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18 21:31
수정 : 2010.08.18 21:31
[매거진 esc]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안녕하세요. 네, 저는 잘 지내지 못합니다. 집이 더워서 잠을 못 자겠고, 그러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기분도 울적하고.”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고, 우리는 교육받았다. 진짜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야, 의례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뿐. 직장생활을 3년쯤 하고 나면 가장 친한 친구가 안부를 물어올 때조차 일단 의례적으로 재잘대게 된다. 얼마나 쉬운가. 괜찮은 척하는 일이란. 한편으로는 상대가 그렇게 괜찮은 척해주는 일이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편하다. 요즘 유행어를 빌려 말하자면 ‘진심 같은 거 끼얹지 말고’ 살아요, 우리.
진심과 관계없는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수록 사회적으로 깬 인간이 되는 사회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의 영국 여왕은 진심과 관계없는 대화의 일인자였다. 원래는 그랬다. 어쩌다 독서라는 취미를 갖게 되면서 취향과 기호의 신세계에 눈을 뜬 그녀는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질문(“요즘 어떤 책을 읽나요?”)을 던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진짜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 “전에는 여왕이 속내를 내비친 적이 없었으므로, 아첨을 했어야 할 시종무관은 멋쩍어서 당황하기만 했다. 이것은 시종무관이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여왕의 진짜 인간적인 면이었고, 시종무관은 그런 모습이 (가짜 인간적인 면들과는 달리) 전혀 달갑지 않았다. 여왕 자신은 그런 감정이 책 읽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젊은 시종무관은 여왕이 자기 나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고 여겼다. 감수성이 싹트는 것을 노망이 시작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황스러운 것이다. 누구나 알고 보면 딱한 사정이 있기 마련. 그렇지만 오랫동안 솔직함과 담쌓아 깔끔했던 일적인 관계가 감정으로 질척거리기 시작하면 ‘이제야말로 진실한 소통이 되겠구나’가 아니라 ‘이 인간이 미쳤나’로 결론이 흘러버린다. 무엇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솔직 운운하며 달라고 하지도 않은 마음을 주면 받는 쪽의 난처함이란. 어르신들이여, 마음은 청춘이라고 하지 마시옵소서. 마음은 됐고, 술잔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다혜/<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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