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킬러의 정확한 돼지잡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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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19. 보고 만지며 자연에서 요리 배운 페드로…장차 큰 요리사 되리라
영국 런던에서 포르투갈까지 가는 데 차로 꼬박 3박4일이 걸렸다.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를 지나 스페인을 거쳐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몰고 간 캠퍼 밴은 30년도 넘은 골동품이라 최고 시속이 95㎞ 정도. 그나마 2시간 달리고 10분씩 엔진을 쉬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빨리 갈 욕심을 접고 느긋하게 달렸는데 이것이 색다른 여행의 맛이었다. 고속으로 질주할 때는 도로 표지판과 앞차 뒤꽁무니만 보였지만 쉬엄쉬엄 가다 보니 산과 들, 마을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밤낮으로 뛰어다녀야 했던 방송국 생활, 눈코 뜰 새 없이 흘러온 요리학교 유학…. 잠시 달음박질을 멈추고 숨을 돌리고 싶었다.
포르투갈 여행길에 나선 이욱정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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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 부르며 돼지 해부…부자는 자연스럽고 노련했다 페드로 부자의 놀라운 면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집채만한 암퇘지를 창고에 가져가 매달 때만 해도 영화 <저수지의 개들>이 자꾸 연상되어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이 짝이 되어 부위별로 해체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움직임 하나하나가 도축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온 정성을 다해 머리를 자르고 뼈를 절단하고 살을 발라내는 부자의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으로 쓴다면, 그레고리안 성가를 배경음악으로 집어넣고 싶을 정도였다. 조리시간, 여느 학생들이 커다란 고기 재료를 앞에 두고 어떻게 트리밍(필요한 부위만을 잘라내는 작업)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 페드로가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고기를 다듬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신선한 고기를 장작불에 구워 내온 바비큐 요리를 서른 명도 넘는 대가족이 기다란 야외식탁에 앉아 나누었던 그날 저녁은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한 교실에서 공부할 때는 어리바리해 보이기만 하던 페드로가 왠지 특별해 보이던 날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다수의 요리학교 학생들과 요리사들은 자신의 도마 위 식재료들이 살아있었을 때 어떤 모양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재료를 접하는 곳은 자연이 아니라 슈퍼마켓의 냉장 진열대이기 때문이다. 이미 부위별로 해체되어 박스에 포장되어 진열대에 놓인 고기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길러졌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도축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요리사들은 자기가 만드는 샐러드의 채소들이 언제가 제철인지도 헷갈리기 십상이다. 마트의 채소들은 바다 건너온 수입산이거나 온실에서 사시사철 재배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촌에서 자란 페드로 같은 요리사는 다르다. 그는 좋은 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릴 적부터 보아왔고 두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포르투갈을 떠나 집에 돌아오는 길, 친구 페드로가 장차 큰 요리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질 허브의 진짜 향이 어떤 것인지, 야생의 블랙베리가 돼지고기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요리책이 아니라 자연에서 배울 수 있었기에. 글 이욱정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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