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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09 22:52 수정 : 2010.08.09 22:52

히가시카와정에서 조선인 강제연행을 조사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저녁때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가운데 정면으로 보이는 사람이 곤도 노부오 변호사.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① 지자체가 나섰다 시민이 움직였다


홋카이도 히가시카와정
어두운 과거사 밝히는
시민 ‘캐는모임’ 활동 동참
지역홍보지에도 내용 실어

히가시카와정은 일본 홋카이도 중부의 작은 지자체다. 정(町)은 시, 촌과 같이 기초행정단위의 하나이다. 주민 수가 7800명에 조금 못 미치는 이 지자체는 ‘사진의 마을’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스스로를 알리기 위한 방안으로 1985년 사진의 마을 선언식을 하고 국제사진전을 개최했다. 인기가 아주 높은 고시엔 고등학교 야구대회를 모방해 1994년부터 고등학생 대상으로 ‘사진 고시엔’ 대회도 연다. 둘 다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행사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10월 히가시카와정은 전혀 다른 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자치체 간부 직원이 한국에 출장을 가서 강제동원진상규명위(현재의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방문하고 일제 때 이 지역으로 끌려와 강제사역을 했던 생존자들을 찾아가 면담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묘한 정치·사회적 풍토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됐다. 왜냐하면 강제연행의 피해자나 유족을 찾아다니며 조사나 지원활동을 벌이는 것은 시민단체나 연구자들의 전유물이었지, 공공기관이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야시 가즈사토(55) 기획총무과장은 한국인 생존자들을 찾아 만나러 가면서 내심 상당히 각오를 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줘 한국인의 인간성을 다시 봤다고 말했다. 하야시 과장이 들은 당시의 상황은 대단히 엄혹했다. 한겨울에도 숙사 지붕이나 벽에 난 구멍으로 눈이나 찬 바람이 들어와 대단히 추웠고 식사량이 부족해 항상 배가 고팠다고 했다. 나무봉으로 맞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 같다는 증언도 들었다. 하야시 과장의 출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우익단체들의 시비 전화가 걸려왔다. 공비를 사용해서 출장을 간 의도가 무엇이냐, 국민의 세금을 그런 데 써도 되느냐고 따져묻는 것이다. 우익단체들은 강제연행이나 동원 사실조차 부정한다. 조선인들이 스스로 일본에 돈 벌러 왔다거나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고 억지주장을 한다.


히가시카와정 사무소가 내는 홍보지에 실린 조선인 강제연행 조사활동.
히가시카와정의 하야시 과장 파견은 어두운 과거사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일본 당국의 소극적 자세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획기적 시도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역의 시민단체가 한국에 조사를 가는 데 동행하는 형식이 됐다. 시민단체가 행정당국을 움직여서 강제동원 조사를 위한 출장의 첫발을 내디디게 한 것이다. 이 단체의 이름은 ‘에오로시발전소·주베쓰천 유수지 조선인 강제연행·동원의 역사를 캐는 모임’(약칭 ‘캐는 모임’)이다.

모임의 역사는 짧은 편이다. 출범한 지 2년이 좀 넘었으니 수십년의 활동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지역의 단체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히가시카와정에도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니 조사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모였다. 회원도 정의회 의원, 역사교사, 평화헌법을 지키는 9조의 모임 회원, 은퇴한 연금생활자 등 열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일천한 역사와 소수 회원의 단체임에도 ‘캐는 모임’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다.


일본 주베쓰전 지도
이들은 무엇보다도 관을 조사활동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60~70년 전의 어두운 과거를 마음 깊은 곳에 꼭 감춰두고 있는 노인들이 입을 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관이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야 했다. 한국의 강제동원진상규명위 조사단이 지난해 7월 이 지역을 방문한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캐는 모임’은 조사단과 함께 공동보고회 형식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 자리에 마쓰오카 이치로 정장이 나오도록 초청했다.

또 정사무소가 매달 내는 홍보지 <히가시카와>에 공동보고회 내용을 싣고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상황이나 생활상을 조사하고 있다고 알렸다. 모임 회장인 곤도 노부오(54) 변호사는 <히가시카와> 2010년 7월호에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조사에 관한 보고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배부되는 홍보지는 재외거주자에게 우송하는 것까지 포함해 4000부 정도 된다. 규모가 크지 않은 지역사회에서 홍보지의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내용을 읽고 증언하는 노인들이 소수이지만 나오곤 있다.


‘캐는 모임’이 활동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곤도 회장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정청의 홍보지 이용에 대해 그는 “틀린 것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니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갖고 추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곤도 회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원래는 티브이 카메라기자였다. 티브이방송사 등을 상대로 영상뉴스를 파는 ‘일본전파뉴스’라는 회사에서 일했다. 1950년대 보수세력의 역풍으로 엔에이치케이(NHK), 도에이 등지에서 쫓겨난 진보적 기자들 중심으로 60년에 만들어진 영상물 통신사다. 그런 배경이 있어 베트남전쟁 당시 서방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하노이에 지국을 개설했다.

그는 이 회사에 입사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붕괴 등을 취재하고 아프리카의 혹독한 기아 문제를 다루는 특집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제3세계 취재를 하면서 일종의 풍토병에 걸려 몸이 망가지는 바람에 33살 때 그만두고 사법시험 공부를 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에는 3개월간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하기도 했다. 히가시카와/

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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