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27 20:20
수정 : 2010.01.27 20:20
[매거진 esc]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그러면 선배들은 누구에게 응석을 부리지? 윗사람만큼이나 아랫사람이 많아진 어느 날, 회사를 떠나는 선배들, 윗사람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종종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한테 손을 벌리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누구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때늦은 궁금증이 일곤 한다. 좋은 연애는 친구에게 자랑하고(부러워하는 얼굴을 볼 때의 쾌감), 잘된 일 자랑은 후배에게 하고(존경 어린 시선을 마주할 때의 우쭐함)…, 하지만 술값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 고민거리만 580가지가 있을 때 미간에 주름을 잡고 찾아가 문을 두드리게 되는 대상은 언제나 그런 연장자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깝다고 생각해도, 아무리 서로 허물없는 사이라 해도, 그들이 사표를 내는 순간까지 겪었을 고통이나 두려움, 고민을 결코 제대로 헤아려본 일이 없다.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으면 그 ‘기댈 곳 없음’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별나거나 일그러진 사람이 아닌, 친화력이 있고 온건하고 근면한 사람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비롯하는 비밀과 거짓말. 누구의 마음에나 깃들어 있는 자만심과 이기심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장밋빛 볼의 과거에 이르는 그 모든 것. 누구나 제각기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 길은 하나였고 우리가 그 길 위에 지금 서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 에브리맨.
오랫동안 해 온 일을 떠난 윗사람들에게 슬쩍 이 책을 찔러주고 싶은 건 그래서다. 아저씨, 아줌마, 마음 놓고 섹스하던 젊은 시절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숨이 막히던 첫 순간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내버려두세요. 기댈 곳 없어도 참지는 마세요. 그렇게,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딸에게 한 말은 사실 약해진 자신을 위해 읊는 주문이 된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이다혜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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