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6.16 18:18
수정 : 2010.06.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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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사장의 망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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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곰사장의 망해도 어쩔 수 없다
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였다. 이제는 슬슬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싶었는데 웬일로 나오나 싶어 자세히 봤더니만 티브이에서 하는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이었다. 불현듯 2년 전 생각이 났다. 그때 이 노래를 축구랑 엮어서 팔아먹을 생각을 했다. 2002년의 ‘오, 필승 코리아’ 이래로 축구 응원가는 한국에서 록 음악을 갖고 장사를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인 것이 사실. 마침 무슨 페스티벌 오디션을 보기 위해 이 노래를 처음 녹음했는데, 중간의 ‘워어어어어’ 하는 대목에 힘을 싣느라 대여섯명의 목소리로 웅장하게 녹음했더니만 이건 딱 축구장 분위기다 싶었다. 호나우지뉴로 분장한 뮤지션이 해변에서 공을 모는 콘셉트의 뮤직비디오까지 구상을 했다. 하지만 프로듀서이자 작곡자인 장기하가 결국 한마디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 “난 축구 싫다.”
사실 나도 축구가 싫다. 유소년 시절, 천박한 운동신경을 타고난 까닭에 체육 시간에 갖고 노는 둥글둥글한 모든 것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괜찮았지. 고등학교 때의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해마다 내가 다니던 학교를 포함해 네 개 학교가 출전하는 지역 축구대회가 있었는데, 이때 해야 할 응원의 수준이 실로 북쪽의 매스게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달리고 탱크가 대포를 쏘는 광경을 하나의 픽셀로서 표현하기 위해 얼차려와 욕설로 점철된 군대 스타일의 준비를 거쳐야 했고, 경기 당일은 조금이라도 틀리면 상하좌우에 위치한 선배들에게 발길질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축구장에서 응원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이 새끼야. 지금 축구 보냐?”였다.
그래서 2002년에는 감히 광장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평소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어느 보드게임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봤다. 사실 막상 보니까 재미있었다. 민족의 자긍심 이전에 몸집 조그마한 사람들이 커다란 유럽인들을 용케 이기는 광경은 자연스레 감정 이입을 유발할 만한 것이었다. 불편한 것은 놀이치고는 돈 냄새가 과하게 풍긴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한 채널에서만 중계하기로 해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의 점령도가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광고는 월드컵 일색이다. 길거리 응원과 붉은 악마 둘러싸고 나오는 얘기들도 대기업 스폰서에 관한 것이다. 돈 냄새 맡은 장사치들이 잔치판에 들어와서는 산통을 깬다는 느낌이다. 돈벌이 그만하고 놀 때는 그냥 놀면 안 될까. 축구 보면서.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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