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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9 19:05 수정 : 2018.11.29 19:25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세기 초엽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에는 ‘지하 철도’가 있었다. 이 역사적인 명칭은 ‘지하’에 있었던 것도, ‘철도’도 아니었다. 미국 남부의 가혹한 노예제를 피해 북쪽의 노예제가 없는 주나 캐나다로 도주하려던 흑인들을 돕던 비밀 조직을 그렇게 불렀다. ‘지하’라는 말은 숨어서 활동해야 했기에 불린 이름이었고 ‘철도’란 기차와 관련된 용어를 암호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도주를 돕는 자들은 ‘승무원’, 도주하는 노예는 ‘승객’ 또는 ‘화물’, 은신처는 ‘정거장’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도주한 노예로서 작가이자 정치가로 활약했던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자서전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 즉, 그들의 동기는 존중할 만한 것이지만, 그들의 활동은 노예 소유주에게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만듦으로써 실제로 노예들의 도주는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흑인 운동 지도자였던 윌리엄 듀보이스는 지하 철도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한 바 있었던 해리엇 터브먼이나 윌리엄 램버트의 행위를 열거하면서 특히 흑인 ‘승무원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주가 노예제가 없는 자유주를 선언하자 위기를 느낀 남부에서는 도주노예법을 강화하여 엄격하게 시행하고자 했다. 그 법은 자유주라 할지라도 그곳의 관리는 도주 노예를 붙잡은 노예 소유주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흑인들이 노예로 가장하여 농장에 침투한 뒤 ‘승무원’이 되어 ‘승객’을 ‘정거장’으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도주하는 도중 위험한 요소마다 흑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성사되기가 힘든 활동이었다.

애초에 도주노예법은 의회를 장악했던 남부 출신의 의원들에 의해 입안되고 통과되었다. 목화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득에 눈이 멀어 흑인은 단지 노동력으로만 간주하던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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