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09 19:21
수정 : 2012.04.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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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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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내 삶의
콘텍스트에 관한 통찰을 가능케 한다
요즘 피부로 느끼는 경험이다
‘요즘 행복하세요?’라고 묻고 ‘최근 데이트는 몇 번이나 했나요?’라고 물으면, 두 질문의 대답은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 그러나 두 질문의 순서를 바꾼다. ‘최근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나요?’를 먼저 묻고 ‘요즘 행복하냐?’고 물으면, 데이트를 많이 한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질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답의 내용이 달라진다.
‘콘텍스트’(context)가 바뀌면 ‘텍스트’(text)의 의미가 바뀐다. 콘텍스트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텍스트가 아예 반대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저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삶의 콘텍스트가 바뀌는 것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일기나 여행을 통한 자기성찰 등 내 삶의 콘텍스트를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외국어 공부를 새롭게 시작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언어는 곧 생각’이다. 현대 심리학의 이론적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장 피아제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37살에 사망한 러시아의 심리학자 비고츠키의 주장이다. 피아제에게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의 다양성에서 기인하는 문화적 차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추상적 사고의 논리는 언어에 상관없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고츠키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생각은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 없이 생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고츠키는 생각을 ‘내적 언어’(inner speech)라고 정의한다. 언어를 습득하면서 아동은 언어로 매개되는 모든 고등정신기능을 ‘내면화’(internalization)한다. 따라서 비고츠키에게 발달이란 문화적 존재가 되어 감을 뜻한다. 논리적인 내적 경험의 ‘외면화’(externalization)를 성숙으로 이해하는 피아제와는 정반대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모국어에 기초한 구체적 텍스트를 상대화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콘텍스트에 관한 통찰을 가능케 한다. 요즘 내가 일어 공부를 ‘자발적’으로 시작하며 피부로 느끼는 경험이다. 순수한 관심에서 이렇게 외국어를 공부해보긴 처음이다. 학창시절 입시를 위해 억지로 영어를 익힐 때나, 독일 유학 시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데어 데스 뎀 덴’을 반복해서 외울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아주 사소한 문법의 차이, 혹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익힐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문화적 콘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생긴다. 왜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을까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아주 즐겁다.
요즘 난 메이지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의 낯선 단어들을 어떤 방식으로 번역했는가에 관해 호기심이 급발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culture, society와 같은 단어들을 왜 ‘文化’, ‘社會’로 번역했는가에 관한 시대사적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매우 유식해질 것 같다는 격한 흥분도 느낀다. 동시에 늙으면 도대체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아주 간단히 해결했다.
나는 나중에 늙으면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가방에 넣고 비행기 타는 게 꿈이다. 그리고 젊고 예쁜 여자 옆에 앉아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차례로 꺼내 읽을 거다. 독어책은 작게 소리를 내서 읽을 거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영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옆 좌석에 안 예쁜 여자가 앉아 있으면 바로 내려 비행기표를 다시 끊을 거다. 아무튼 난 그렇게 곱게 늙어갈 거다. 젊고 예쁜 여자 옆에서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을 번갈아 읽어가며….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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