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 김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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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어준이 만난 여자
법의학 드라마 ‘싸인’ 김은희 작가
0. 1993년 여름, 석달째 배낭여행 막바지. 사람과 더위에 녹초가 되었던 터라 어디 인적 드문 곳에서 널브러지고 싶었다. 문득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났던 프랑스 벽화 장식가의 말이 떠올랐다. 삶이 고단하면 자긴 어떤 성당엘 간다 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나섰다. 세 번인가 기차를 갈아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작은 역에 내려 아무도 걷지 않는 언덕길을 걸었다. 휘적휘적 혼자 비탈을 오른 지 30여분. 희한한 건물 하나가 등장한다. 버섯돌이 대가리 썰어놓은 것 같은 지붕에, 치즈 구멍처럼 뚫린 외벽이 비스듬하다. 성당이 뭐 이래. 그런데. 세상에. 들어서자 몸이 굳는다. 선과 면과 색이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조우하고 있다. 이럴 수가. 공간 자체가, 기도다. 내 비록 무신론자이나 이 땅에 마땅히 신이 기거할 곳이 있다면 여기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건축이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란 걸. 설계는 치수를 재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거라는 걸.
내가 그들에게 열광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그 성당의 건축가는 물론이거니와 내겐 역사상 최고의 라인인 ‘BMW 2002’ 시리즈의 디자이너 조반니 미켈로티부터 ‘이터널 선샤인’의 천재작가 찰리 카우프먼까지, 오리지널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든 분야의 설계자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네 드라마에 불만이다. 요란한 화제 몰고 온, 대박 드라마들 모처럼 들여다보고 나면, 으레 짜증이 난다. 드라마에, 이야기가 없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사랑의 우여곡절. 의사가 나오면 의사가 사랑을 하고 형사가 나오면 형사가 사랑을 한다. 그리곤 대사만 가득이다. 주인공들, 줄기차게 떠들어댄다. 어느 순간 제발 그만 닥치라고 그 죽통을 날려버리고 싶을 만큼. <싸인>의 작가를 만난 건 그래서다. 지상파에선 드물게 장르물, 그것도 법의학 드라마를 집필중인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게다. 왜들 그러는지. 그게 작가의 문제인지, 그게 아님 대체 뭔지. 그렇게 작가, 김은희를 만났다.
①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의 작가를 만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몇 차례 조정 끝에 결국 그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16부 대본을 아직 넘기지 못했단다. 곧 회의하러 사람들이 온단다. 밖으로 나갔다. 얼른 기본사항부터 묻기 시작했다.
작가 커리어는 어떻게 출발했나. “95년 SBS 예능 공채로. 거기서 사수로 만난 게 장항준이다.” 저런.(웃음) “하지만 한 달 동안 얼굴도 못 봤다.” 장항준, 불성실한 건 그때부터 그랬구나.(웃음) “최고봉이었다.(웃음) 한 달 만에 나타났는데 아무리 95년이라지만 그 패션은 정말. 청바지에 청남방인데 그걸 또 허리 안에 쑤셔 넣고.(웃음) 그러고는 종신이(윤종신) 생일에 줄리아나 갔는데 여자들이 예뻤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하고 앉았고.(웃음)”
처음부터 드라마 하려던 건 아니었나. “장항준에게 고마운 점이다. 그때가 ‘박봉곤 가출사건’ 각본을 쓰고 있을 땐데 나한테 계속 보여줬다. 난 재미없다고 타박하고.(웃음) 그러면서 영화사에 쌓여 있던 다른 대본들을 접하게 됐고.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시나리오를 컴퓨터에 입력해 달라는데 그 과정에서 각본의 재미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남의 시나리오를 대신 쳐주다가. “그렇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항준에게 대본의 특정 신을 한번 써줄까. 그런 식으로.” 그러다가. “‘그해 여름’ 시나리오를 장항준 권유로 쓰게 됐고 그걸 ‘품행제로’ 조근식 감독님이 보시고는 영화가 됐다.”
통상적 코스와는 다른 건가. “보통은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를 목표로 작가협회 교육원을 이수하거나 드라마 공모전을 통한다. 그렇게 방송국과 연을 맺어 단편부터 장편까지 가는 건데, 난 예능으로 시작했으니까.” 예능에서 영화 갔다가 드라마로. “중간에 라디오 작가도 했다. 장항준이 돈 벌어 오라고 해서.(폭소) 한 5년 일이 없었더니 집에 쌀이 떨어졌다.(웃음)”
다 경험해봤더니 최고가 되기 가장 어려운 분야는. “결국 최고가 되는 건 다 비슷한 정도로 어렵다. 예능도 정말 피라미드다. 경쟁이 엄청나다. 일단 메인작가가 되면 페이도 대단하고.” 얼마나. “몇 억씩. 물론 최고는 극소수지만. 회계사 따로 둘 정도니까. 라디오도 최고가 되면 보수가 적지 않은 걸로 안다. 시나리오도 최고는 극소수고. 다만 라디오는 작가가 보이지 않고 예능은 협동 작업이고 영화는 현장에서 계속 대본이 바뀌지만 드라마는 자기 이름으로 끝까지 간다는 거. 하지만 모든 영상물은 결국 현장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작가는 연출을 잘 만나야 한다.” 남편이 연출이라 그 점은 유리했겠다. “15년을 같이 해왔으니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쁜 점은. “남편이 연출이라 나쁘다기보다 장항준이라 나쁜 점이 있다.(웃음) 사람이 너무 해맑으니까.(웃음) 화를 내야 하는데, 화는 화로 풀어야 하는데, 도무지 화를 못 내니까.(웃음)” 근데 장항준은 왜 <싸인> 10편에서 연출 관둔 건가. 대본 완성도를 위해서라던데 이유가 너무 그럴듯하다. 너무 그럴듯한 건 언제나 거짓말인데.(폭소) “장르물이다 보니 세트 하나 소품 하나도 사건마다 다르고 출연진도 다르니까 보통 드라마보다 품이 몇 배 더 든다. 거기다 영화와 시스템이 달라 너무 쫓겼다. 결국 본인이 자진했다.” 잘린 게 아니고? “아니고.(웃음)” 그건 본인에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남편이라도 속상했던 장면은. “1회 초반 가수 죽는 신. 자고 있는 것처럼 찍었더라.(웃음) 공중파 시청자는 너무 리얼하면 싫어할 수 있다고.(웃음)” 하나 더. “안 되는데.(웃음) 역시 1회 엄지원씨 첫 장면. 검사인데 매트릭스 가죽코트. 깃을 이렇게 올려서.(폭소) 그건 연출이 걸러줬어야 했다.” 배우들은 어떤가. 박신양은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워낙 노련하시니까. 무엇보다 대본을 정말 이해하고 연기한다.” 불만은. “끝나고 이야기하자.(폭소) 모든 배우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배우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제 배역에 빠질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9화 마지막 박신양, 전광렬의 대화 장면. 내가 보기에도 둘이 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듣고 정말 대화하는 것 같았다. 대단하다.” 그런데 <싸인>에는 왜 러브라인이 없는 건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웃음)” 미국, 일본, 한국 드라마의 차이는. “미드는 기본적으로 사건 중심이고 일본은 소소한 이야기 중심이고.” 한국 주인공은 왜 다 재벌인가. “여자들이 재벌을 좋아하니까.(웃음)” 왜 출생의 비밀에 백혈병이고 기억상실인가. 포장마차에서 처음 봤는데 왜들 그렇게 싸우고 지랄이고.(웃음) 이때 울리는 전화. 장항준이다. 날 바꾸라더니 얼른 끝내라고 난리다. 이제 겨우 본론인데. 일단 중지. 이렇게 짧은 인터뷰는 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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