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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09 09:50 수정 : 2010.09.11 10:06

비관을 굳이 ‘음미’하진 말지어다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Q 남자친구의 ‘바닥’을 다 보기 전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23살의 여자구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요. 고향이 지방인지라 얼마 전까지는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기숙사 공사를 핑계로 자취를 하게 되었어요. 자취를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에요. 남자친구는 부모님과 함께 사니까, 제가 자취를 하면 피곤한 몸으로도 만나서 함께 편히 쉴 수 있겠다 생각한 거지요. 그렇게도 우리가 바라던 저의 자취의 꿈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남자친구가 퇴근하고 자취방에 와서 자고 다음날 바로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는데요, 남자친구 어머니께서 매일 남자친구의 귀가를 바라는 전화를 하세요. 바란다기보다는 뭐 거의 당연한 요구이지요. 하지만 그런데도, 27살이나 먹은 사회인 아들을 너무 단속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제도 남자친구 어머니에게 연락이 오고, 그래서 남자친구는 고민을 하다가 집에 갔어요. 남자친구가 결혼하자고 이야기를 꺼낸 건 거의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과 비슷해요. 저도 그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만, 그의 바닥을 다 보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고 있거든요. 동거는 싫고요. 남자친구도 저도 고민입니다. 매일 무거운 마음을 조금 안고서 제 방으로 오는 남자친구의 고민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남자친구가 매일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야만 하는 걸까요?

A솔직하게 고백하고 시작하자. 처음 이 고민을 접했을 땐, 그냥 패스, 하고 조용히, 못 본 듯 페이지를 넘겼던 게 사실이다. 절절한, 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다른 고민들과 함께 나란히 천칭에 올려놓고 보니, 아, 이 고민은 그저 산뜻하고 파릇파릇하고 풋내 가득한 ‘마이쭈’ 사과맛과 같은 것이로구나. 내겐 분명 그렇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내겐 그저 당연한 것을, 질문한 사람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묻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니 패스. 한데 이상하지? 2주가 지나고 3주가 흐른 뒤에도 계속 이 질문에 대한, 이 질문을 한 사람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결국엔 얼룩 같은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 얼룩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왜 그녀는 당연한 것을 ‘고민’의 이름으로 물었을까? 정말 자신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몇날 며칠 문득, 또 어느 땐 퍼뜩, 얼룩을 쥐고 지내다 보니, 이 또한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내 문제는 항상 그렇게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고민은 이 코너의 정체성과도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갈림길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정확하게,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또 한숨이 나올 수밖에.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민(문제)을 들고 질문을 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해결을 바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결을 바라지도 않는데 왜 질문을 하는가? 거기에서 또 한 번 역설이 발생하는데, 자신의 고민을 타인에게 질문하면서, 그 고민들을 한 번 더 스스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사실, 이건 꽤 달콤한 일이다.) 그러니 고민을 듣고 그에 대한 조언을 해주려는 사람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 사람은 정말 해답을 원하는 것인가? 해답이 아닌, 고민을 스스로 ‘음미’하고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고민을 ‘음미’하는 데 어떤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인가? 그에 따라 답은 두 가지, 세 가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 고민을 보고 그냥 패스, 해버린 것은 남자친구가 무거운 마음으로 자취방에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또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거도 싫다고 했고, 질문한 분도 그게 어머니의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해답은 이미 빤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금 질문한 분은 스스로의 고민을 ‘음미’하고 있거나, 그 ‘음미’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전자는 나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이나, 후자 같은 경우엔 몇몇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거 같다. 왜 고민을 ‘음미’하는 데 문제가 생겼는가? 가혹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좀처럼 남자친구의 ‘바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각한 마마보이거나, 어머니가 과도하게 외동아들을 싸고돌았다면 가능했을 ‘음미’가, 지금 제지당하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 ‘음미’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부모에게 독립적이지 못한 남자친구나 그의 어머니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일 터이나, 그런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을 거 같다. 고민을 만들고 고민을 ‘음미’하는 것은 하나의 버릇이자 하나의 증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그리고 그런 증상은 또다른 증상으로 계속 파생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연인과 결별한 후 홀로 베개를 적셔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하루이틀, 계속 떠나간 연인을 생각하다가 얼마 후, 불현듯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잠들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살짝 놀라는 일. 그러면 의도적으로도 다시 그 사람을 생각해내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일. 그때의 눈물은 과연 짠 것인가, 달콤한 것인가? 바닥을 보려고 꼭 애쓸 필요는 없다. 바닥은 시시때때로 수심 6m도 되었다가 또 때론 8m도 되는 법이니까. 그저, 일부러 비관을 음미하진 말지어다.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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