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끄트머리에 만난 도종환 시인이 들려주는 꽃과 외로움, 좌절과 희망의 이야기
12월 찬바람이 골목마다 무리지어 휘몰아치던 지난 20일 저녁, 서울 공덕동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도종환(57) 시인을 만났다. 그는 어느 신춘문예 본선 심사를 막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좋은 작품이 많이 들어왔다”며 “내가 끝까지 우기지 못해 당선에서 밀린 한 청춘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그렇게 연말 밤에는 아쉬운 것들이 많았다. 충북 보은에 사는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빡빡한 스케줄에 시달린다고 했다. 인터뷰 시간은 한 시간, 빠듯해 아쉬웠다. 대학생 김삼영(24)·이승민(22)씨는 시간을 아껴가며 그에게 시와 꽃, 외로움과 좌절, 그리고 인생에 대해 물었다.
이승민 현재 충북 보은에 있는 ‘구구산방’에 혼자 살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최근에 낸 자전적 에세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를 보니 “가난과 외로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됐다”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런가요?
도종환 몸이 안 좋아져서 9년 전에 산골로 들어갔어요. 그때는 “이제 겨우 40대인데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다니” 하며 매우 낙담했었죠. 그러데 살아보니 아니에요. 몸이 아팠던 덕분에 산골에 들어가 살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젠 서울에 오면 어지러워요. 산골에서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쓸쓸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는 겁니다. 홀로 집에 앉아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지요. 내 옆에는 적막, 고요, 평화가 앉아 있어요. 외로움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보면 생각도 맑아지고 다양한 상상과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어요. 그렇게 외롭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안 나옵니다. 구구산방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살자’는 뜻입니다.
김삼영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멀리하시죠?
도종환 워낙 부지런하지 못한데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다 보니 수많은 팔로어에게 일일이 대꾸해주면서 살 자신이 없어요. 트위터는커녕 책을 읽을 때나 아침 명상 때 전화기도 자주 꺼놓는걸요.
김삼영 신춘문예 심사를 하고 오시는 길이라 들었습니다. <접시꽃 당신> 등을 발표했던 초창기에 문단의 평가가 냉혹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세상의 평가에 상처받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도종환 저도 상하고는 거리가 먼, 선택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문학상이라는 것을 받기 시작한 것이 50대 들어서면서부터예요. 그 전까지는 정말 상복 없는 사람이었죠. 무언가에 응모하면 떨어지는 일이 훨씬 더 많았던 사람이고요. 떨어질 때마다 느꼈던 소외와 좌절, 낭패감이 절 밀고온 힘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좌절감을 느끼고 동시에 아직까지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더 시도해봐야지, 도전해봐야지 하면서 살아온 거죠. 일찍 인정받고 주목받는, 봄꽃처럼 일찌감치 화려하게 피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아요. 나는 봄꽃이 주목받을 때 흔적도 없던, 가을꽃, 들국화 같은 사람인 거죠. 그런데 괜찮아요. 좀 늦게 피더라도 나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생각하면 되죠.
김삼영 상에 연연 안 하시는 것 같으면서도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이 좌절될 때면 옆에서 많이 안타까워하시더라고요. 고은 선생의 시 자체가 의미가 있는데, 노벨상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도종환 고은 선생은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아니고 수상 여부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있지도 않아요. 오히려 못 받아도 상관없다는 선승 기질이 있고 대범한 분이죠. 하지만 한국에서 문학을 하는 후배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제 한국 문학이 상을 받을 만하다 싶고, 그 대표주자가 고은 선생이라고 생각해요. 기왕에 받으실 거면 빨리 받아서 이후에 다른 후배들도 받았으면 좋겠거든요.(웃음) 또 노벨상은 일단 사망한 문인에게는 수여되지 않으니까 선생님이 건강하실 때 받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요. 한국 문학이 미국·일본 문학과 함께 놓고 보면 그 깊이와 폭에 있어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외국에 소개된 역사가 짧고 번역의 문제가 있다 보니 아직 제대로 인정을 못 받는 거죠. 그런 차원입니다.
이승민 제 주변에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싶어도 돈벌이가 안 되니까 직업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종환 대부분의 시인이 가난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가난했는데 문학의 길을 선택한 거였죠. 20대 때 정말 먹고살 것도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이 문학을 선택하고 그 끈을 놓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온 겁니다. 그건 어느 예술 분야나 마찬가지예요. 영화, 연극, 미술 다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20대부터 주눅들거나 쫄지 말고, 한번 여기에 내 인생을 걸어보자,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해보다가 30대가 돼서 이제는 더 못하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일단 부딪혀보는 게 중요해요. 20대들이 너무 안정적인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아요. 잘못하면 이 사회에서 뒤처진다는 불안에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도 안쓰럽습니다. 그걸 강요하는 이 사회, 기성세대가 가장 문제죠. 그래서 20대에게 도전하라고 말하기도 미안합니다. 그래도 도전해야 합니다. 20대가 아니면 언제 도전해보겠습니까?
이승민 2006년에 수능을 치르고 나서 <한겨레> 1면에 실린 도종환님의 편지글을 봤어요.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애정어린 편지였죠. 인생의 시험은 여러번 온다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글을 읽으며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도 시험에 들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도종환 학생 때는 지필고사를 보지요. 인생을 살면서는 순간순간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시집을 내더라도 문학상 수상 여부의 시험에 들고, 승진도 시험에 드는 것이고요.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한 번 안 됐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이 날 선택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끝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나저나 승민씨의 말을 듣고 보니 학생들을 따뜻하게 격려하는 자리를 더 자주 만들어야 했다 싶은 생각이 드네요.
김삼영 교직에 계시면서 교육운동을 열심히 하셨잖아요. 최근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데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도종환 학생인권 얘기가 나오니까 교사들이 교권이 무너진다는 얘기를 해요. 예전에 교사들이 모여서 교장·교감 흉을 봤다면 이제는 모여서 학생들 흉을 보더군요. 고충이야 이해는 가지만 착잡했습니다. 10대들도 자기 삶이 있어야 하고 그 삶 속에서 인간다워야 하며 행복해야 합니다. 현실이 얼마나 힘들면 학생들이 ‘인권’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밑에서 끓어오르는 기운이 있으니까 수면 위까지 올라온 겁니다. 아이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인권은 무슨 인권, 공부나 하지”, 더이상 이런 식은 안 됩니다. 핀란드에 갔더니 학생회장이 나와서 “학생들과 관련있는 조례나 규정을 바꾸려면 당연히 우리에게 물어보고 고쳐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의회에 학생 대표가 나가고 인격체로서 존중받죠. 우리 사회도 이제 청소년들을 인격적인 주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청소년도 그 나이에 맞게 아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승민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여학생은 무조건 어깨에 닿는 길이의 머리 스타일을 해야 했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싶었던 저는 무조건 귀밑 몇 센티의 단발머리가 규정인 옆 학교가 부러웠죠. 옆 학교 학생은 저를 부러워했고요. 이런 규정이 너무 이상하다고 선생님께 건의했더니 “그건 그 학교 교칙이고 여긴 다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내내 너무 답답했어요.
도종환 1980년대 교사로서 교복·두발 자율화를 주장해서 끝내 이뤄낸 경험이 있어요. 당시에 남학생은 거의 머리를 빡빡 깎아야 했고 여학생은 단발머리를 해야 했죠. 사람이 모두 머리통 생김새도 다르고 키도 다른데 어떻게 같은 머리 모양을 할 수 있나요. 두발 자율화를 하고 나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머리 모양을 하고 왔는데 하나하나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고요. 물론 아이들이 머리에 신경쓰는 모습을 학부모들은 걱정하고 싫어하기도 했죠. 그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는데 지금까지 반복이군요. 정말 교육 분야는 사회에서 가장 늦게 바뀌는 것 같아요. 힘들게 바꿔놔도 결국 또 제자리로 원위치하고 말이죠.
이승민 요새 아이들이 예전보다 더 버릇없다든지 그런 느낌은 들지 않으세요?
도종환 20~30년 전 교직에서 만났던 순수했던 아이들과 다른 면은 있죠. 그런데 원래 아이들의 싹수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게 맞는 거예요. 싹수가 다른 건데 “싸가지가 없다”고 어른들이 느끼는 것일 뿐이죠. 다르다는 걸 인정해줘야 합니다. 원효 밑에서 설총이 나오잖아요. 불교의 대가 밑에서 유학자가 나오듯 근대의 틀을 유지하려는 부모 세대와 근대적 사회의 틀을 깨고 나가려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당연한 거예요. 정보화 사회에서 문화가 완전히 달라졌고 아이들의 의식이나 정서, 이런 것들도 완전히 다르죠. 이걸 어른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욕하면 안 되죠. 우리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저희 아버지도 저를 얼마나 마음에 안 들어하셨는데요.(웃음) 밖에 나가 사회성 있게 활동하지 못하고 ‘암사내’처럼 맨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다고 말이죠. 저는 또 당시에 속으로 아버지의 권위, 거역할 수 없는 힘, 그것이 얼마나 싫었는지 몰라요. 저는 또 어떤 줄 아세요? 현재 20대인 아들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뭘 하고 사는지 좀처럼 말을 안 하니까 답답하다고 다그치는데, 결국 저도 제 아버지한테 그런 얘기 잘 안 했거든요. 마찬가지인 거죠.
김삼영 대학에 와서도 답답해요. 오늘 기말고사를 치르고 왔는데 영화 수업의 시험 문제가 “영화 속 주인공의 개 이름은 무엇인가”였어요. 상대평가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런 문제를 대학 와서 풀고 있으니 한숨이 나와요.
도종환 아무리 평가의 객관성 때문이라고 해도 대학에서 단순 지식을 묻는 단답형 문제를 냈다면 교수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학의 현실에 한숨이 나네요.
김삼영 선생님께서는 군대에서 겪은 1980년 광주의 기억이 늘 따라다닌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전투경찰로 군 생활을 하며 시위 진압에 동원됐던 경험이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습니다. 제대를 해도 풀리지 않더라고요.
도종환 많은 남성들이 군대에서의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트라우마를 갖고 있죠. 저도 여전히 광주와 관련된 뭔가를 볼 때면 눈물을 펑펑 쏟아요. 가슴이 터질 것 같죠. 분단 때문에 젊은이들이 전부 의무적으로 군인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파요. 수많은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청춘들이 안타깝습니다.
이승민 어른들은 요즘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독재정권 시절의 폭력이 눈에 보였다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의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데 다들 그것이 사회구조적 문제라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살만한 세상인가 싶습니다.
도종환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살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성공해야 한다, 낙오하면 죽는다는 심리적 압박감,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 이런 것들이 옛날보다 더 심해졌어요. 외환위기 이후 20대들은 주눅이 들어 강의실에서 만나봐도 표정이 없어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죽어라 학점 따고 토익 공부하죠. 이건 다 기성세대 책임이고 엄청난 폭력이죠.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민소득 4만달러니, 7% 성장이니 떠들었지만 다 꽝이었잖아요. 선진화로 나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4대강 사업처럼 속도전으로만 밀어붙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서로 소통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는데, 현재는 불통하면서 성공하는 사람 손만 붙잡고 끌고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승자독식 사회 속에서 낙오한 사람은 자살하거나 말거나, 비정규직이 양산되거나 말거나 함께 갈 놈만 데리고 가는 방식은 잘못된 겁니다.
이승민 세상을 바꾸려면 리더가 중요한데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선택할 차기 리더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도종환 제가 쓴 시 ‘담쟁이’처럼 함께 손잡고 나가자, 이런 리더십이 필요해요. 자기 혼자만 백발짝 걸어나가는 게 아니라 어려운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면서 연대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죠.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법률 조항만 달달 외우는 사람이 아닌 시를 아는 사람, 인문학적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어야죠.
이승민 기업 경영자 출신들이 많이 거론되잖아요?
도종환 경영자도 경영자 나름이에요. 어떻게든지 부와 권력을 긁어모으려는 경영자가 있는 반면 착한 부자, 공생하는 경영자도 있죠. 기업도 성공하고 개인도 존경받는 감성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경영자 출신의 리더는 우리에게 더는 필요없죠.
이승민 특별히 좋아하는 문장이 있나요?
도종환 스티브 잡스가 말한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늘 허기진 듯 갈망하며 살라는 거죠. 남들이 바보 같다고 하거나 말거나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젊은이들이 됐으면 합니다.
진행·정리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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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또 떨어졌어도 괜찮아
올해로 세번째다. 나는 시험에서 ‘또’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도종환 시인을 만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이날의 기분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시린 겨울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나한테 딴짓할 시간이 생겼다!’
도종환 선생님은 딴짓을 많이 하는 분 같았다. 이 분이 좋아하는 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곳저곳 서성인 경험이 많았을 게 분명했다. 시인의 시상은 그렇게 올곧은 길이 아닌 샛길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 청춘들은 어떤가. 주어진 궤도를 열심히 달린다. 쉴 기회가 생겨도 밖으로 이탈하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거나 허락받은 약간의 여유만을 즐기려 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제대로 딴짓’할 줄 모르는 20대가 되어 버렸다.
내게는 벌써 여러 개의 꿈이 있지만 도종환 시인을 만나고 하나가 더해졌다. 촌스럽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바로 그것이다. 어디선가 최선을 다해 향기를 내뿜고 있을 꽃을 찾아나서야겠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중심이 아닌 변두리, 콘크리트가 아닌 흙바닥 위의 외면받는 존재들을 응시하겠다는 뜻이다. 할 수 있다.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시인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청춘들은 특히 더! 이승민
교과서 속 시를 다시 만나다
고등학생 시절, 입시교육과 경쟁에 찌들어 있을 때 수많은 문학작품을 배웠습니다. 읽었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입시경쟁에서 뒤처지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담쟁이’도 읽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벽을 말없이 기어올라 마침내 그 벽을 뛰어넘는 담쟁이. 창피하게도, 그 당시에는 ‘이 힘든 현실인 입시교육을 넘어서자’는 의미로 읽고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종환 시인을 직접 만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혹은 자기계발적인 의미에서 ‘그저 저 벽을 뛰어넘자’라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불쌍한 청춘’인 저는 세상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우리 삶을 가로막는 벽을 함께 뛰어넘는 것”을 말하며 저를 위로하고 그도 위로받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힘든 시기에 나 혼자 잘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내가 잘된다면 누군가는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도종환 시인의 “함께 벽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목소리는 울림이 컸습니다. 그 큰 울림을 가슴속에 간직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김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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