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11 21:44
수정 : 2010.08.1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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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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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시민단체서 도와달란 요청에 감식작업 나서
유품 없이 DNA만으로는 신원확인 어려워
“한국전 민간희생자 시민운동 방식 발굴을”
홋카이도서 조선인 유골 발굴 지도 박선주 교수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이다. 해마다 6월25일에 즈음해 국군 전사자들의 유골을 찾아내려 애쓰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소속 장병들의 움직임이 언론에 등장한다. 우리 정부가 이 작업에 나선 것은 언제부터일까? 10년 전이다. 원래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한시적 기념사업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면 일제 때 국외로 끌려갔다가 숨진 희생자의 유골을 정부가 나서서 발굴한 적이 있나? 없다. 하지만 13년 전에 일본 홋카이도로 가 유골 발굴을 지도하고 감식작업을 벌인 대학교수가 있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63) 교수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국군 전사자나 수많은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이 현재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 1970년대 초 첨단학문이라는 체질인류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버클리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수천년 전의 유골을 연구하던 그에게 갑자기 주문이 몰려들어왔다. 식민지 지배나 한국전쟁 때 숨져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유골이 대상이 됐다.
10년 넘게 해마다 방학이면 발굴 현장에 있던 박 교수는 올여름 모처럼 한가하다. 사연을 들어보면 좋은 얘기가 아니다. 일본처럼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민간인 학살 희생자 발굴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현실적 벽에 부닥쳐 포기했다. 지난 2일 충북대 유해발굴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일본에서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실제로 유골 공동발굴 작업을 한 것은 홋카이도의 슈마리나이, 아사지노 두 군데라고 할 수 있다. 언제 어떤 인연으로 가게 됐나?
“슈마리나이에 처음 간 것이 1997년이다. 정병호 한양대 고고인류학과 교수가 현지에서 아이누 등 소수인종 보호나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평소 해보고 싶었고 의미있는 일이라 갔다.”
이전에도 그런 발굴작업을 했나?
“유해 발굴 사업은 아니고 고고학 발굴 조사 때 민묘가 나오면 유골을 감식해왔다.”
아사지노 비행장 터 발굴은 2005년 시굴 때 가서 쭉 관여를 했는데 홋카이도 현지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나?
“발굴을 총괄하고 유골이 나오면 감식하는 것이다.”
일본의 고고학 수준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마리나이에 가기 전에 현지에서 과학적 발굴 조사는 없었나?
“없었던 것 같다. 70년대 중반부터 소라치 지역에서 민중사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반 활동가들이 유골을 발굴하는 식이었다.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의 체질인류학 수준은 아주 높은 편인데 그쪽의 전공 학자들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일본의 풍토는 정통파 학자들이 재야단체와 함께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조선인 유골 발굴이 정치적 문제로 번질 수 있어 꺼렸는지도 모른다.”
일본 학자들한테 특별히 도움을 받은 것은 없었나?
“그럴 것은 없었다. 내가 고고학 과정을 알고 사학에서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적 이해가 다른 분보다 조금은 빠를 것이다. 현장에서 이런 자료들이 필요하다고 요구를 하면 일본인들이 아주 능숙하게 대응을 했다. 자료를 바로바로 입수하고 정리도 잘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인가?
“예를 들어 유골에 화장의 흔적이 있으면 사용된 나무의 종류, 원산지, 원래 용도 등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자료를 구해서 갖다 줬다. 발굴할 때 못이 제법 나왔다. 조사해 보니 비행장 활주로 건설 때 나온 폐목을 가져와 화장을 했더라. 아사지노 같은 곳은 경비행기가 내릴 것을 대비해 목판 활주로를 만들었다. 유골이 불에 많이 탄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런 이유를 따져볼 수 있는 자료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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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지노 유골 발굴 터에 조선인 희생자를 애도한다는 팻말이 외롭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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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실행위원회가 그런 전문적 요청에 대응할 역량이나 자질이 있었나?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의 수준이 높았다. 역사교사를 한 분은 자료를 정말 많이 갖고 있더라. 비행장 완공이 1944년이라 당시 항공사진이 있으면 현재의 지형과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해 구해달라고 했더니 갖고 왔다. 지금은 숲이나 풀로 덮여버린 공동묘지, 비행장이 그때 사진에는 다 나온다.”
타버린 유골의 디엔에이(DNA) 검사를 하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나?
“반 정도 탄 것은 디엔에이 검사가 가능하지만, 최소한 유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친족을 찾아 추적할 수 있다. 그냥 디엔에이 검사만으로는 할 수 없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들과 계속 교류를 했는데 그들이 방한해서 공동작업 한 일도 있나?
“2005년 고양 금정굴 발굴 때 찾아와 참관을 했다. 정식 작업이니 대학원 과정 등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면 발굴을 시킬 수가 없다.”
국군 전사자 유골 발굴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6·25 50주년을 맞아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1999년 국무총리 산하에 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 주먹밥 먹기 행사 등을 논의하다가 전사자 발굴을 주요 사업으로 하기로 의견이 모아진 모양이다. 도와달라고 해 실무자를 만나 얘기를 들었더니 발굴사업이 아니라 장의사 사업이었다. 체질인류학자 1명에 장의사 2명으로 꾸린다는 거였다. 그렇게는 절대로 못하니 정식 발굴단을 만든다면 하겠다고 했다. 2000년 육본에 6·25 기념사업 담당관실이 편성돼 3년간 한시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국가의 정체성 문제가 걸려 있으니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해 육본에 전사자 유해발굴과가 창설됐고 다시 2007년에 유해발굴감식단으로 확대됐다.”
지금은 민간인 집단학살자 발굴이 주된 일인 것 같다.
“2007년 가을부터 진실화해위에서 민간인 발굴을 도와달라고 했다. 민간인 발굴을 위해 일종의 협력체를 만들었다. 발굴본부는 충북대에 있고 내가 단장을 맡고 있다. 실제 발굴은 각 지역의 대학에 맡겨서 하고 이쪽으로 유골이 오면 4~5개월간 감식 작업을 한다. 3년 동안 여기에 모인 유골이 1600구나 된다. 정식 안치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 안에서 아직 최종방침이 정해지지 않았다. 이제 진실화해위도 문을 닫는 판이라 이래저래 고민이다.”
올해는 무슨 발굴을 하나?
“지난해에 공주 상왕동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골 340구를 찾았는데 시간과 예산 부족으로 작업을 중단해 아직 80구 정도가 남아 있다. 진실화해위 활동도 끝났으니 일본처럼 시민운동 방식으로 해보려고 했다. 유족들과 협의를 했는데 경비 마련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난색을 표하더라. 그게 됐으면 일본의 활동가들도 참여시키려고 했는데 올해는 무산될 것 같다.”
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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