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바뀐 옛 고겐사. 조릿대 묘표전시관과 강제노동자료관이란 팻말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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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③ 동아시아 시민운동으로
홋카이도 슈마리나이댐 만든징용자 위패 인근 절서 확인
민중사 운동가들이 유해발굴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도노히라 요시히코(65) 홋카이도 포럼 대표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고겐(光顯)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1995년부터 ‘조릿대 묘표(墓標)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일반 신도들이 낡은 절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다며 해체하려 하자 도노히라가 인수해 역사학습과 교류의 장으로 만들었다. 일제 때 이 일대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다 숨진 이들이 아무런 표지도 없이 묻혀 무성한 조릿대가 묘비를 대신했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홋카이도 중부의 외딴 시골에 있던 이 절은 여러 가지 인연이 겹치면서 동아시아 시민운동의 새 구심체로 떠올랐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 지역 주민, 지자체가 협력해 수년간 조선인 유골 발굴작업을 벌인 아사지노의 시도도 연원을 따져보면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젊은 승려의 나들이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번져갔다. 도노히라는 현재 후카가와에 있는 이치조(一乘)사란 절의 주지다. 1960년대 중반 종단이 운영하는 교토의 류코쿠대학에 들어가 한일협정 반대시위, 종교인 평화운동 등을 체험하고 다시 후카가와로 돌아왔다. 1976년 가을 친구들과 함께 슈마리나이 호수에 놀러 갔는데 한 할머니가 그들을 불렀다. 고겐사 본당에 잔뜩 있는 위패들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모르니 봐달라고 했다. 1934년께 세워진 이 절은 쇠락해 상주 스님이 없었다. 위폐는 중이 장례를 치를 때 법명, 속명, 나이, 사망 연월일을 써놓은 것이다. 읽어보니 10~20대의 젊은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본인 외에 조선인 같은 이름도 있었다. 사망 시기는 1935년에서 45년에 걸쳐 있었다. 도노히라는 위패의 주인공들이 슈마리나이 댐의 희생자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슈마리나이 호수는 댐 건설로 생긴 일본 최대의 인공호수다. 담수면적이 2373㏊나 된다. 1974년 도립자연공원으로 지정됐으며 지금은 각종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위락시설이 들어섰다. 하지만 70여년 전에 이 일대는 공포의 노동현장이었다. 1935년 슈마리나이와 나요로를 잇는 철도 부설 공사가 시작됐고 우류천을 막아 5만㎾ 출력의 발전용 댐을 만드는 대형공사가 수년 뒤 진행됐다. 1943년에 완공된 댐의 높이는 45.5m로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
1997년 한일청년 만남 결실
2001년 동아시아워크숍으로 1989년 가을 한 한국인이 도노히라를 느닷없이 찾아와 한 달 동안 절에서 묵게 해달라고 했다. 현재 한양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로 있는 정병호(55)씨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던 그는 일본 보육원 제도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이치조사에서 독특한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 것이다.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평화·교육 등에 대해 얘기하다 의기투합했다. 도노히라는 논문 작성에 마음이 바쁜 임시 기숙생을 슈마리나이로 데리고 갔다. 정 교수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비참한 역사에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비전문가들의 발굴이 설사 선의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현장의 많은 정보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귀국해 대학에 자리를 잡으면 전문가와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발굴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1997년 여름 슈마리나이에서 ‘한-일 대학생 공동워크숍’이 열렸다. 정 교수가 박선주 충북대 교수와 대학생 30여명과 함께 현지에 도착했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은 텐트를 치고 숙식을 같이했다.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수칙을 정하고 언어의 장벽을 넘어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했다. 박선주 교수의 지도 아래 발굴작업을 재개해 4구의 유골을 찾았다. 하지만 교육·사회 환경이 다른 곳에서 자란 두 나라의 젊은이들은 토론회를 하면서 많이 부딪쳤다. 서로 상처만 주고 헤어지는 것은 아닌지 워크숍에서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그럼에도 충돌과 갈등을 통해 상호이해를 높였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해마다 비슷한 모임이 이어졌다. 장소도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옛 고겐사 앞에서 역사 학습과 교류의 장으로 만든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도노히라 요시히코 이치조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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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경화 흐름 등에 맞서
아시아인 공동대응 발걸음 모임이 이어지면서 젊은이들이 기획을 주도해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대학생 시절부터 만났던 사람들이 이제 30대가 됐다. 대부분은 사회인으로 정착했지만, 뜨거운 연대의식은 유지되고 있다. 워크숍 참가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도 제법 나왔다. 일부는 이제 한국과 일본에서 평화, 화해, 대북 인도적 지원 등을 다루는 시민단체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다. 눈이 맞아 결혼에 이른 다국적 결합도 몇 쌍 나왔다. 지난 5월에는 총련과 민단계의 젊은 남녀가 양가 부모의 반대를 뚫고 워크숍 관계자들의 축복 속에 결혼에 골인했다. 일본 쪽의 흥미있는 현상으로는 2세들이 대를 이어 운동을 한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공동워크숍 3인 공동대표의 한사람인 도노히라 마코토(33)는 도노히라 스님의 아들이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를 이끌었던 오노데라 마사미 전 다쿠쇼쿠 홋카이도단기대 교수의 아들 마사토도 핵심 요원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소풍 가는 기분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슈마리나이에 오곤 했다. 도노히라 마코토의 요즘 걱정거리는 대학생들의 참여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워크숍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대학생 중심으로 동력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젊은이들이 계속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또 고교생 주체의 워크숍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현재 삿포로의 일본 사립학교와 조선학교가 참여하고 있다. 이 조선학교는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의 무대가 된 곳이다. 슈마리나이/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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