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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30 22:23 수정 : 2011.05.31 10:23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일본서 재판땐 사형 면할라
구라치국장 중국 뤼순 급파
재판서 사형까지 직접 지휘

병합반대세력 정보 얻으려
“자서전 쓰게 하라” 지시도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 관할지역이었다. 안 의사는 의거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혀 국경지방재판소의 검사에게 취조까지 받았으나 그날 밤 일본총영사관으로 이관됐고, 이후 일제의 관동도독부 산하 뤼순지방법원으로 송치돼 이듬해 3월26일 뤼순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안 의사는 왜 하얼빈도, 조선도, 일본 본토도 아닌 뤼순에서 재판을 받고 또 사형을 당해야만 했던 것일까?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1969년 옥중수기를 처음 발견한 이래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이 의문은 의거 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이었던 구라치 데쓰키치라는 인물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퍼즐 맞추기처럼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구라치가 안 의사의 거사 사흘 만에 뤼순으로 건너가서 한달간 머물며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안중근 의거 이후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안응칠 역사>에는 안 의사가 1899년 21살 때 한성에 올라와 겪은 다음과 같은 일화의 한 대목이 나온다. ‘해주부 지방 대병영 위관인 한원교에게 아내와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한 일을 당한 의사 친구 이경주를 도와주려 했으나, 도리어 이경주가 옥살이를 하게 됐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의거 직후부터 뤼순에서 안중근 의사의 재판과 사형을 총지휘한 구라치 데쓰키치 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최서면 원장이 최근 외교 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이력서에서 복사해 온 사진을 처음 공개했다.(왼쪽) 한때 ‘안 의사 수감중 고문설’의 근거가 됐던 뤼순형무소의 형구들.(오른쪽) 그러나 일제는 고문 대신 자서전을 쓰도록 유도했고, 이 형구들은 원래 뤼순지방법원 검찰국에 있던 것을 법원 건물이 인민병원으로 바뀌면서 형무소로 옮겨와 전시해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1970년대 중반, 최 원장은 일본 외교사료관에서 ‘한원교’ 관련 자료를 찾다가 구한말 대한제국이 일본으로 파견한 관비 유학생 명단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이들 유학생의 입학 수속부터 체재비·등록금·식비·양복값까지 경비를 지급한 담당자가 바로 당시 외무성 참사관이었던 구라치였어. 그래서 다시 구라치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1909년 11월 뤼순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왔어. 이를 단서로 추적을 했더니 <구라치 데쓰키치 정무국장이 뤼순 출장중 수집한 자료> 문서철이 나오더라구. 그게 바로 안중근 파일이었지.”

‘구라치 문서철’에는 76년 최 원장이 공개한 ‘안응칠 소회’를 비롯해 러시아 국경지방재판소가 안 의사를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기면서 제공한 사건 관련 문서를 일어로 옮겨놓은 ‘노국선취조번역문’도 들어 있었다. ‘노국선취조번역문’은 사법당국의 결정서, 신문조서, 일제에 기록과 안중근을 넘긴다는 통지문, 콘스탄틴 밀레르 러시아 검사가 받은 보고서와 그의 진술서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구라치를 뤼순으로 급파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이 지시한 핵심 임무는 3가지였다. ‘재판을 뤼순지방법원에서 진행할 것, 안중근을 사상범이 아닌 파렴치범으로 만들 것, 반드시 사형시킬 것.’ 이후 실제로 안 의사의 재판과 순국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고무라의 지휘대로 이뤄졌다.

“의거 당일 밤으로 러시아에서 일본 쪽으로 넘어간 뒤 안 의사를 두고 일본 쪽에서는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해. 관할 관동도독부 뤼순지방법원 검찰관인 미조부치 다카오, 한성에서 달려간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사령관 등이 서로 사건을 맡겠다고 다퉜던 거지. 기록을 보면 미조부치가 ‘공판은 내가 맡았는데 정작 안중근을 보지도 못했다’고 푸념하는 대목도 있어. 그건 일본 정부에서 개입해 조정을 했기 때문이었지. 고무라의 지시를 받은 구라치가 뤼순에 가서 이토를 저격한 사건 자체 조사는 뤼순법원에서 맡고, 통감부는 사건의 배경과 일-조병합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도록 분담시켰어. 그래서 아카시 사령관은 일단 한성으로 돌아갔다고 나와.”

재판이 시작되기 두달쯤 전인 1909년 12월2일 하달된 고무라 외무대신의 ‘안중근 극형 지령 전문’을 받은 뒤 관동도독부 뤼순고등법원장 히라이시가 화답한 전문. ‘만약 1심에서 사형을 언도하지 않으면 자신이 고법에서 직권으로 사형을 내릴 수 있도록 검찰로 하여금 항소를 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재판을 어디서 받는가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후 일제는 외국에서 범죄를 일으킨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현지 일본영사관에서 1심을 거친 다음 본토의 나가사키고등법원에서 2심을 받도록 했다. 이에 따르면, 안 의사도 하얼빈영사관에서 영사재판을 거쳐 나가사키로 건너온 뒤 최고재판소에서 최종심을 받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하지만 일제의 점령지였던 관동도독부에서는 본토와 달리 고등법원을 거쳐 최종심에서는 외무대신이 최고재판소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었고, 사형 선고도 가능했다.

“당시 일본 사법부에서는 파렴치범에게는 사형을 내리기도 했지만, 사상범은 상대적으로 우대해서 최고 무기형에 그치는 게 판례였어. 1891년 5월 일본 여행을 왔던 러시아의 황태자(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니콜라이 2세)가 대낮에 경호를 하던 일본 경찰의 칼에 피습당한 이른바 ‘오쓰 사건’ 이래 전통이었지. 러시아와 외교마찰을 우려한 일본 정부에서는 황족 도발죄를 적용해 당연히 범인을 사형에 처하라고 했지만, 최고재판소에서는 황족을 해친 사건이 아닐뿐더러 사법권의 독립을 앞세워 끝내 무기형을 내린 유명한 사건이잖아?”

미국 하버드대 법대 출신인 고무라와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나온 국제법 전문가인 구라치가 이런 판례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권으로 사형이 가능한 뤼순법원에 재판을 맡겼고, 개인적인 원한과 블라디보스토크 일부 불령선인들의 사주로 벌인 사건으로 축소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안 의사 순국 100돌을 맞아 지난해 10월 최 원장이 공개한 구라치의 회고록 <조선병합의 경위>(1939년)에서는 이처럼 일제가 안 의사를 사형시키려고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대응한 사실과 더불어 그 배경에는 한일병합 추진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또 한번 혼자서 무릎을 쳤어. 안 의사 재판의 의문점은 물론이고 하얼빈 의거가 얼마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이토는 한일 조기병합에 반대했는데 안 의사의 이토 암살 때문에 그게 앞당겨졌다는 일본 우익의 ‘모략성 왜곡’이 명백한 누명이라는 사실이 병합 주모자의 입으로 밝혀졌거든.”

구라치는 책에서 병합의 입안부터 실행 단계까지 전 과정을 증언해놓았다. ‘1909년 초에 이미 당시 가쓰라 총리가 병합 방침을 세우고 실행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그해 3월 최초의 병합 입안 문서인 ‘대한정책의 기본방침’(대한방침서)을 자신이 기초했다. 이 원안은 가쓰라 총리와 고무라 외무대신만이 공유하고 극비에 부쳐졌다가, 4월 마침 도쿄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여주고 병합 실행 계획을 설명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했던 이토는 뜻밖에도 선뜻 동의했고, 이에 두 사람은 안심하고 후임 통감인 소네 자작에게 공개했다. 대한방침서는 7월6일 각의에서 통과됐다.’

따라서 안 의사의 의거 몇달 전에 이미 일제는 병합을 결정해놓았고, 다만 실행 단계까지 절대 비밀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이토 암살사건이 터진 것이다.

‘한국 거주 일부 일본인 중에는 이토공 암살을 한국 황제가 사주했다고 하고 이를 이유로 단번에 병합을 단행해야 한다며 무리해 증거를 만들려고 했다. … 조선 주둔군 헌병사령관인 아카시 소장이 달려왔고, 검찰 쪽에서도 나카가와 이치스케 검사장이 오고, 한국어가 가능한 통감부 관계자(사카이 경시와 소노키 스에키 통역)도 왔다. … 이들은 뤼순에 체재하면서 안 의사를 감시하며 어떻게든 증거를 만들려고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

구라치의 이런 증언은 당시 조선 주둔 헌병사령부와 통감부 쪽에서 의거를 조기병합의 명분으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 황제가 사주한 사건으로 조작하려고 했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고무라와 구라치로서는 재판을 관례대로 본토에서 진행했을 때 사형을 시키기 어렵다는 것 말고도 안 의사에 의해 비밀 병합 계획이 전세계에 폭로되는 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던 것이었어. 또 한편으로는 안 의사를 통해서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히 파악해서 미리 ‘화근’을 제거해야 할 필요도 절실했겠지. 그래서 사카이 경시에게 바로 그 특명을 내렸던 거야.”

특히 구라치는 안 의사 취조 방법에 대해서까지 치밀하게 지침을 내렸는데, 자서전을 쓰게 할 것과 고문을 하지 말 것이 대표적이다.

“구라치와 사카이가 주고받은 보고서(편지)를 보면, ‘안(중근)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다. 자존심을 높여주면 얻을 정보는 다 나올 것이니 고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는 두 줄의 문장이 나와. 이 지침에 따라 사카이는 안 의사에게 자서전 집필을 요구했고, 안 의사 역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사형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옥중수기’를 통해 자신의 뜻을 남기기로 결심을 한 거였어.”

1910년 1월에 뤼순에서 발행된 <교정잡지>에는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안 의사를 소장실로 불러서 담배를 제공하거나 집필 도구를 조달해줬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런 ‘특별대우’도 실은 구라치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던 셈이다. 또 당시 뤼순형무소에서는 죄수가 쓴 원고나 유서는 가족에게 전해주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바로 이처럼 취조관의 명령에 따라 썼다는 이유로 일제는 <안응칠 역사>를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유서도 복사본으로 전해줬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옥중수기 원본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최 원장은 덧붙였다.

“구라치는 일제시대 최고의 외교관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이토나 데라우치 못지않게 주권을 침탈해간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안 의사를 뤼순에서 죽게 함으로써 100년이 넘도록 유해를 찾지 못하게 한 원인 제공자로 기억해둬야 할 인물이다.”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움말/안중근연구모임

장규식(중앙대) 장석흥(국민대) 최기영(서강대) 한시준(단국대) 한철호(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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