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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지리산 바래봉(1165m,·오른쪽 위)에서 팔랑치와 부운치에 이르는 능선은 해마다 5월이면 산철쭉으로 물든다. 면양 방목이 남긴 ‘선물’인 산철쭉 군락을 유지할 것인지, 자연에 맡겨 사라지게 할 것인지가 논란거리다. 사진은 지난해 5월21일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가 찍은 것으로, 올해는 오는 25일께 만개할 것으로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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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3돌] 행복 365
이야기가 있는 한국의 숲 ① 지리산 바래봉 산철쭉 군락지
(* 한겨레-생명의 숲 공동기획)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숲의 해’이다. 숲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노력이 중요함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현명한 손길은 자연과 인간을 모두 살린다. 사람의 삶과 역사, 생태가 어우러진 숲을 찾아 자연과 인간, 보전과 이용 사이의 갈등을 푸는 길을 모색해 본다.
40년전 이곳은 양떼 방목장
나무·풀 모조리 뜯어먹고
독성 품은 철쭉만 남겨
양들 떠난 뒤 10여년…
화원으로 남을 것이냐
야생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주민-환경단체 ‘묘수찾기’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 자리한 지리산 바래봉(해발 1165m)은 해마다 5월이면 진분홍 산철쭉 꽃으로 물든다. 전국 제일의 철쭉 군락지라는 유명세를 타고 한 달도 안 되는 개화기 동안 약 20만명의 탐방객이 꽃구경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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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봉 능선은 1972년부터 호주에서 도입한 면양 수천마리를 5~10월 동안 풀어놓는 방목장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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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철쭉 군락이 1970년대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들여온 양떼가 수십년 동안 산지를 훼손한 결과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양떼가 사라진 뒤 산철쭉의 쇠퇴현상이 두드러져, 그 복원을 둘러싼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양떼가 다니던 바로 그 길을 따라 오늘도 탐방객이 무리지어 걷고 있다. 산철쭉은 운봉읍 가축유전자원시험장 목초지가 끝나는 바래봉 기슭부터 탐방로 양쪽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고, 바래봉 정상부터 능선을 따라 팔랑치와 부운치에 이르는 능선 양쪽에 꽃터널을 이룬다. 철쭉 군락의 면적은 무려 22㏊에 이른다.
이곳의 철쭉사진을 찍어온 류오선(62·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씨는 “초록 양탄자 같은 목초 위로 진분홍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전국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이라며 “최근 산딸기가 철쭉 군락에 침입하는 등 단정한 철쭉 군락 모습이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문제는 양들이 남긴 ‘선물’이 한시적이라는 데 있다. 자연의 복원력은 약 20년 동안 바래봉을 완강히 지키던 산철쭉 군락을 흔들고 있다. 최근 바래봉의 미래와 관련한 중요한 질문이 터져나오고 있다. 자연의 가차없는 복원력을 막는 게 바람직할까, 또는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바래봉에만 있는 이 독특한 문화경관을 유지하는 것이 옳을까.
인구 5000명도 안 되는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인 운봉읍에서 지난달부터 3차례에 걸쳐 바래봉 철쭉 복원을 놓고 전문가와 시민단체, 산림청, 국립공원관리공단, 주민 대표가 모이는 토론회가 잇따라 열렸다.
지난 3일 토론회에서 주민들은 바래봉이 국립공원에 걸맞은 생태경관을 갖춰야 한다는 일부 전문가와 시민단체의 지적에 거세게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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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바래봉 철쭉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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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74) 전 운봉애향회장은 “바래봉이 지리산의 또다른 봉우리와 비슷하게 바뀌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주민들이 17년째 철쭉제를 치르면서 애써 지키고 가꿔 이제 전국의 명물이 됐는데 어떻게든 복원해 살려나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윤지홍 남원시의원은 “1990년대까지 1만 2000여명이던 운봉읍 인구가 현재 4300여명이고 그 절반이 노인”이라며 “이제 가진 건 철쭉밖에 없다”고 주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전했다.
주무기관인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양쪽 주장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짐을 지게 됐다. 김용무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장은 “철쭉 군락도 살리고 자연생태도 살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밖에 없다”며 “훼손지역 등에 우선 산철쭉을 심고 정상부 등은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바래봉 산철쭉 군락의 기원은 1968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우리나라에도 면양을 길러 농가소득을 올려보자고 말한 데서 비롯된다. 1972년 운봉에 한·호 면양시범농장이 국립종축장의 분소로 설치되면서 바래봉 일대는 가축몰이 개가 3000~4000마리의 양떼를 이끄는 한국 속의 호주로 바뀌었다.
당시 ‘털깎기 달인’으로 불리던 한종식(59) 가축유전자원시험장 반장은 “5월부터 10월까지 양들을 바래봉 일대에서 방목했는데, 양들이 다른 풀이나 나무는 모조리 뜯어 먹었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은 피했다”고 회고했다.
양들의 발굽 아래 바래봉 일대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러나 양에게 선택받은 산철쭉은 목초지에 뿌린 비료가 풍부하고 경쟁자가 없는 양 이동로를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0년대 중반 경제성이 떨어진 면양 방목은 중단됐지만 점차 무성해진 산철쭉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양떼가 사라진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바래봉 일대의 생태는 어떤 상태일까. 지난 4일 오구균 호남대 교수와 함께 산철쭉 군락지의 중심인 팔랑치~부운치 능선을 조사했다.
능선 등산로 양쪽에 자리잡은 산철쭉 군락을 억센 가시가 있는 산딸기가 밀어내고 있었다. 오 교수는 “나무를 벌채한 곳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산딸기와 미역줄나무”라며 “햇빛을 좋아하는 산딸기도 7~8년 지나면 그늘에 가려 사라지고 정상 숲으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에게 산철쭉을 쫓는 원흉인 산딸기가 자연 복원의 선구자인 셈이다. 산딸기 밑에서는 과거 목장의 유산인 외래종 목초를 뚫고 쑥이 돋아나고 있었다.
오 교수는 “산철쭉은 원래 고산 능선이 아닌 중부 이남지역의 산자락에서 주로 자라며, 바람 센 능선은 철쭉과 진달래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산철쭉 군락 사이사이에는 이미 능선을 좋아하는 노린재나무, 조록싸리, 고광나무, 떡버들, 쇠물푸레나무, 병꽃나무, 조팝나무 등이 돋아나고 있었고, 이 산의 최종 주인인 신갈나무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바래봉 능선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과 양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가파른 사면으로 가자, 200년은 돼 보이는 대형 철쭉과 30여년생 신갈나무, 야광나무, 떡버들이 훼손되기 이전 이 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 교수는 “정상 숲으로 가는 징조인 산딸기를 베어내고 제자리가 아닌 산철쭉을 심겠다는 건 국립공원 능선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산철쭉도 모두 없애는 것이 옳을까. 오 교수는 “인위적인 식재가 곤란하다는 것이지 기존 산철쭉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곳은 사람과 양이 선택해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경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고 해설판 등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운봉/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이 기획은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사업단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마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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