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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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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홍익세상’ 주창
이토는 ‘식민 합리화’ 속셈
동양평화론 똑같은 외침 오늘날 평가는 극과 극 갈려
불멸의 영웅 ‘평화사상’ 후학들 연구·발전 과제로
이토는 시모노세키를 떠나 중국 다롄에 도착한 이튿날인 10월19일 일본인·중국인·유럽인 등 300여명이 모인 관민연합 환영회에서 “만주의 치안이 불안해 마적이 출몰하고 군벌이 할거하는데 일본 군대가 상설 주둔해 치안을 담당하면 경제발전도 가능하고 국제정세도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생애 마지막 강연에서 역설한 이토의 동양평화론이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1주일 뒤 하얼빈역에서 그를 사살한 안 의사는 ‘이토의 죄악 15가지’에서 “동양평화를 파괴했기 때문에 단죄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최서면(83) 국제한국연구원장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 나라에서 모두 존경을 받는 인물은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뿐”이라며 이 역사적 평가의 차이는 바로 세 사람의 동양평화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강한 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평화, 즉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야욕을 합리화하는 ‘위장 평화론’이자 훗날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태평양전쟁을 통해 그 정체가 폭로됐으며, 리훙장 역시 한족이 중심이 되는 ‘중화주의 평화론’일 뿐이었다. 반면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며 모두에게 이로운 평화, 즉 ‘홍익세상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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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새겨 놓은 일본 미야기현 다이린사의 현창비. ‘안 의사가 순국 직전 뤼순형무소의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직접 써줬다’는 유족들의 주장에 최서면 원장은 이의를 제기한다. ‘지바는 간수가 아니라 공판정 호송차를 경호한 헌병대원이었고, 안 의사와 지바는 서로 일본말과 조선말을 할 줄 몰랐으며, 안 의사가 선물로 직접 써준 휘호에서만 보이는 ‘받는 사람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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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와 이토가 오늘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일본 호세이대학 마키노 에이지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의 한 대목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마키노 교수는 하얼빈 의거 100돌과 이토 100주기를 맞은 2009년 10월26일 한·일 두 나라의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과 하얼빈에서 의거 100돌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돌아와 조사해보니,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주요 신문에서 10월26일치 석간에 ‘한국 정부 주최의 안 의사 추모 행사가 시민 1200명이 참가해 대대적으로 열렸다’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그런데 (극우 성향의) <산케이>까지도 이날 오전 11시 도쿄도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에 있는 이토의 묘소에서 열린 ‘몰후 100년 묘전제’에 150명이 참가한 사실은 한 줄도 싣지 않았다. … 게다가 ‘며칠 뒤 <마이니치>에는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 이토 공작의 위대함을 일본 국민들이 잊어버린 것을 한탄하는 칼럼도 실렸다.’
안 의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는 그가 남긴 유묵이다. 안 의사가 뤼순형무소에서 순국 때까지 남긴 유묵은 200여점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진본이나 사진본이 확인된 것은 54점 안팎이고 그 절반 정도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가운데 30여점이 일본과 중국 등 국외에 퍼져 있는 것과 관련해 최 원장은 “일본에서는 유묵 말고도 ‘안 의사의 벼루’ 같은 진위를 확인할 수 없거나 명백한 가짜 유품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며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일본인들 사이에 안 의사가 널리 알려져 있고 존경하고 추모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짝퉁 시장’까지 생겨난 게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
최 원장은 유묵에 얽힌 비사 하나를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1969년 <안응칠 역사>를 발견해 소개한 이래 도쿄의 한국연구원에는 안 의사의 유묵이나 유품을 갖고 있다거나 발굴했다는 사람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어. 그 가운데 유독 수년간에 걸쳐 일본 국회의원이나 언론사 등 여러 갈래를 통해 유묵의 감정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위국헌신 군인본분’이었지.”
최 원장이 지난 76년 입수해 처음 공개한 이 유묵은 뤼순형무소의 헌병이었던 지바 도시치가 갖고 있던 것으로, 그는 귀국한 뒤 죽을 때까지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의 다이린사에서 안 의사를 기렸다. “지바의 집안에서는 안 의사를 잘 몰랐지만, 지바가 생전에 워낙 신주처럼 모시고 잘 보존하라는 유언까지 남겼기 때문인지 유묵이 무척 값이 나갈 걸로 기대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안 의사의 소중한 유품을 돈 몇 푼으로 따질 수 없고 흥정을 해서 구입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생각에 몇 년 동안 즉답을 하지 않은 채 설득을 했지. 결국 유묵을 한국에 기증하되, 한국연구원 쪽에서 다이린사를 보수하고 석비를 세울 수 있도록 시주(후원)를 하는 합의가 이뤄졌어.”
그 후손들은 79년 9월2일 안 의사 탄신 100돌을 기려 안중근기념관에 진본을 반환했고, 81년 3월26일 순국일을 기념해 다이린사에 유묵을 새긴 현창비를 세웠다. 다이린사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은 지금도 해마다 안 의사 탄신일에 법요식을 열어 한·일 두 나라에서 모두 유명해졌다. 그러나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그가 지바의 증언을 토대로 썼다는 <내 마음의 안중근>(1993년·집사재 펴냄)은 소설과 같은 내용이 많기에 주의를 해야 한다고 최 원장은 당부했다.
일제가 그토록 ‘일개 테러리스트’로 몰아 주검조차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가 시·공간을 넘어 불멸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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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26일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1세기가 넘도록 장례식은커녕 유해조차 돌아오지 못한 채 넋으로 떠돌고 있다. 안 의사 묘지가 항일투쟁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주검을 빼돌린 채 ‘형무소 뒤편 수인묘지에 묻었다’는 기록 한줄만 남겨놓았다. 사진은 서울 용산구 효창원 안에 ‘삼의사 묘역’과 나란히 조성돼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 1945년 11월 환국한 직후 가장 먼저 순국지사들의 유해 봉환을 추진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듬해 6월 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를 모신 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에 대비해 미리 허묘를 만들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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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꼽히는 이토를 죽인 ‘원흉’이라 할 안 의사를 존경하고 숭모하는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진의를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 안 의사와 이토의 ‘동양평화론’을 같은 뜻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
최 원장은 일찍이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며 앞선 문명 세계를 체험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총리대신을 4차례나 지낸 68살의 노련한 정치가 이토와 비교할 때, 한학 말고는 정규학교나 유학 경험도 없던 31살의 조선인 청년 안 의사가 어떻게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평화 사상을 깨칠 수 있었는지에 주목했다.
그는 늘 그랬듯이, 옥중수기 <안응칠 역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망명지를 찾으라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중국 상하이로 간 안 의사는 마침 여행중이던 프랑스 출신 곽원량(르 각) 신부(황해도 지역 선교 담당)를 우연히 만나, 조선에 남아서 교육운동을 하라는 조언을 듣고 귀국했다. 그는 돌아가신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자책감에서 벗어나 진남포에서 삼흥(개인·국민·나라)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운영했다.’
“그때 곽 신부가 ‘절대로 고향(조국)을 떠나면 안 된다. 너처럼 온가족이 망명한다면 2천만이 모두 조선을 떠나버린 뒤 누가 지킬 것이냐’면서 들려준 게 자신의 고향 알자스로렌의 사연이었어. 1811년 독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자 지식인을 비롯한 지도층들이 모두 독일의 지배를 피해 떠나버리는 바람에 100년이 되도록 되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거였지.”
최 원장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알자스로렌(지금의 스트라스부르)은 곽 신부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안 의사에게 세례를 주고 순국 직전 고백성사(종부성사)를 받아준 홍석구(조제프 빌렘) 신부, 두 동생이 뤼순형무소에서 안 의사를 면회하도록 뒷바라지해준 안세화(플로리앙 드망주) 주교의 고향이었다고 말했다. 이들 프랑스 외방전교회 출신 3명의 신부를 통해 안 의사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배웠다. 진남포 시절 안 의사는 홍 신부 등으로부터 일본 및 세계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14일 사형 판결이 나자마자 안 주교가 관장하고 있던 서울 명동성당으로 ‘사형이다 신부 보내라-안중근’이라고 전보를 치는 등 순국 때까지 20여차례 안 주교에게 전보를 보낼 만큼 친밀했다.
“알자스로렌은 철광과 석탄 자원이 풍부했던 까닭에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패권 다툼이 반복되면서 서유럽 갈등의 불씨였어. 그러나 유럽은 그 전쟁의 원인을 평화의 촉매제로 전화시킴으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유럽 번영의 토대가 된 ‘유럽연합’ 탄생의 근거를 만들었지.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이 51년 독일 아데나워 총리를 설득해 이 지역에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킨 거야. 그 쉬망도 바로 알자스로렌 출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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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4일 일본 도쿄의 히비야공원에서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국장으로 치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초호화 장례식 장면. 3개 면에 걸쳐 이를 보도한 당시 프랑스의 대중잡지 <릴뤼스트라시옹>(1909년 11월27일치)을 고문서 수집가 김태진씨가 최근 유럽의 경매장에서 수집해 공개한 것이다. 이토의 장례식은 같은 날 경성의 장충단에서도 열려 대한제국 융희제(순종)의 황실 가족과 귀족, 고위 관료들, 그리고 수천명의 학생들이 동원돼 ‘조작된 애도’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00주기에 이른 오늘날 일본에서조차 그의 죽음은 잊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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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핵심인 ‘공존 사상’과 유럽공동체의 ‘공유 사상’을 연결해주는 고리로서 이들 세 신부의 영향에 관심을 쏟고 있는 최 원장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최근 프랑스 현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안 의사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해. 강대국 사이에 끼여 시달려왔고 지금도 분단의 고통 속에 놓여 있는 한반도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진정한 세계평화 사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 원장은 지금까지의 안중근 연구가 100년 전 의거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실증 단계였다면 앞으로 100년은 동양평화론을 발전시켜서 안 의사를 세계적인 평화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으면 한다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끝>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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