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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7 17:36 수정 : 2019.03.07 19:17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68년 1월 개혁파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실권을 잡았다. 그는 민주화 과정을 추진하면서 시민들에게 더 큰 권리를 찾아주려 했다. 그리하여 “프라하의 봄”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봄은 여름을 넘기지 못했다. 위성국이라고 여기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달가울 리 없는 소련이 바르샤바 동맹의 가입국까지 동원하여 탱크를 몰고 진압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루마니아와 알바니아는 참가를 거부했다. 그런데도 무고한 시민 137명이 희생되었다.

1969년 3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우승 후보는 마땅히 소련이었다. 소련은 1963년부터 9년 연속 금메달을 따며 무적의 행진을 계속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침공에 항의하면서 주최하기로 한 세계선수권대회를 반납한 바 있었고, 그 결과 스웨덴에서 열리게 된 시합이었다.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터질 것 같던 그 대회는 더블리그로 열렸다. 팀들끼리 두번씩 맞붙은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질 수가 없었다. 선수들마다 사력을 다한 소련과의 두 경기를 2 대 0과 4 대 3으로 격파했다. 소련으로서는 5년을 이어온 무패의 기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스웨덴에 두 게임을 모두 내줬기 때문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에게는 메달의 색깔이 문제 되지 않았다. 단지 빙판에서나마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국가 전역에 축하의 물결이 일었다. 프라하에서는 여전히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에 대한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 시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 제지되어 큰 소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둡체크는 서기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소련과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저항하듯 관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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