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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12 20:35 수정 : 2016.04.12 20:35

시애틀 학회를 마치고 지금은 보스턴에 있네. ‘아시아의 여성 리더’라는 진부한 주제로 열린 포럼은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이었어. 보스턴 지역에 사는 예나 또래 여성들, 특히 대만 작가이자 문화부 장관을 지낸 룽잉타이가 참석하여 팬들이 많이 왔었지. 청년 실업과 기후 변화 등 중대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나는 이제 ‘사냥꾼의 시대’를 끝낼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해서 박수를 받았지. 인류의 진화는 ‘불의 발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불을 둘러싸고 모여 의논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라는 나의 주장에 모두들 동의를 하더군.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죽은 후의 자손들을 염려하는 존재이기에 지구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외로운 사냥꾼들이 득세하면서 세상이 아주 위태로워지고 있어. 이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이라크 전쟁에 관해 보였던 호전성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녀도 사냥꾼인지 등의 질문으로 이어졌지. 그리고 학생들은 그간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여유도 없이 경쟁만 하며 살아왔다며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을 알아낼 수 있는지, 뭘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며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지를 묻더군.

예나와 이웃이 된 지도 20년이 되었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상냥하고 동생을 잘 돌보는 깜찍한 꼬마였지. 중학교 때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어서 옷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쭈!”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일로 아빠와 냉전 중이라기에 모른 척했던 기억이 나. 고등학교 올라가서 마음을 잡고 대학을 갔고 적성에 안 맞아도 학교를 마쳤고 ‘공시생’이 된 지 3년. 아니 근 4년이 되었나? 예나를 가까이서 본 내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어. 책상 앞에 종일 앉아 시험공부를 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이야. 한편 생각하면, 구직하느라 온갖 구박을 당하고 좌절을 겪기보다는 ‘공시생’이 되기로 선포하는 것이 예나네 세대에서는 영리한 결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집중할 일이 있고 주변에서 뭐 하냐고 귀찮게 하지도 않을 테고 얼마 동안은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comfort zone)가 마련되는 셈이니까 말이지. 정말이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거든. 숨이라도 제대로 쉬면서 하루하루 지낼 수 있으니 그게 어디야? 내가 너무 마음을 잘/잘못 읽어버렸다면 미안하네. ‘공시생’만이 아니라 스펙 쌓는 ‘취준생’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잖아?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일류대에 들어가려고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다시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고시에 통과하려고 청춘 시절을 보내다니,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이렇게 사소하고 부질없는 존재로 만들지 말라고 이제 우리 같이 말하자.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예나가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웃의 축복 속에 아기 백일잔치를 할 날을 고대하고 있어. 이웃 아이를 엄마보다 더 잘 데리고 노는 예나를 볼 때마다 나는 동네 앞 주민자치회관에서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내는 멋진 사랑방지기 예나의 모습을 상상하지. 지나치게 관리를 당하건, 반대로 방치되었건, 고아처럼 외로워진 요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그런 시공간 말이네. 오늘이 투표 날이라 말인데 아이들이 자라는 것에 대한 감을 키우지 못한 사냥꾼에게 투표하지 말자. 큰 회사를 유치한다거나 고속전철을 연결하겠다는 공약을 하면서 세상을 망치려는 사람들을 눈여겨봐두어야 해. 청년실업 대책은 세우지 않고 청년을 대체할 인공지능로봇 투자에 급급한 과학기술 숭배자들에게도 표를 주지 말자. 친구들에게도 말을 해.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 의논할 줄 아는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이야. 물론 투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파리기후협약을 체결하고도 이렇게 잠잠하기만 한 이유도 알아봐야 할 테고 자기네가 세상을 구해야 할 세대잖아? 주민자치회관에서 슬슬 만나기 시작할까? 실은 아주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어. 이제 시작이야!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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