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24 14:00
수정 : 2011.03.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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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의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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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심정희의 스타일 액츄얼리
시간을 2년 전쯤으로 되돌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내게 <블랙스완> 시나리오를 건네며 “어떤 역을 하고 싶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줄 테니 골라만 봐”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릴리 역(주인공 니나의 발레단 동료이자 라이벌)을 선택할 것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약 먹었냐, 당신한테 그런 제안을 하게…” 식의 딴죽은 제발 걸지 마시라.(그러면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단 말이에요. 흑)
내면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데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주인공 대신 주변 인물이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악역이라고 할 수도 있을 릴리 역을 택하려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녀의 등에 새겨진 문신(위 사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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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 <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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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패션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디자인팀 중 하나인 ‘로다테’가 발레 의상 제작을 맡은 덕에 영화 제작 초기부터 패션계에서도 주목받은 <블랙스완>의 의상은 “과연 로다테!”라는 찬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마지막 공연에서 니나가 입은 무대의상은 ‘저런 옷을 죽기 전 한번이라도 입어볼 수만 있다면 엄지발톱이 열두번 빠지는 것쯤은 참을 수 있어’(정말?)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장담컨대 이 영화 개봉 이후 발레학원의 수강생 등록률과 로다테의 매출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중일 게다. 여자라면 누구나 발레를 배워 그런 옷을 입어보고 싶다는 꿈을 꿀 테니까.
그러나 로다테가 만든 깃털 발레복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릴리의 등에 새겨진 아찔한 타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옷이 “역시 아름다워”였다면 타투는 “아니 저런 타투가!” 식의 놀람과 충격을 동반하고 있었달까. 자유롭고 약간의 악녀 기질도 갖춘 릴리가 등에 커다란 타투를 새긴 채 백조 의상을 입고 우아한 춤을 추는 모습에는 패션계가 사랑해 마지않는 ‘상충되는 이미지의 조화’가 흘러넘쳤다.(사실 너무 우아하기만 하거나 너무 터프하기만 한 것은 재미없다.) 게다가 지금이 어떤 때인가. 디자이너들이 모델들에게 반지나 목걸이를 채우는 대신 몸에 갖가지 타투를 새겨넣음으로써 전체 룩에 포인트를 주는 ‘타투 전성시대’가 아니던가. 그런 측면에서 릴리의 등에 새겨진 커다란 타투야말로 릴리의 캐릭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한편으로 트렌드에도 정확히 부합하는 시각적 장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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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희의 스타일 액츄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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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등짝에 커다란 문신을 새기는 건 고사하고 목덜미나 팔목에 내 주변 사람들 하나씩은 다 있는 작은 별 하나 새기지 못하고 “나도 문신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를 몇년째 중얼거리고 있는 겁쟁이. 글을 쓰다 보니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점점 더 커진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말이야, 릴리 역을 나한테 맡겼으면 내 혼신의 연기를 보여줬을 텐데 말이지. 나는 이 기회에 엄마한테 등짝 맞지 않고 타투도 할 수 있었을 테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라고 누가 말 좀 전해줘요, 아로노프스키한테!
심정희 <에스콰이어> 패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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