하라. 불응하면 발포해도 좋다.”

둘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면서 각오는 되어 있느냐고 되물었다. 박선호가 얼떨결에 “각하까지입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응” 하고 대답했다. 박선호가 “경호원이 7명(사실은 4명)이나 되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오늘 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며 “똑똑한 놈 세명만 골라서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선호는 30분만 여유를 달라고 부탁했다. 김재규는 유신체제의 절대 권력자 박정희를 살해하는 엄청난 일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최고 심복들에게도 거사 직전에야 계획을 알렸다. 김재규는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다”고 진술했다.

꼭 부하를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유신정권 정보 수집체제의 정점에 있던 그는 한 번 입 밖에 나간 말은 어떻게든 첩보망에 걸려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박선호는 김재규가 한때 군에서 쫓겨나 대륜중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할 때의 제자로 김재규가 특별히 중앙정보부로 끌어들여 가장 비밀스러운 임무를 맡긴 자였다. 박흥주는 중위 시절 사단장인 김재규의 전속부관이 된 이래, 김재규가 6관구 사령관,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데려와 네 번이나 같이 근무한 가장 아끼는 부하였다. 놀라운 것은 박선호와 박흥주뿐만 아니라 “똑똑한 놈 세명”으로 뽑힌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도 모두 김재규의 말 한마디에 대통령 살해 계획에 서슴없이 가담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재규가 부장으로서의 권위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측근 부하에서부터 말단까지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예비역 해병대령으로 사나이 중의 사나이를 자부하던 박선호는 현대판 ‘채홍사’ 역을 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고 한다. 권력의 사유화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그 일을 실제 담당해야 했던 실무자의 환멸도 깊어만 갔던 것이다.

“4·19 같은 데모 땐 발포명령 하겠다”

박정희가 죽은 직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긴박했던 몇 시간 동안 유신정권의 요인들은 김재규가 아니라 차지철이 박정희를 해친 것으로 의심했다고 한다. 그만큼 차지철의 월권은 심각했다. 차지철은 수도경비사령부를 경호실장의 통제를 받도록 하고 야전포병단과 미사일 부대를 창설했다. 그는 경호실 주관으로 성대한 규모의 열병식을 거행하고 박정희를 졸라 경호실 차장을 중장으로, 차장보를 소장으로 보임했다. 대위 출신의 차지철이 이렇게 대장 행세를 하자 군 내부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고 한다. 차지철의 월권은 1978년 12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이 물러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신임 비서실장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의 요직을 지냈지만, 유순한 인물이었고 박정희가 기대한 역할도 김정렴처럼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정치자금의 수금과 관리를 전담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술친구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차지철은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새까만 선배인 김계원이 자신보다 늦게 청와대에서 일하게 되자 보고 순서를 양보하지도 않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서열 정하기’ 게임을 벌였다. 모욕감을 느낀 김계원이 차지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개하자 김재규는 대장 출신이 대위 출신하고 싸우면 대장이 욕을 먹는다고 김계원을 달랬다고 한다. 그러나 차지철은 곧 김재규도 여러 면에서 밟아버리기 시작했다. 경호실에 정보처를 두고 또 비공식적인 사설 정보대까지 운영하며 정보수집에 나서는가 하면 4선 국회의원 경력을 근거로 국회나 신민당에 대한 정치공작을 자신이 디자인하여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실행케 하는 등 월권을 자행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 모든 것을 최소한 방임, 어쩌면 권장했다.

차지철의 오만방자함이 심각했다지만, 문제의 근원도, 10·26사건의 직접적인 이유도 박정희에게 있었다.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가장 절박한 이유는 부마항쟁에 대한 박정희의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김재규는 부산의 현장을 다녀온 뒤 부산의 소요는 불순세력이나 신민당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유신체제에 대한 민중봉기이고 곧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정도 죽여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00만~200만 정도 죽여도 걱정없습니다”라고 박정희를 부추겼다. 김재규는 1946년 육사 2기 동기생으로 만난 이래 같은 고향 출신의 박정희와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왔기에 박정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과는 달리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박정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김재규는 잘 알고 있었다. 김재규는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수천명이 희생되는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김재규가 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일체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은 박정희의 극단적인 성격은 자유민주주의와 박정희를 양립불가능한 사이로 만들어버렸다.

유혈사태가 임박했음을 감지한 김재규는 매우 초조하고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김재규가 오늘 해치운다고 말했을 때 그의 부하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처럼 10월26일 오후 차지철로부터 만찬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김재규에게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된 이후 김재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보고자 여러 가지 건의를 올린 바 있다. 김재규는 1977년에는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해도 무난히 당선될 수 있으니 개헌을 하자고 건의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기 위해 긴급조치 9호의 실효성이 떨어졌다는 명분으로 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영삼이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김재규가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 김대중이 김영삼 측 단합대회에 참가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해 극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유혈 참극 가능성은 바로 문밖에 와 있었고, 신문지상에는 정부 여당의 요직 개편설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정가에는 다음 중앙정보부장으로 법무장관 김치열이나 내무장관 구자춘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임박한 유혈사태를 막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날은 26일이었지만 박정희에게는 그 후 유행하고 있던 이용의 노래처럼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연회에 불려온 가수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 노래를 불러도, 비서실장 김계원이 애써 화제를 돌려도 박정희는 신민당 이야기를 자꾸 꺼냈고,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당신네는 (신민당 의원들) 비행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면 무엇하나. 딱딱 입건해야지”라며 언짢은 소리를 해댔다. 차지철은 “데모대가 지나치게 하면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좀더 강압적으로 눌러야 됩니다”라고 박정희의 비위를 맞췄다.

박선호로부터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인 저녁 7시40분께 김재규는 옆자리에 앉은 김계원을 톡 치면서 “각하 똑바로 모시시오” 하더니, 권총을 꺼내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면서 한 발을 쏘았다. 김재규가 박정희에 앞서 차지철을 쏜 것은 그가 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먼저 제압한 것이었다. 차지철은 수도경비사령부의 막강한 무력을 경호실의 통제 아래 돌렸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권총 한 자루 지니고 있지 않았다. 김재규가 총을 뽑고 조금 망설였던 탓인지 차지철은 팔로 방어자세를 취했고 김재규가 쏜 총알은 차지철의 오른 팔목에 맞았다. 자신만이 박정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던 차지철은 피를 흘리며 화장실로 도망갔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쫓아갈듯 엉거주춤 일어서다가 앞에 앉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의리라는 소의를 끊고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김재규는 밖으로 나와 박선호의 총을 빼앗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호원을 부르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차지철에게 한 발을 발사하고 식탁에 쓰러져 있는 박정희에게 다가갔다. 50센티 거리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뒷머리에 다시 한 발을 쏘았다.

박선호, 친형제 같은 정인형을 쓰러뜨리다

실내에서 김재규가 첫 발을 쏘았을 때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대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해병대 동기인 정인형과 박선호는 휴가를 같이 가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다.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박선호는 총소리와 함께 먼저 총을 꺼내들었다. 박선호는 “꼼짝 마!”라고 소리치며 정인형에게 “우리 같이 살자”고 애원조로 말했다.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으로 속사에 능한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불을 뿜었고, 정인형도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다시 친구를 쓰러뜨렸다. 김재규는 그 직후 밖으로 나와 이 총을 가져가 박정희를 쏜 것이다.

김재규의 계획은 여기까지는 기적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김재규는 옥중에서 쓴 <수양록>에서 경호요원들의 사격 실력으로 볼 때 자신이 박정희의 살해에 성공하더라도 “죽을 가능성을 90퍼센트”로 보았는데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을 민주구국혁명이라 주장했지만, 여러 동지들과 충분한 토론을 통해 면밀한 계획을 준비한 혁명은 아니었다. 10·26사건은 가장 가까운 심복들조차 30분 전에야 행동지침을 통보받은 데서 볼 수 있듯이 김재규가 처음이자 끝인 단독 거사였다. 김재규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와 같이 ‘미친 운전사’ 박정희의 폭주를 중단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김재규는 군중을 향해 돌진하는 미친 자동차의 폭주를 일단 멈추게 하는 데 성공했다. 어제까지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자들도 유신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데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긴급조치는 해제되었고 그 많던 구속자들은 석방되었다.

궁정동을 빠져나온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함께 차를 타고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가려다 용산의 육군본부로 방향을 틀었다. 김재규의 ‘민주구국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는 치명적인 갈림길이었다. 김재규는 박정희만 제거하면 곧 유신체제의 붕괴라고 안이하게 판단하여 자신이 구상한 민주구국혁명의 지휘소를 어디에 둘 것인지조차 구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김재규는 변호인들이 작성한 ‘항소이유서’를 보충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항소이유서 보충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민주 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했으며 “10·26 이후 유신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불행하게도 박정희의 제거가 유신체제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키운 영남 군벌의 핵심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를 지냈다. 박정희에 뒤이어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이끌어간 자들은 박정희의 근위장교들이었다. 김재규가 친형과도 같던 박정희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던져 막아보려고 했던 유혈참극은 몇 달 뒤로 미루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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