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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2.24 11:41 수정 : 2011.02.24 14:54

‘싸인’ 김은희 작가

[매거진 esc] 김어준이 만난 여자

법의학 드라마 ‘싸인’ 김은희 작가

0. 1993년 여름, 석달째 배낭여행 막바지. 사람과 더위에 녹초가 되었던 터라 어디 인적 드문 곳에서 널브러지고 싶었다. 문득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났던 프랑스 벽화 장식가의 말이 떠올랐다. 삶이 고단하면 자긴 어떤 성당엘 간다 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나섰다. 세 번인가 기차를 갈아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작은 역에 내려 아무도 걷지 않는 언덕길을 걸었다. 휘적휘적 혼자 비탈을 오른 지 30여분. 희한한 건물 하나가 등장한다. 버섯돌이 대가리 썰어놓은 것 같은 지붕에, 치즈 구멍처럼 뚫린 외벽이 비스듬하다. 성당이 뭐 이래. 그런데. 세상에. 들어서자 몸이 굳는다. 선과 면과 색이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조우하고 있다. 이럴 수가. 공간 자체가, 기도다. 내 비록 무신론자이나 이 땅에 마땅히 신이 기거할 곳이 있다면 여기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건축이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란 걸. 설계는 치수를 재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거라는 걸.

내가 그들에게 열광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그 성당의 건축가는 물론이거니와 내겐 역사상 최고의 라인인 ‘BMW 2002’ 시리즈의 디자이너 조반니 미켈로티부터 ‘이터널 선샤인’의 천재작가 찰리 카우프먼까지, 오리지널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든 분야의 설계자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네 드라마에 불만이다. 요란한 화제 몰고 온, 대박 드라마들 모처럼 들여다보고 나면, 으레 짜증이 난다. 드라마에, 이야기가 없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사랑의 우여곡절. 의사가 나오면 의사가 사랑을 하고 형사가 나오면 형사가 사랑을 한다. 그리곤 대사만 가득이다. 주인공들, 줄기차게 떠들어댄다. 어느 순간 제발 그만 닥치라고 그 죽통을 날려버리고 싶을 만큼. <싸인>의 작가를 만난 건 그래서다. 지상파에선 드물게 장르물, 그것도 법의학 드라마를 집필중인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게다. 왜들 그러는지. 그게 작가의 문제인지, 그게 아님 대체 뭔지. 그렇게 작가, 김은희를 만났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의 작가를 만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몇 차례 조정 끝에 결국 그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16부 대본을 아직 넘기지 못했단다. 곧 회의하러 사람들이 온단다. 밖으로 나갔다. 얼른 기본사항부터 묻기 시작했다.

작가 커리어는 어떻게 출발했나. “95년 SBS 예능 공채로. 거기서 사수로 만난 게 장항준이다.” 저런.(웃음) “하지만 한 달 동안 얼굴도 못 봤다.” 장항준, 불성실한 건 그때부터 그랬구나.(웃음) “최고봉이었다.(웃음) 한 달 만에 나타났는데 아무리 95년이라지만 그 패션은 정말. 청바지에 청남방인데 그걸 또 허리 안에 쑤셔 넣고.(웃음) 그러고는 종신이(윤종신) 생일에 줄리아나 갔는데 여자들이 예뻤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하고 앉았고.(웃음)”

처음부터 드라마 하려던 건 아니었나. “장항준에게 고마운 점이다. 그때가 ‘박봉곤 가출사건’ 각본을 쓰고 있을 땐데 나한테 계속 보여줬다. 난 재미없다고 타박하고.(웃음) 그러면서 영화사에 쌓여 있던 다른 대본들을 접하게 됐고.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시나리오를 컴퓨터에 입력해 달라는데 그 과정에서 각본의 재미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남의 시나리오를 대신 쳐주다가. “그렇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항준에게 대본의 특정 신을 한번 써줄까. 그런 식으로.” 그러다가. “‘그해 여름’ 시나리오를 장항준 권유로 쓰게 됐고 그걸 ‘품행제로’ 조근식 감독님이 보시고는 영화가 됐다.”

통상적 코스와는 다른 건가. “보통은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를 목표로 작가협회 교육원을 이수하거나 드라마 공모전을 통한다. 그렇게 방송국과 연을 맺어 단편부터 장편까지 가는 건데, 난 예능으로 시작했으니까.” 예능에서 영화 갔다가 드라마로. “중간에 라디오 작가도 했다. 장항준이 돈 벌어 오라고 해서.(폭소) 한 5년 일이 없었더니 집에 쌀이 떨어졌다.(웃음)”


다 경험해봤더니 최고가 되기 가장 어려운 분야는. “결국 최고가 되는 건 다 비슷한 정도로 어렵다. 예능도 정말 피라미드다. 경쟁이 엄청나다. 일단 메인작가가 되면 페이도 대단하고.” 얼마나. “몇 억씩. 물론 최고는 극소수지만. 회계사 따로 둘 정도니까. 라디오도 최고가 되면 보수가 적지 않은 걸로 안다. 시나리오도 최고는 극소수고. 다만 라디오는 작가가 보이지 않고 예능은 협동 작업이고 영화는 현장에서 계속 대본이 바뀌지만 드라마는 자기 이름으로 끝까지 간다는 거. 하지만 모든 영상물은 결국 현장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작가는 연출을 잘 만나야 한다.”

남편이 연출이라 그 점은 유리했겠다. “15년을 같이 해왔으니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쁜 점은. “남편이 연출이라 나쁘다기보다 장항준이라 나쁜 점이 있다.(웃음) 사람이 너무 해맑으니까.(웃음) 화를 내야 하는데, 화는 화로 풀어야 하는데, 도무지 화를 못 내니까.(웃음)” 근데 장항준은 왜 <싸인> 10편에서 연출 관둔 건가. 대본 완성도를 위해서라던데 이유가 너무 그럴듯하다. 너무 그럴듯한 건 언제나 거짓말인데.(폭소) “장르물이다 보니 세트 하나 소품 하나도 사건마다 다르고 출연진도 다르니까 보통 드라마보다 품이 몇 배 더 든다. 거기다 영화와 시스템이 달라 너무 쫓겼다. 결국 본인이 자진했다.” 잘린 게 아니고? “아니고.(웃음)” 그건 본인에게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남편이라도 속상했던 장면은. “1회 초반 가수 죽는 신. 자고 있는 것처럼 찍었더라.(웃음) 공중파 시청자는 너무 리얼하면 싫어할 수 있다고.(웃음)” 하나 더. “안 되는데.(웃음) 역시 1회 엄지원씨 첫 장면. 검사인데 매트릭스 가죽코트. 깃을 이렇게 올려서.(폭소) 그건 연출이 걸러줬어야 했다.” 배우들은 어떤가. 박신양은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워낙 노련하시니까. 무엇보다 대본을 정말 이해하고 연기한다.” 불만은. “끝나고 이야기하자.(폭소) 모든 배우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배우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제 배역에 빠질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9화 마지막 박신양, 전광렬의 대화 장면. 내가 보기에도 둘이 대사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듣고 정말 대화하는 것 같았다. 대단하다.”

그런데 <싸인>에는 왜 러브라인이 없는 건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웃음)” 미국, 일본, 한국 드라마의 차이는. “미드는 기본적으로 사건 중심이고 일본은 소소한 이야기 중심이고.” 한국 주인공은 왜 다 재벌인가. “여자들이 재벌을 좋아하니까.(웃음)” 왜 출생의 비밀에 백혈병이고 기억상실인가. 포장마차에서 처음 봤는데 왜들 그렇게 싸우고 지랄이고.(웃음) 이때 울리는 전화. 장항준이다. 날 바꾸라더니 얼른 끝내라고 난리다. 이제 겨우 본론인데. 일단 중지. 이렇게 짧은 인터뷰는 또 처음이다.


‘싸인’ 김은희 작가
16부 대본 넘겼단 말 듣고 이틀 후 새벽, 다시 작업실로 향했다. 장항준이 예의 그 명랑하기 짝이 없는 미소로 반긴다. 한눈에 봐도 수면 부족 부부다. 얼른 끝내줘야겠다. 지난번 멈춘 지점서 다시 시작. 이번엔 둘 다 동참.

왜 우리 드라마는 사랑타령뿐인가. “빨래터 아낙들의 뒷담화, 그 집 남편이 어디서 애를 데려왔대, 깔깔깔. 그 빨래터가 바로 우리 막장 드라마의 원류다.(웃음) 면면한 전통이다.(웃음) 사실 미드와는 자본에서 비교가 안 된다. 거긴 작가 20명이 집단 창작하고 우린 한 사람이 일주일에 대본 두 개씩 쓴다. 그렇게 촉박한데 장르물이기라도 하면 세트와 장소부터 문제다. 사랑이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남녀 주인공만으로 충분한데. 요즘은 제작비 때문에 엄마 아빠도 없어지는 추세다.(웃음) 주인공 중 한 사람은 혼자 살고. 만날 장소까지 한 번에 해결되니까. 규제도 많으니 소재에 대한 자기검열도 있고. 그런데 어떻게 연쇄살인범이 주인공 되겠나. 드는 돈은 두 배에 시청률은 절반인데. 일본은 그래도 만화의 영향으로 장르가 다양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제한된 소재에 적은 돈으로 빨리 만들어 시청률까지 내야 하니까.”

근데 왜 장르물을 한 건가. “작가 이전에 시청자로서,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거다. 그 덕에 아주 개고생 했지만.(웃음) 드라마는 대본을 아침에 받아 그날 다 찍기도 하더라. 때론 방송이 나가고 있는데, 한쪽에서 그 마지막 신을 편집한다. 그게 늦으면 그냥 컬러바 나오는 거다.(웃음) 한 번은 속초에서 방송 3시간 전에 촬영이 끝난 적이 있었다더라. 편집은커녕 서울까지 갈 시간도 부족한데. 오토바이 경주 선수 2명 불렀단다. 한 명 다치면 나머지 한 명이라도 도착하라고.(웃음) 그런 환경에서 한류가 나오는 거다. 위대하다!(웃음)”

영화와 드라마가 다르던가. “카메라만 같고 모든 게 다르다. 영화는 120분 한 갠데, 드라마는 70분 20개다. 그걸 영화 한 편 찍는 시간에 다 찍는다. 매주 두 편씩 영화 개봉하는 셈이다. 영화가 달구지면 드라마는 에프원(F1)이다. 여관 가서 잘 시간조차 없다. 기네스북 잠 안 자는 기록은 한국 드라마 연출가들이 벌써 다 깼다.(웃음) 그리고 영화 시나리오는 스케치다. 현장에서 계속 수정된다. 하지만 드라마 대본은 최종 설계도다. 영화감독은 모든 장면이 자기 머리에서 나오지만 드라마 연출가는 다음 대본을 모른다. 완전한 분업체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면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다. 그래서 연출과 싸우는 배우는 있어도 작가와 싸우는 배우는 없다. 작가가 그 배우 마음에 안 들면 다음 편에서 외국으로 유학 보내버리니까.(웃음) 그리고 대사 한 마디 넣어버리면 끝나거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에요.(폭소)”

작가는 첫 회 시체 장면 마음에 안 들었다던데. “그럴 경우 영화는 당연히 다시 찍는데. 그게 큰일 아닌데. 드라마는 그게 큰일이고 쪽 팔리는 일이더라. 돈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고. 하필 그 배우가 일본 일정으로 없기도 했고.” 마음에 드는 장면은. “딱히 없다.(폭소)” 그럼 엄지원 가죽코트는. “그 장면 위해 엄지원씨가 직접 제작한 건데. 콘셉트 과잉이었다. 영화에선 그래도 되는데, 그래서 괜찮겠지 했는데 드라마는 아니었던 거다.” 그럼 일주일에 두 편씩 쓰는 건 어떻게 가능하던가. “사람들이 드라마 한다니까 그렇게들 홍삼을 주더라. 해보니까 알겠더라. 죽지 말라고 주는 거다.(웃음)” 그런데 연출하다 대본으로 빠졌다. 궁금한 건 하나다. 누가 먼저 이야기했나.(웃음) “잘리기 전에 스스로를 잘랐다.(폭소) 사실 나흘 연속 밤샘 촬영하고 죽겠는데 마침 16부가 20부가 됐다. 장르물이라 대본 준비가 훨씬 어려운데. 이러다 모두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피(CP) 찾아갔는데 놀라지 않더라. 그럴 거 같았어, 그런.(폭소) 영화 쪽 사람들이 적응하기 힘들다는 걸 아는 거지.”

마지막 덤으로 배우 이야기. 박신양과 전광렬의 장단은 뭔가. “단점이 알고 싶은 거겠지.(폭소) 박신양은 작품에 빠져 들어가는 속도나 깊이가 대단히 빠르고 깊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일찍 혼자 들어가 있을 경우가 있다. 전광렬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첫번째 테이크다. 실수가 없다. 그 장문의 어려운 대사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한다. 그런데 만약 기술적 엔지가 나서 다시 찍는다. 그럼 첫번째만큼 안 나온다.” 김아중과 엄지원은. “엄지원은 가끔 헤어나 의상이 쪼끔~ 이상할 때가 있다.(웃음) 김아중은 정말 열심히 준비하는데 현장에서 상황이 바뀌면 혼란스러워하는 게 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작가가 되어야 하나. 어떤 사람은 안 되는가. “예를 들어 그냥 전철을 타고 가다가도 옆에서 사람이 떠들면 그걸 자기도 모르게 관찰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그런 호기심, 그게 자기 본성에 배어 있는 이들이 작가를 하는 거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이들은 작가를 할 수 없다.” 여기서 접고 바로 자리를 떴다. 컬러바, 무서워서. 그나저나 참, 귀여운 부부다.


김어준이 만난 여자
그저 작가 개인의 역량 문제인 줄로만 알았다. 역시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나대면 안 되는 거다. 근데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오리지널 설계자로서의 세계적 작가를, 우리도 누릴 수 있는 걸까. 조만간 방송국과 제작사 관계자들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 <싸인>의 대박부터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다. 어쩌면 거기가 출발점일 수도 있겠다 싶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투 비 컨티뉴드.

PS - 아참, 그 성당은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이다.

글 딴지일보 총수·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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