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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1 20:02 수정 : 2011.05.01 20:02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성공회대 외래교수

실업문제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사회복지적 관점-인권적 관점은
확연히 다르게 자리매김되는 것

[싱크탱크 맞대면] 한국 인권의 현주소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성공회대 외래교수

"일자리·취업의 문제는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거나, 쌓아 놓은 개인의 ‘스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의무이행 차원에서 그 책임주체가 규명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우리 헌법 32조에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문화되어 있다. 이 조문에서 ‘모든’이라는 형용어는 공연한 수사로 붙은 게 아니다. 하다못해 개인 간의 각서나 계약 따위도 이해당사자인 ‘갑’과 ‘을’ 간의 권리·의무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어서 자구 하나하나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조문이 작성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국가와 국민 간의 기본적 권리·의무관계를 정한 헌법 조문인 다음에야 오죽하겠는가. 헌법은 ‘갑’을 국민으로, ‘을’을 국가로 하여 그 권리·의무관계를 조문화한 것이다. 따라서 헌법상 근로의 권리란, 다른 말로 하자면 ‘국가는 국민의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를 진다’는 의미가 된다. 학벌이 있든 없든, 집안 배경이 좋든 나쁘든, 가진 게 많든 적든, 잘났건 못났건, 공부를 잘했건 못했건, 국민이면 누구나 일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국민이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그야말로 취업에 목숨을 걸고 나서도 도저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취업할 수가 없다면, 그래서 근로의 권리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면,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요즘처럼 이른바 완벽한 ‘스펙’을 갖춘 사람에 한하여서만 취업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이라면, 사실상 근로의 권리가 일부의 국민에게만 보장되는 셈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면, 우리 헌법 32조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국민에 한하여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그 요건에 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앞뒤가 맞는다는 것이다. 실업대란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권리에 기반한 헌법상 기본권의 재해석이 더욱 절박하게 요구된다.

최근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는 복지국가 담론은 사회복지적 상상력에 의하자면 그것이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든 선택적 복지를 지향하든 결국 국가재정의 형편에 따라 그 수준과 범위가 결정되고 마는 한계에 봉착한다. 재정 확충이 선결과제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은 헌법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그리고 이미 대한민국 정부가 유보조항 없이 비준함으로써 국내 법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사회권협약)의 6조 규정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사회권협약 6조는 ‘이 규약의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수락하는 노동에 의하여 생계를 영위할 권리를 포함하는 근로의 권리를 인정하며, 동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이 규약의 당사국이 근로권의 안전한 실현을 달성하기 위하여 취하는 제반 조치에는…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기술 및 직업의 지도, 훈련계획, 정책 및 기술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협약 당사국의 노동권 보장 의무를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일자리·취업의 문제는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거나, 쌓아 놓은 개인의 ‘스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전고용을 향한 국가의 의무이행 차원에서 그 책임주체가 규명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100만 실업대란의 시대에 취업 여부가 순전히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는 오해와 왜곡이 횡행하고 있다. 취업을 못해 심지어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시급과 일당에 목을 건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실업자를 무능하거나 실패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차별적 시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10년 가까이 성차별 조사 업무를 해오다 계약 연장이 거부된 강인영 조사관(왼쪽)이 지난 2월28일 마지막으로 출근해 서울 을지로 인권위 사무실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며 동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실업수당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보자.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실업수당은 노동자가 원치 않는 실업을 당한 경우 당장의 생계 유지를 위한 우선적인 조치로서 사실상 긴급구조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회권적 관점에서 이를 재구성하자면, 국민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여야 할 의무를 진 국가가 이를 보장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노동권을 침해한 데 대한 국가의 범칙금 또는 벌금 지급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고용 있는 성장’이란 개념도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실업자가 국가를 상대로 근로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한다면 어떨까? 우리에겐 꿈만 같은 이런 상황이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인도 등 일부 국가의 법원에서는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된 적이 있고, 판례는 점차 진보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실업문제에 대한 접근과 시각에 있어서 이처럼 사회복지적 관점과 인권적 관점은 확연히 다르게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사회복지의 실현이 곧 사회권의 실현이고, 사회권의 실현이 곧 사회복지의 실현이라고 단순 등치시키는 용감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인권적 상상력이 일천한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권의 실현 정도는 현실적으로 각 나라와 사회의 사정에 연동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무주체로서 국가의 책무까지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권리에 기반한 복지국가 담론에 따르면, 재정의 확충이 선결조건이 아니라 국민 기본권 실현을 위한 국가의 의무이행이라는 차원에서 재구성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 점이 사회권적 상상력의 변별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비단 여기서 예로 든 근로의 권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교육·급식·의료·주거·보육 등 모든 사회권적 영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미래비전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복지국가로 수렴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비전은 기존의 관성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전환의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그 출발은 물론 인권에 기반한 상상력이다.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치의 수준 높은 통합과 변증법적인 진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가와 시장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이제 인권에 대한 고려 없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권시민사회의 자력화와 자구적인 대안 모색 또한 동시에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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