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29 17:12
수정 : 2011.12.29 18:07
|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마지막회 - 긴 여정 끝 도착한 졸업시험…
고기 메뉴 고대했는데 생선 딱 걸릴 줄이야
퀴진(요리)과정 졸업반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교실 창밖으로 싸라기눈이 내리고 있었고 시연교실의 스톡(육수)냄비에서는 향긋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오전 8시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재료를 다듬고 맛을 보는 셰프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내일이면 전선으로 떠날 훈련병들을 대하는 조교의 심정 같은 것이었을까, 끝까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전해졌다. 수업이 끝날 때쯤 셰프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주방에서 함께 땀 흘리며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아쉬움, 아직 배워야 할 것은 많은데 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고생스러웠던 긴 여정이 끝나간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
1. 졸업장을 거머쥔 이욱정 피디. 사진 제공 최완석
|
그날 밤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다락방에 올라가 오랫동안 손대지 않던 담배를 피워 물었다.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햄프턴코트 숲의 여우였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 한없이 두렵고 낯설었던 것들은 이제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로 변해 있었다. 요리학교 생활도 그랬다. 처음은 고꾸라졌다 일어나기의 연속이었다. 양파 하나 제대로 썰 줄 몰랐던 방송국 피디가 세계 최고 요리학교 정규과정에 덜컥 뛰어들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렇게 좌충우돌 구르면서 요리의 노하우를 하나씩 알았고 혀끝 손끝으로 음식 맛을 익혔다. 음식 프로그램을 제대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피디가 셰프의 세계를 직접 체험해봐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시작한 나의 치기 어린 모험은 어느덧 피니시라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밤새 울부짖던 여우의 저주인가
그리고 며칠 후 졸업시험. 코스 메뉴 4인분을 5시간 만에 완성하는 최후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리할 메뉴는 당일 아침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제발 생선 대신 고기요리가 걸리기만을 바랐다. 고기는 아주 잘하기도 어려웠지만 형편없이 망하기도 어려웠기에 한결 만만한 상대였다. 하지만 생선은 그런 회색지대가 없었다. 속이 안 익으면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었고 너무 익으면 살점이 설거지용 스펀지같이 퍽퍽해져 먹을 수 없었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채점표에 ‘식용 불능’(INEDIBLE)이라는 낙제점을 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시험 감독관이 내민 제비뽑기 상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던 쪽지 하나를 집어 펼쳤다. 종이에 적힌 메뉴는 감자 무슬린(버터와 생크림, 너트메그를 넣은 으깬 감자요리)과 시금치를 곁들인 화이트와인 소스의 농어 요리, 사과 타르트 디저트. 이런, 제기랄, 생선이잖아. 막판에 내 운발이 다했거나, 어젯밤 울부짖던 영국 여우의 저주가 작용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5시간에 걸친 최후의 혈투. 나에게는 주변 어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주변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공간에 실존하는 것은 요리하는 나와 감자와 농어, 시금치와 밀가루반죽뿐. 그것은 마치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격렬한 전투장면처럼 갑자기 배우들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이 되고 동시에 오디오가 ‘사일런스’가 되는 그런 초절정의 순간 같은 것이었다. 마감시간보다 무려 5분을 넘긴 시간, 드디어 나의 코스요리가 완성되었다. 시간 초과에는 가차없는 감점이 가해지기 때문에 더 불안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펍에 가서 친구들과 시커먼 기네스를 들이켜는 일밖에 없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불빛이 옥스퍼드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고 우리는 늦게까지 앉아 이별주를 마셨다.
이틀 뒤, 시험 결과를 듣기 위해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갔다. 면접실에 앉아서 기다리던 셰프가 내가 들어가자 서류철에서 채점표를 꺼냈다. 가슴이 반죽기 모터같이 요동을 쳤다. 채점표를 한참 들여다보던 셰프가 싱긋 웃더니 “아슬아슬했네. 미스터 리, 합격입니다. 축하해요. 셰프!”(Close call, Mr. Lee, but you passed the exam, Congratulation, Chef) 그렇게 나는 턱걸이로 르 코르동 블뢰 퀴진(요리)의 전 과정을 통과하였고 영광의 슈피리어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천만다행, 요리학교 졸업장에도 성적이 찍혀 나오지는 않았다.
|
2. 요리학교 친구들은 언제나 큰 힘이 된다.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활짝 웃고 있다.(맨 왼쪽) 3. 이욱정 피디가 수업시간에 정성스럽게 만든 수프. 사진 제공 최완석
|
식당의 요리사를 보면 동지애가 새록새록
정들었던 동기들은 런던, 파리, 베를린, 코펜하겐, 전세계의 레스토랑들로 자기 갈 길 찾아 헤어졌고 난 여의도의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요리유학을 다녀왔다고 하자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았다. 피디가 요리학교 나와서 뭐 하시려고요? 기술 배워서 나중에 레스토랑 하실 건가요?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르 코르동 블뢰에서 무얼 배웠던 걸까? 그 배움의 시간은 내 안에 어떤 씨앗을 남긴 거지? 그것은 프랑스 요리의 현란한 레시피나 테크닉도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은 한 접시의 요리를 앞에 놓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법이었고, 음식을 만드는 일과 요리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었다. 또한 그것은 타인의 요리, 다른 문화의 음식에 감탄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고, 좋은 음식과 그것을 우리에게 준 자연에 감사하는 법이었다. 아직 나의 나이프 스킬은 정확하지 못하고 주방에서의 동작은 굼뜨기만 하지만, 그런 깨달음 하나를 건졌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이젠 식당에 가면 주방이 먼저 보인다. 문틈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요리사들을 보며 동지애를 느낀다. 만인을 감복시킬 최고의 한 접시를 꿈꾸며 오늘도 뜨거운 주방을 뛰어다니고 있을 벗들이여! 나도 전세계 시청자를 행복하게 해줄 최고의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네! 기대해주게나!
<끝>
글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이욱정 피디는 얼마 전 <한국방송>(KBS) 다큐멘터리국으로 복귀했고, 인류 식문화를 주제로 한 누들로드의 차기작을 준비중이다. ‘누들로드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내년 상반기 ‘케이비에스 스페셜’을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