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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18 19:18 수정 : 2010.08.18 19:18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 지난 8일 동북아시아의 밝은 미래를 담은 평화선언 포스터를 조별로 만들고 있다. 미나미보소/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④ 공동 역사교육을 위한 실험

‘한·중·일 청소년 역사캠프’ 현장

“일본 국기는 정말 쉬워.”

일본 지바현에서 온 여고생 이치하라 나나코(16)양이 빨간 매직으로 일본 국기의 동그란 원을 그려가며 쿡쿡 웃었다. 한국의 강다영(17)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태극기 4괘를 빠르게 칠해가고 있는 데 견줘, 중국 난징사범대학교 부속 고급중학교 2학년생 첸위페이 군은 “20분 남았다”는 교사의 재촉에도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중국 오성홍기에 들어가는 별은 한쪽 귀퉁이의 각도가 36도거든요. 지금 재는 중이에요.”

지난 8일 오후 1시, 일본 지바현 미나미보소시의 ‘소년자연의 집’. 이곳에 모인 9회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참가자 120여명은 평화선언문 발표 행사를 위해 커다란 도화지 위에 글과 그림을 섞어가며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치하라 등 19명으로 구성된 디(D)반 학생들은 도화지 위에 3개국 국기를 동그랗게 배치한 뒤 그 위에 굵은 펜으로 토론 끝에 결정한 선언문을 적어나갈 예정이다.

3국에서 모인 120명 아이들
“군위안부 일본서 안배우고
간토대지진 중국선 몰라요”

‘평화선언문’ 공동작업 하며
이해하고 연대하는 힘 키워
“경쟁만 하지말고 함께 진보”


만 13살부터 20살까지 비슷한 또래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5일 자기소개로 탐색전을 벌이더니, 6일 저녁 7시30분부터 진행된 둘쨋날부터 ‘평화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중국의 천훙진양은 “평화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한·중·일 3개국어로 벌떼처럼 의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국 학생이 발언하면, 그 말을 일본어와 중국어로 일일이 통역하는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가며 토론은 한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다면 그 자체로 위험한 거 아닐까? 서로가 같이 발전하려는 연대의식이 필요할 것 같아.”(한국·이재웅) “인간에게는 모두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나 이기심이 있잖아. 그러니까 국가 사이의 실력의 차이를 줄여나가야 해.”(중국·첸)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똑같은 실력을 가진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일본·가가와 미요코) “얘기가 딱딱해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부터 실천을 해보자. 이를테면 주변에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것을 바로잡아주는 일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때?”(한국·김규현)

올해 캠프는 도쿄 동쪽에 자리잡은 지바현에서 진행돼 1923년 9월 발생한 간토(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중국인 학살 문제,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현장학습이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난징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난징대학살도 자주 주제로 떠올랐다. 토론 과정에서 서로가 그동안 서로를 너무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토 가즈노리(17)군은 “난징대학살과 종군위안부 문제를 일본 아이들은 대부분 잘 모르지만, 한국과 중국 아이들은 잘 알고 있어서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이런 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더 친해지는 것은 힘들죠.” 가가와 미요코(17)양도 “간토대지진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배우지 않아 잘 몰랐다”고 말했다.

경기외고 2학년 이재웅(17)군도 “한국 할머니들만 위안부로 끌려간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중국인, 심지어 일본인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첸도 “난징에서는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게 자주 듣지만 간토대지진은 중국 교과서에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아 나를 비롯해 중국 학생들은 대부분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했다.

“자 이제 5분. 정리하세요.”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의 최인영(26) 부장이 평화선언문 주변에 둘러선 아이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첸의 만만디를 보다 못한 쑤루이린양 등 중국 여학생들이 펜을 빼앗아 재빨리 중국 국기의 다섯개의 노란 별을 그려넣고, 바탕의 빨간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국가 그리기가 끝나자 일본의 가가와양이 “우리는 동아시아 역사에 더 관심을 갖고 자국만의 관점이 아닌 더 넓은 시야를 갖는다”, 중국 학생들은 “동아시아 3국은 언제나 함께 진보해야 한다”고 써넣었다. 한국에서는 왼손잡이인 막내 박혜수(14)양이 삐뚤거리는 글씨로 “우리는 동아시아 3국의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고 적었다. 박양은 “우리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만 보면 평화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다른 나라가 도와줘서 잘살게 됐으니까 이제는 못사는 나라를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선언문이 완성되자 아이들은 이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남자 ‘무궁화 그리기’가 전문이라는 장유나(14)양이 옆반에서 불려왔다. 선언문의 한 귀퉁이에 꽃잎이 다섯개인 분홍색 꽃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희들 무궁화꽃을 들어본 적이 있니?” 지난 사흘 동안 디반을 맡아 토론을 진행한 교토 출신의 전직 역사교사 노무라 지요코가 일본 학생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어떤 꽃인데요?”(가가와)

“저렇게 예쁘고 상냥한 꽃이란다.”

“네, 그렇군요.” 꽃보다 더 예쁜 얼굴을 한 아이들이 서로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미나미보소/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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