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4.15 08:29
수정 : 2010.04.15 08:29
[매거진 esc] 곰사장의 망해도 어쩔 수 없다
개화기 이래 가장 들여오기 힘든 서양 문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이폰이 출시된 지 이제 다섯 달이 다 되어 간다. 한편에는 호들갑스러운 열광이 있다. 한국에선 기껏해야 마니악한 컴퓨터나 만드는 회사로 여겨졌던 애플은 엠비(MB) 정권 및 부동산에 필적하는 보편적인 술자리 얘깃거리가 되었고, 교주 스티브 잡스는 덩달아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의 위치를 획득했다. 반대편에는 근심이 있다. 휴대전화 하나는 세계적으로 잘 만든다고 여겨졌던 재벌전자들, 삽시간에 시대에 뒤떨어진 애물단지가 되어 한방에 훅 갈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근심이 지극하다 보니 ‘애플교’에 맞서 ‘삼성교’를 지키려는 이 교주 휘하 토속 신앙인들이 지면까지 빌려 삼성의 설립자인 이병철 회장이 28살의 잡스에게 전수한 경영자의 길이 지금의 아이폰을 낳았다는 신화까지 만들어지는 판이다.
이러한 열광과 근심 사이에 정부의 ‘아이티(IT) 명품인재 양성 사업’이 있다. 전자에서는 잡스의 정자를 공수해 와서 한국인의 줄기세포에 이식한 후 복제인간을 찍어내는 광경이, 후자에서는 샤넬과 루이뷔통 노트북 가방을 지닌 아이티 인재들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 일단 코미디. 내용은 역설적이다. 창의성이 메마른 작금의 현실을 성토하며 한국판 스티브 잡스를 키워내야 한다는 호들갑에서 나온 생각인데, 기껏 한다는 게 아이티 업계에서 잘하는 사람 뽑아서 돈 주는 것과 돈 많이 들여서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기관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데자뷔!
캡콜드(@capcold) 형이 트위터에 올린 말을 인용하자면 스티브 잡스, ‘전화망 불법 해킹 기기로 데뷔. 마약질. 대학 중퇴’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여성동아> 3월호를 보니 창의적 천재로 키우는 성공 키워드라면서 “내 아이를 스티브 잡스처럼!”이란 기사가 있던데, 세상에 어느 대담한 부모가 저렇게 살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싶다. 창의성이란 게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특성인데 누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 종류의 인간들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면서, 알아서 자란다고 본다. 애초에 창의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굳이 뭔가 도와주고 싶다면, 남다른 걸 닥치는 대로 하다가 망할 때 좀 건져줬으면 좋겠다. 성공한 명품인재들, 그들 중 다수는 새로운 것을 했다기보다는 남들 하는 걸 더 잘한 사람들일 테다. 그런 사람들한테 줄 돈으로 망하는 사람들 건지면 되겠다. 실리콘 밸리에서 세계 최고의 벤처기업들이 나오는 건 거기가 실패했을 때 가장 재기하기 쉬운 ‘실패의 요람’이기 때문이라는 안철수 교수의 얘기, 망하면 대뜸 병신이라 생각하는 한국 같은 환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와주지 못하면, 내버려두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붕가붕가레코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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