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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15 10:37 수정 : 2011.09.15 10:37

최해식 선수. <한겨레> 자료사진

[매거진 esc] 김민아의 플레이어스

어머! 해태 타이거즈 ‘최해식’ 선수 아니세요? 불현듯 그가 찾아왔다. 방금 뽑은 생면이 가득한 짜장면이 든 철가방과 함께. 1996, 97년 한국시리즈 우승멤버인 포수 최해식(사진)은 자존심을 버리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현재 연매출 10억원이 넘는 중국집 사장님이다. 2004년 은퇴 뒤 시작한 ‘최고루’는 현재 광주 일대 17개의 체인점을 가진 기업으로 변모했다. “다들 2년 정도 지나야 식당이 자리잡힌다는 말을 하는데, 저는 2개월에 승부를 봤죠.” 언제나 불리한 볼 카운트에서 빠른 승부를 원했던 과감한 플레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군산상고·건국대를 거쳐 쌍방울에 입단, 해태로 트레이드된 뒤로 그는 7년 동안 해태 주전포수로 뛰었다. 2002년 은퇴하고 나서는 김성한 감독의 추천으로 플레잉코치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에게 사업가로의 변신의 계기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내가 부업으로 식당을 시작해보겠다는 거예요. 아내가 음식 솜씨가 좋거든요.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함께 시작했어요. 그땐 절실했죠. 스스로를 바닥이라고 생각했어요.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절박한 마음으로 무작정 친한 중국집 사장을 찾아갔다. “설거지부터 시작했죠. 칼질 배우고 면 담는 거 배우고 면 뽑는 것까지 다 제가 직접 배웠어요. 묘한 승부욕이 생기더라고요. 잠 안 자고 요리만 했죠. 주방장을 이기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하루에 스윙 천번을 통해 타격자세를 익히듯, 그는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중국요리와 씨름했다. 그렇게 중국집 ‘사장님’ 최해식은 ‘요리사’로 변신한다.

최해식은 세일즈에도 나섰다. “새벽 5시쯤 여름엔 얼린 녹차물을, 겨울엔 따뜻한 매실차를 가지고 공사판에 나가요. 그리고 슬쩍 홍보물을 내려놓고 오죠. 발품을 파는 홍보도 중요하지만 말품을 파는 일도 중요하거든요.” 지역에서 받은 사랑을 지역사회에 돌려주려는 마음가짐도 곁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공 비결의 마지막 단계,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단계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두는 일이었다. 그는 ‘최고루’ 앞에 놓인 오토바이에 직접 올라탄다. ‘배달원’이 되는 순간이다. “모든 것을 제가 하죠. 지금도 배달 한번 갔다 왔어요. 허허…. 한창 바쁜 시간에 알아보면 곤란하죠. 사인도 해주고 나와야 해서. 어떤 분들은 최해식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그러고 나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죠. 아직은 동네스타예요.”

그는 자신의 인생이 1996년 해태와 닮아 있다고 한다. 4, 5월 시즌 50경기까지 8위에 머물던 꼴찌 해태는 저력을 보이며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잊지 못할 승부는 당시 한국시리즈 6차전! 모기업 해태는 외환위기로 재정난이 시작됐고, 맞상대 현대는 모그룹의 지원을 받으며 선수 수급에 성공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된 것. 6차전 포수였던 그는 스트라이크 존 판정에 거세게 항의하다 퇴장 명령을 받는다. 뒤돌아서는데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해태는 결국 우승을 만들어낸다.

“양장피가 가장 자신있어요.” 과감한 승부를 즐길 줄 알던 포수 최해식의 미트는 이제 철가방으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즐거움이 숨겨져 있다.

<엠비시 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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