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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1 17:48 수정 : 2019.04.11 19:32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흑해의 북쪽 연안에는 기마민족이 세운 스키타이 왕국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가 있는 지역이었다. 기원전 6세기 그곳에 아나카르시스라는 현인이 있었다. 아버지는 국왕 그누로스였다. 당시 그리스인들로부터 야만인 취급을 받던 민족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리스 사람이었고 그 영향을 받아 그리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그리스 문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며 널리 여행을 다녔다.

올림픽 경기가 열릴 때 그는 아테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일곱 현인으로 꼽히는 정치가 솔론의 집을 방문한 그는 하인에게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친구가 되려고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솔론은 법안을 준비하는 문제로 바빴다. 솔론은 “집안 사람들과 친구를 맺는 것이 더 좋다”는 대답을 전했다. 아테네 사람은 아테네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맺는다는 뜻으로 거절의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아나카르시스는 “이미 집안에 있으니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대꾸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솔론은 그의 기지에 탄복하며 웃음과 함께 그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리스와 스키타이의 제도에 대한 저서도 남겼고 800편의 시를 쓰기도 한 그는 외국인으로서 그리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비논리적인 일들을 재치 있게 비꼬곤 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한 예를 들자면 “그리스에서는 현명한 사람들이 말하지만 결정은 바보들이 한다”는 것이 있다. 아테네 사람들 사이에서 “스키타이식의 어법”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 바로 아나카르시스 때문이었다.

스키타이로 돌아간 아나카르시스는 형 카두이다스에게 살해되었다. 헤로도토스는 형의 이름이 사울리오스라고 기록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카두이다스라고 받아들여진다. 아나카르시스가 스키타이에 대지의 여신 키벨레를 숭배하는 제례 의식을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서 도입된 키벨레 숭배를 스키타이인들은 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키벨레를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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