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13 23:15
수정 : 2010.01.14 14:41
[매거진 esc] 곰사장의 망해도 어쩔 수 없다
작년 이맘때의 심정은 집 앞 텃밭에 취미 삼아 농사를 지어 볼 요량으로 도라지 씨앗을 뿌렸더니만 그게 알고 보니 산삼의 종자였던지라, 얼떨결에 “심봤다!”를 외치게 된 농부의 마음과 같았다. 소속팀인 장기하와 얼굴들의 기대하지 않은 성공과 함께 맞이한 새해, 신년 계획이고 뭐고 할 게 없었다. 당시 엄청난 신곡 ‘지’(Gee)를 들고 돌아왔던 소녀시대가 괜히 라이벌처럼 신경 쓰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앞으로 펼쳐질 한해는 오로지 반짝거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막 수확이 끝난 텅 빈 밭을 마주하고 있는 농부가 이런 마음일까? 반짝거렸던 지난 1년6개월이었다. 처음 장기하를 꼬드겨 싱글 음반 <싸구려 커피>를 제작했을 때만 해도 그저 근근하게라도 생업과 병행하여 음악 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목표치는 “대중성이 빵점”이라는 농담 반 악의 반의 평가를 곁들여 500장. 그랬던 게 몇 만장이나 팔린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두 달 전 단독 공연을 거하게 하고선 활동을 중단했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사실 이렇게 횅한 밭뙈기 앞에 선 게 처음은 아니다. 어느덧 올해로 6년차에 접어드는 회사, 별 볼 일 없을 때가 재미 좋을 때보다 더 길었다. 그래도 그때는 마냥 재밌기만 했다. 망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었으니. 딱히 투자한 돈도 없고 사무실도 없이 자취방을 전전하던 회사였다. 실패해서 잃을 것이라고 해봐야 손으로 직접 시디 만드느라 들어간 시간인데, 그 정도는 그냥 빡세게 취미 생활 했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동안 “장기하와 얼굴들 소속사 대표입니다”라며 성공한 벤처기업가처럼 우쭐대며 다니고, 장기하와 얼굴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월급도 주고 사무실도 차릴 때는 좋았다. 이제는 그게 다 부담이다.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벌어야 한다. 잃을 게 생긴 것이다.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장기하와 얼굴들 없이도 살아남도록 하자”고 신년 계획을 세워보지만, 이건 목표일 뿐이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모르겠다. 작년 한해 제작한 음반들이 적지 않으나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반을 제외하고는 팔린 수준이 용돈벌이도 안 됐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일을 해야 했기에 정초에 미뤄뒀던 작업실 공사를 했다. 하루 내내 장도리 들고 벽을 뜯었다. 인부를 불러다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풀이로 고기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머리보다는 몸을 써야 한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미래, 일단 오늘부터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신년 계획은 구정쯤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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